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결전-6
한국을 시작으로, 악마들이 쏟아지는 포탈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악마들이 몰려들었다는 점이었다.
놈들은 약삭빠르게 플레이어들이 아닌, 일반인들만을 노렸다.
“이놈들 도대체 얼마나 죽여야 줄어드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최대한 버텨야 합니다!”
신혜진과 최은식, 그리고 손하윤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강남 한복판에서 악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발레포르는 무언가에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인왕산에서 허겁지겁 달아났었는데,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형이 그 악마를 잡으러 갔으니, 우리는 이놈들을 막기만 하면 됩니다!”
최은식이 달려드는 악마의 턱을 방패로 쳐올리며 말했다.
“키엑! 인간들을 어디에 숨겼냐!”
악마들은 주위에 플레이어밖에 없자, 성을 내며 괴성을 질렀다.
‘지금까지 수천 마리는 잡았어.’
최은식은 그런 놈을 무시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 위의 포탈에서는 아직도 악마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형의 소환수가 일반인들을 지키고 있다곤 해도, 한계가 있어.’
진원의 소환수들이 아무리 강해도, 모든 사람을 지킬 순 없었다.
이곳 강남에만 수천 마리가 쏟아지는데, 다른 지역은 오죽할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대통령이 최대한 빨리 군대를 배치하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저 위의 포탈을 어떻게든 막아야 해결할 수 있었으니까.
“은식 씨! 또 와요!”
“큭!”
최은식은 손하윤의 말에 재빠르게 방패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버틴다!’
* * *
“후, 후욱. 여기까지 오면 이제 괜찮겠지.”
상당히 외진 산 안쪽으로 들어간 발레포르가 공포에 몸을 떨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진한 죽음의 냄새가 배여 있는 마기.
서열 1위의 악마, 바알과 상당히 비슷했지만 뭔가 달랐다.
‘내가, 이 내가 이렇게 겁을 먹었다고?’
발레포르는 덜덜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세라핌이 말했던 대로, 지구의 인간들은 상당히 나약했다.
거기다 신선한 피를 몸에 품고 있었다.
악마 놈들의 맛없는 피와 비교하자면, 엄청난 고급품이었다.
이 정도로 이상적인 사냥터가 있을까?
그렇게 해방감에 듬뿍 취한 사이, 다른 악마가 등장했고.
‘망할! 망하알!’
명백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김진원! 내가 그 인간의 힘만 얻었어도 이렇게 도망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 속도로는 놈을 떼어낼 수 없다.
발레포르는 짐승 같은 자세로 엎드린 뒤, 더욱 빠르게 이동하려고 땅을 박찼다.
그리고 그 순간.
“동작 그만.”
“크, 크악?”
자신의 목을 옥죄어오는 엄청난 마기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 너는?”
자신을 추격해온 악마의 얼굴을 확인하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악마라고 생각했던 놈의 정체는 다름 아닌 김진원이었다.
“도,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마기를 품고 있는 거냐!”
말이 안 된다.
도대체 저 작은 인간의 몸 안에 얼마나 많은 마기가 잠들어 있다는 말인가!
“그건 네가 알 필요 없고, 세라핌이 보냈지?”
세라핌이라는 말에, 발레포르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진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저 위에 쏟아지는 악마들도 그놈이 한 짓인 거 다 안다.”
“잠, 잠깐!”
이대로면 죽는다.
10초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몸이 동강 날 것이다.
발레포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살려만 준다면 시키는 것을 뭐든지 하겠다고 말해왔다.
“그, 그리고 제가 세라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놈은 지금 상당히…….”
“약해져 있다고?”
진원은 말을 끊고, 목을 옥죄던 마기로 놈의 다리를 하나 잘라냈다.
서걱!
“크아아아아!”
발레포르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살기 위해 입을 쉬지 않았다.
아무리 사나운 맹수라고 해도, 거대한 코끼리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인간이 내뿜는 마기는,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라핌은 분명히 김진원이라는 인간을 잡아두라고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하다고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물며 마기라니.
악마들만이 다룰 수 있는 마기를 단순한 인간이 다룬다고?
“2분.”
“예?”
발레포르의 머리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 진원이 짧게 말했다.
푸확!
놈은 영문도 모른 채, 진원의 마기에 온몸이 짓눌리며 압사당했다.
“너 같은 놈한테 2분이나 썼다고.”
진원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남은 악마들을 처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크, 크하하하!”
한편, 왕 첸은 서울에서 벌어지는 대참사를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킹 길드가 무너지고, 자금줄이 다 끊겼다.
거기다 잡히는 순간, 자신은 사형 확정.
그나마 믿었던 은신처도 귀신같이 군대와 경찰이 확보하고 있었다.
“꼴 좋다. 필요 이상으로 나대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고층 건물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악마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다수의 플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쉴 새 없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
그리고 그것을 정신없이 막느라 바쁜 경찰과 군대, 플레이어.
이보다 좋은 기회가 있을까?
‘어차피 쓸 일도 없을 텐데, 한강으로 가서 전부 뿌려주지.’
왕 첸은 허리춤에 안고 있는 보라색 용액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악마화 포션으로 이름을 짓고 본격적으로 양산하려 했지만, 코앞에서 실패한 비운의 용액.
그는 메이 링을 버리면서까지, 한국에 복수하려 했다.
‘어디 한번 당해봐라.’
이 정도 양을 한강에다가 들이부으면, 과연 몇 명이나 몬스터가 될까?
안 그래도 불이 붙어 혼란한 와중에, 기름을 부을 생각을 하니 설레오기까지 했다.
‘차원 도약은 1회가 남아 있고, 무적 스킬도 역시 여분이 남아 있다.’
이제 남은 건, 독을 풀어 넣은 뒤 불구경을 즐기는 것.
“이 뒤에 중국으로 돌아가서 메이 링을 빼돌려 보고, 안 되면 나 혼자 도망치지 뭐.”
왕 첸은 휘파람을 불며 한강으로 향했다.
* * *
“굿 바이, 코리아.”
왕 첸은 유리병을 통째로 한강에 던져넣으려고 했다.
“……뭐지?”
그 와중 갑작스럽게 풍경이 바뀌었다.
모래바람만 휘날리는 황야.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비석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왕 첸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는 도중, 비석 뒤편에서 남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웬 놈이 허튼짓을 하려 하길래 주의 좀 주려고 했다만. 네놈, 제자가 말한 왕 첸이란 놈이구나.”
“뭐? 그것보다 여기는 어디지? 네가 한 거냐?”
왕 첸은 초조함을 감추면서, 눈앞의 남성을 향해 물었다.
‘적당히 시간을 끌면서 차원 도약으로 빠져나가면 된다.’
보나 마나 눈앞의 남자는 플레이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면, 뭔가 원한이 있는 놈인 것이 분명했다.
“어디 한번 맘껏 해 보거라.”
고재원은 실실 웃으며, 여유롭게 비석에서 칼을 꺼냈다.
웬 중국인처럼 생긴 놈이 고층빌딩을 날아다니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뭔가 싶었다.
그런데 그놈이 들고 있는 커다란 유리병.
거기다 놈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한강인 것을 봤을 때, 가만히 있다간 큰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따라갔었다.
‘정답이어서 다행이구나.’
제자에게 놈의 얼굴을 찍어 보내니, 그놈은 왕 첸이라는 지명수배자니 꼭 처리해달라는 답장을 받았었다.
놈은 이상한 기술로 도주해버리니 꼭 가둬놓고 처리하라는 당부와 함께.
“큭! 이게 왜 안 되는 거냐! 왜!”
왕 첸은 기를 쓰며 차원 도약을 사용하려 했지만, 스킬이 발동되지 않자 초조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 말 거라. 깔끔하게 베어 줄 테니.”
“개 같은 새끼가아아!”
고재원의 조소를 본 왕 첸이 다크볼을 다량 생성하며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왕 첸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 *
스스스스.
진원은 10분 전부터 자리에 가만히 서, 마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저 위의 포탈.
악마들이 쏟아져 나오는 저 포탈들만 막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뭐가 이렇게 많아?”
수십 개가 넘는 포탈을 보니,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해 마기를 더욱 세게 내보냈다
“키, 키엑!”
“나가면 죽는다! 나가지 마라!”
마기를 포탈 안으로 집어넣으니, 나오려던 악마들이 겁을 먹고 다시 돌아갔다.
“포탈은 안 없어지는 건가.”
마기를 제어하는 것은 완벽하다.
안에 있는 마의 근원 때문인지, 이대로 10일 동안 가만히 마기를 내뿜으며 서 있어도 문제없을 정도.
그러나 허공에 나타난 포탈은 사라질 생각을 안 했다.
악마들을 쫓아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자신이 언제까지고 마기를 흘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해서든 세라핌을 불러내야 한다.’
오늘, 유일하게 오늘에 한해서만 세라핌을 처치할 수 있다.
거기다, 남은 시간은 대략 10시간 정도.
놈을 처치한다면 포탈들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세라핌! 보고 있냐, 이 새끼야! 바알이 너에 대한 거 다 알려줬다!”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진원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크게 외쳤다.
“난 이대로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 어디 한번 끝까지 가봐?”
솔직히 이런 방법으로 세라핌을 불러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마기를 방출하며, 놈을 도발했다.
“저, 저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저 검은 연기는 또 뭐야!”
100미터쯤 떨어진 지점에서 진원의 행동을 본 신혜진이 기겁했다.
저 녀석이 뿜어내는 연기 덕분인지, 악마들이 더 내려오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연기를 바라보니,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맞아요, 우린 남은 몬스터나 처리해요.”
그녀는 큰 목소리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반복하는 진원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지만.
‘저놈, 뭔가 악마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남은 악마들의 처리가 먼저였다.
* * *
“큭! 인가안! 고작 인간이!”
세라핌은 자신을 향해 도발해오는 진원을 보며 격노했다.
본래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악마들이 인간들의 피를 잔뜩 머금었어야 했다.
하급이나 중급 악마들 정도야 수가 넘쳐나니까, 기다리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바알의 마기를 품고 불쑥 나타난 김진원이, 그 입구를 틀어막아 버릴 줄이야.
“저놈의 수에 놀아나야 하는 건가.”
인간은 감히 눈도 못 마주칠, 고위 천사를?
파삭. 파사삭.
“…벌써 이 정도까지 왔나.”
무리한 힘의 사용으로 소멸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나에게 결정권은 없다는 건가.”
인간에게 놀아나는 느낌이 들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제아무리 강한 악마에게 마기를 받았어도, 결국은 인간.
“네놈의 그 기고만장한 태도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지켜보겠다.”
말을 마친 세라핌은 눈을 감고, 표식을 남긴 모든 악마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지구에 풀어둔 악마와 군락에 존재하는 악마들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자신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좀 더 필요하다. 이 정도론 부족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라핌의 날개와 피부가 점점 검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