내가 SSS랭크로 귀환한 사연 22화
“더러운 마왕! 천박한 인간 같으니라고!!”
분명히 능력치는 현저히 하락했을 텐데 아직도 팔팔한 모습이다.
물어볼 것이 산더미인데 시끄러운 꼴을 보아하니 협조는커녕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었다.
결국 힘을 빼기 위한 봉인은 의미가 없었나 보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어쩌다가 마왕이 된 인간 따위가!! 감히 요정 여왕님의 측근인 날 이렇게 만들다니!!”
“어쩌다가 아니고 정정당당하게 쳐 잡았는데, 그 마왕.”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어! 아무리 <예언>이 있다지만 고작 인간이……! 어떻게 모든 차원계의 왕이 될 수 있단 말이냐! 그 알량한 마왕 자리, 곧 뺏기고 말걸!”
여기서도 아렐리아가 말한 <예언>이라는 게 나온다.
이쯤 되면 지겹기까지 했다.
“그 왕이라는 게 마왕처럼 그냥 각 차원계의 왕을 죽이면 되는 건가?”
“역시 무식한 마왕답구나. 그따위 천박한 방법으로는 마계의 왕이 될 수는 있겠지만 우리 고귀한 요정족의 왕이 될 수 없어! 곧 지구도 다른 차원처럼 공격받게 될 테니 그냥 가만히 있는 건 어때!?”
‘빌어먹게도 내 예상이 점점 들어맞고 있다.’
아렐리아가 한 말과 요정의 말로 추측이 정확해졌다.
<검은 탑>을 공략하지 못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구는 다른 세계들이 이미 겪은 일처럼, 타 종족들의 침략을 받고 지키지 못한다면 그대로 멸망할 것이다.
“……결국 그냥 오는 족족 죽여 버려서 끝내면 얼마나 편할까……. 귀찮게 됐네.”
하지만 무한정 쏟아져 오는 적들을 상대하기는 힘들다.
결국은 누군가가 그들을 통제할 왕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안타깝게도 지금 상황에서 그 누군가에 제일 가까운 것은, 바로 나였다.
요정은 계속해서 시끄럽게 떽떽거리며 같잖은 협박질을 했다.
귀가 다 아파 온다.
원하는 정보는 다 얻었으니 이만할까.
여전히 쓸데없이 조잘대는 요정의 입을 막기 위해 병을 크게 흔들었다.
“꺄야악!! 꺄아아아아……!”
“시끄럽게 굴면 앞으로도 이렇게…… 응?”
요정이 흔들리면서 날개에서 반짝이는 가루가 떨어진다.
설마…… 이건?
아무리 봐도 마법 재료 중 구하기 힘들다는 요정의 가루였다.
‘이거 마탑 놈들이 환장하는 건데.’
병을 조금 더 흔들자 내 예상대로 요정이 어지러운지 곧 기절해 버렸다.
신경 쓰지 않고 병뚜껑을 열어 탁자에 요정의 가루를 탁탁 털었다.
[요정의 가루[S]: 귀한 마법 재료 중 하나인 요정의 가루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도 은은하게 빛이 납니다. 주로 요정들이 노는 숲에서 새벽에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정의 가루를 얻는 방법은 정확히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용병 일을 하며 이것저것 의뢰를 받았을 때의 일이다.
한때 마탑의 일을 진행하며 요정의 가루를 요구받은 적도 있었다.
고위급 스크롤을 제작할 때나 필요한 희귀 재료였는데, 가루를 얻기 위해서는 모험가 연합에서 요정이 노니는 곳을 봤다, 따위의 허무맹랑한 소문들을 물어물어 가야 했다.
그나마도 10번 중에 하나꼴로 정말로 거짓말이 아닌 곳에서 조금씩 얻을 수 있는 재료였다.
“……그냥 몸에서 떨어지는 거였어?”
그럼 요정의 가루가 아니고 요정의 각질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더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반짝이는 가루를 보니 그런 생각도 곧 날아갔다.
쌓여 있는 요정의 가루를 긁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걸 모아 팔 만큼 돈이 필요는 없다지만 이건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지금도 각성자 커뮤니티에선 간간이 요정의 가루 한 톨이라도 구하고 싶다고 울어 젖히는 마법사들이 많았다.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한 번씩 흔들어 줘야겠는걸.’
예상치 못한 부수입에 만족감이 들었다.
* * *
어느새 아침인지 커튼을 닫지 않고 잠들어 버린 탓에 눈이 부셔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확인한 랭커 채널은 이미 기대감으로 떠들썩했다.
‘잠시 후 진행될 <검은 탑> 공략 때문인가…….’
[가을하늘: 드디어 오늘입니다. 모든 준비는 되었으니 모두 협회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홍: 이번엔 아레스 길드와 우리만 가는 거 맞지?]
[가을하늘: 네, 이번 보상은 두 길드에서 나누고 후에는 돌아가며 공략할 예정입니다. 인원수가 적을수록 보상의 질이 좋아진다는 데이터가 쌓였으니까요.]
그동안 나라별로 쌓인 공략 결과를 대조해 봤더니 인원수가 적은 공략대일수록 아티팩트의 등급이 더 좋았다.
그 때문에 이번 공략대를 꾸릴 때도 어떤 길드가 먼저 참여하니 마니 했었다.
결국 보다 보다 짜증 난 내가 그럴 거면 나 혼자 공략하겠다고 하니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홍: 보상도 공략 완료하는 대로 선착순인데, 별 거지 같은 상황을 다 보겠네.]
[마탑대표: 공략대가 많으면 안전해지지만 얻는 것이 없고, 적으면 반대 상황이라……. 협회도 머리가 복잡하겠네. 고생하십니다.]
[가을하늘: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목숨이니 다들 조심해서 공략 부탁드리겠습니다.]
[홍: 이번에도 용병왕이 같이 참여하지? 캬, 저번엔 꿀 빨았었는데…… 이번엔 어떻게 되려나.]
평소대로라면 귀찮으니 알아서 하라고 했겠지만.
워낙 저번 공략은 어이없게 완료했기에 이번만큼은 나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에 홍현민은 이번에도 손 안 대고 코 풀 생각으로 신났나.
‘마음 같아선 확 두고 가고 싶지만…….’
이미 결정된 사항을 바꿀 순 없지.
다음부터는 자유 길드와 절대 함께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홍: 영원 아저씨 부러워서 배 아파하려나? 이번에도 엄청 좋은 아티팩트 나오면 어떻게 해?]
[영원: 누가 들으면 저희 길드는 평생 탑 공략 참여 안 하는 걸로 여겨지겠네요…… ^^]
1랭크 채널에선 곧 있을 탑 공략에 잔뜩 기대하며 온갖 말을 떠들어 댄다.
과연 이번엔 어떤 보상이 주어질지,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온갖 추측을 하며 속속들이 <검은 탑>으로 모이는 중이었다.
“아렐리아, 준비는?”
“[하아암…… 드디어 탑에 가나요. 아, 오늘은 텔레포트로 이동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죠.]”
<검은 탑>은 평소에도 일반인들에게 관광지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비록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협회 직원들이 막고 있지만 멀리서라도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항상 바글바글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해 눈에 띄는 건 질색이기에 오랜만에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협회 측에 지금 출발하겠다고 연락을 남긴 후 탑으로 향했다.
오늘이 탑 공략일임을 모두가 알기에 구경 나온 민간인들과 기자들로 주변은 더욱 혼잡했다.
“그래도 관계자 전용으로 길 한 곳을 뚫어 놔서 다행…….”
부아아앙-!!
바로 옆으로 붉은 스포츠카를 오픈한 채 달리는 웬 양아치.
“홍현민이다!! 얼른 찍어!!”
차만큼이나 화려한 염색을 자랑하는 홍현민이었다.
그는 누가 봐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껏 즐기는 중으로 보인다.
통제되고 있는 바리케이드 근처에 차를 떡하니 주차하더니 유유히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다.
그에게 시선이 집중된 사이 나도 주차를 마친 후 기척을 숨기고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진 님.”
오늘도 칼정장을 입은 강준하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잔머리 하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깔끔하게 올려 정리한 헤어스타일이 눈에 띈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와서 한 번도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거울을 항상 들고 다니기라도 하는 건가…….’
“안녕하세요, 진 헌터님.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몇 번 마주쳤다고 얼굴이 익숙한 다른 헌터들도 환하게 웃으며 인사해 왔다.
내가 마지막이었는지 협회 직원이 헌터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인원을 체크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검은 탑> 입구에 모인 헌터들.
그곳엔 긴장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박신우는 우리에게 다가와 마지막으로 지급된 소모품을 체크하며 하나하나 꼼꼼히 챙겼다.
“이번 공략도 모두 무사 귀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는 씁쓸하게 말해 보인다.
국내에선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탑 공략 도중 사망한 인원이 몇 있다고 들었다.
박신우는 혹시 벌어질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저희에게는 진 헌터님이 계시잖아요? 무려 용병왕!”
“맞아요! 다치고 싶어도 진 헌터님이 모조리 처치해 주실 텐데!”
누군가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농담처럼 말한다.
그 덕분에 모두 와르르 웃으며 순식간에 분위기는 풀어지고, 이번에 얻을 보상에 대해 떠든다.
“진 헌터님께 너무 무거운 짐을 드리는 것 같지만…… 할 말이 없군요. 이번에도 헌터분들의 안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공략대 대장으로 당연히 할 일이다.”
이번 탑 11층 공략대의 대장은 나로 정해졌다.
각기 개성이 뚜렷한 헌터들을 통솔할 사람으로 나만큼 적절한 대상은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귀찮은 것은 가능한 피하자는 주의인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암묵적으로 나를 따를 텐데 기왕이면 명목상으로도 확실한 것이 나았다.
“그럼 10시 24분. 아레스 길드 헌터 열두 명, 자유 길드 헌터 여덟 명, 마탑 소속 두 명, 무소속 헌터 여섯 명. 탑 11층 공략, 시작합니다.”
수많은 인파의 환호성을 뒤로한 채 우리는 <검은 탑>의 거대한 입구를 열었다.
[환영합니다! 아시아-대한민국 채널의 탑 입장 확인 중…… 총 28인. 이번에 도전하실 층은 11층입니다.]
[<변화의 미궁>을 시작합니다.]
[퀘스트: <변화의 미궁>을 탈출하세요!]
처음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휩싸이더니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곧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가 되고, 눈앞에 보이는 곳은 회색 벽에 막힌 한 공간이었다.
어딘가의 지하임을 알 수 있을 만큼 곰팡이와 이끼 냄새가 진동했다.
‘변화의 미궁? 여기 설마…….’
전처럼 아스티란의 필드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였다.
시스템 메시지에 있던 미궁의 이름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겠지 싶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벽 곳곳 고풍스럽지만 낡은 그림들과 장식들이 너무 익숙했다.
그때 옆에 있던 헌터 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인다.
“잠깐, 저희 왜 이것밖에 없죠!?”
“하나, 둘, 셋…… 총 다섯이군.”
입장 즉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조건이 걸려 있었나.
모두를 찾아 합류할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온다.
“변화의 미궁이라…… 이거 아스티란에 있던 9대 미궁 중 하나 아닌가요?”
“다행히 저희는 근접형과 원거리, 보조 계열 헌터 모두 다 있는 조합이지만 다른 파티는 어떻게 되었을지…….”
“다행이라니요!? 여긴 아무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은 금지된 미궁이에요! 고대 네크로맨서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넓이도 어마어마하다고요!”
마탑에서 파견된 한 마법사가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그녀가 걱정할 만도 했다.
변화의 미궁에 도전한 모험가 중에서는 도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없었다.
당연히 알려져 있는 공략법 역시 없었고.
‘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지.’
모두 절망적인 상황에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면서 나를 슬쩍 쳐다보는 게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땅 파고 들어가기 전에 이쯤에서 알려 주는 게 맞겠지.
“다들 그만. 여긴 공략법이 있다. 직접 공략해 본 적도 있고……. 그러니 걱정할 만큼 어려운 상황이 아니야.”
“네?? 그게 정말입니까? 역시 아스티란 이곳저곳 다녀 보신 용병왕님답습니다!”
“정말 대단하세요! 9대 미궁 중 하나를 공략까지 해 보셨다니…….”
9대 미궁 중 하나라니.
누가 들으면 서러울 소리였다.
“아니, 모두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9대 미궁 모두 공략해 봤다고.”
내 말이 끝나고도 헌터들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멍하니 내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