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결전-3
검보라색을 띠는 작은 회중시계.
기괴한 시계는 이전, 플레이어 이벤트에서 흡수한 악마들의 마기를 품고 있었다.
“나머지 마기는 이 녀석이 채워준다는 건가.”
스스스.
자신의 말에 대답하기라도 하듯이, 회중시계가 짙은 마기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무래도 네놈을 주인으로 인정한 듯하군.”
바알은 진원의 몸에 검은 연기가 스며드는 것을 보며 대답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마기를 다루는 법에 대해 알려주겠다.”
“다루는 법?”
그냥 동화율을 다 채우면 알아서 되는 거 아니었나?
분명히 설명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 물론 굳이 다루는 법을 몰라도 네놈의 공격에는 마기가 담긴다. 하지만 세밀하게 컨트롤이 가능하면, 더욱 강력한 마기를 사용할 수 있다.”
바알은 진원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곳에서 나가면 자신이 말한 날까지 세라핌과는 접촉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동안 마기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뭐가 이렇게 귀찮아.”
“모든 생명체를 구하기로 했으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나?”
크흐흐.
진원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자, 바알은 소리죽여 웃을 뿐이었다.
스스스스.
“크윽…….”
마의 근원의 동화율이 올라가면서, 두통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왔다.
“인간의 신체라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너의 몸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내 동생의 심장이 너의 몸에 녹아들어 있다.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다.
바알은 당황해하는 진원을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으윽…….”
동화율 90퍼센트.
온몸이 덜덜 떨리며 의식이 조금씩 흐려져 왔다.
“뭐가 이렇게 빡세냐…….”
진원은 어떻게든 의식을 잡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바알은 그런 진원을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다 끝난 건가?”
동화율 100퍼센트가 되자, 온몸을 죄여오는 느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바알!”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려보니, 바알의 몸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탁한다. 그리고 나의 억지를 들어줘서 고맙다, 인간.”
아니, 김진원.
너의 선택을 믿어라.
바알은 마지막으로 말을 남기고,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 * *
연옥 로비 중앙에 떠 있는 검은 구체.
“자, 잘못했어요오!”
“저, 저는 속으로 김진원 님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요!”
연옥 2층을 향해 도망치던 타노아와 관리자.
녀석들은 메시아와 붉은 늑대에게 붙잡혀, 다시 로비로 끌려왔다.
스윽.
“아직 팔 내리란 말 안 했어!”
“히익!”
무릎 꿇고 두 손을 높이 들며 벌 받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타노아.
메시아가 날카롭게 노려보자, 녀석은 다시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건가.”
붉은 늑대는 구체를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허리에 차고 있는 두 개의 검.
인간이라면 눈이 뒤집히며 달려들 법한 명검들을, 주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에게 건네주었다.
‘내 주제에 받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데도, 이런 모습을 보여드리다니.’
저 구체 안에는 주군이 있다.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다.
툭툭.
“괜찮을 거야. 진원은 강하니까.”
메시아가 그의 허리를 두드리며 가만히 기다려 보자고 말했다.
“그 말이 맞다.”
주군이 가진 힘.
자신이 지금껏 보아온 그 어떤 것들보다도 강력했다.
무수한 고난을 넘어온 나의 주군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질 리가 없다.
쩌적.
붉은 늑대의 말에 대답하듯이, 검은 구체에 조금씩 균열이 발생했다.
“진원!”
“주군!”
쩌저적!
그리고 진원은 그 안에서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밖으로 나왔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진원! 괜찮아?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주군.”
진원은 숨을 돌리면서, 자신에게 달라 붙어오는 붉은 늑대와 메시아에게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너희들은 여기서 뭐 하냐?”
“예?”
“어…….”
진원은 관리자와 타노아의 모습을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지 마.’
둘은 메시아의 시선을 느끼고, 입을 모아 일종의 주문 같은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역시 제 예상대로 효과가 있었어요!”
“그, 그렇습니다.”
관리자는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타노아의 말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고, 빨리 연옥 3층으로 안내해. 할 일이 많다.”
“넵!”
자신의 말에 타노아가 빠르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마기를 다루기 전에, 항마력을 마저 올려놓자. 그리고 시계의 사용법도 확실하게 익혀야겠어.’
오른손에 들려 있는 작은 회중시계.
아이템 창이 나타나지 않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마의 근원의 동화율이 100퍼센트에 도달해서 그런 걸까.
띠링. 띠링. 띠링.
“정신 사납게 또 뭐야?”
공격적으로 울려대는 알림 소리에, 뭔가 싶어 상태 창을 띄워본다.
“…뭐지?”
[ERROR]
에러라는 말과 함께, 현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인벤토리…도 에러가 뜨고. 상점도 마찬가지네.”
이것도 마기의 영향 때문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점의 기본적인 기능과 함께 인벤토리의 기능 역시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스킬과 스텟 역시 마찬가지.
시끄럽게 울려대는 알림 소리는 짜증 나게 했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스텟이랑 스킬 포인트를 미리 사용해 두는 건데.’
“히, 히이익! 살려만 주세요!”
“김진원 니임!”
진원이 인상을 쓰며 상태 창을 닫는 사이, 타노아와 관리자가 자신의 바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이놈들 왜 이러는 거야?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데?”
“마, 마기! 어떻게 인간… 아니, 김진원 님의 몸속에 그런 진한 마기가 있을 수가 있죠?”
“그런 끔찍한 느낌이 드는 마기를 뿜어내시면…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녀석들의 말을 듣던 진원이 몸을 둘러보았다.
스으으.
과연.
이래서 마기를 컨트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건가.
확인해보니 자신의 몸 밖으로 진한 마기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항마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은데.’
진원은 연옥 3층을 클리어하기 위해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말도 안 돼! 저거 진짜 인간 맞아?’
‘그걸 저한테 물어보셔도…….’
타노아와 관리자는 쓰러진 보스의 시체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10분.
아니, 그보다도 짧은 시간일 것이다.
연옥의 최종 보스를 이렇게 쉽게 처치해 버리다니!
“크하하하하! 지배자님! 제 몸에 엄청난 힘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붉은 갑옷을 입고 화염을 뿜어내는 괴상한 놈 하나.
새로운 소환순가?
김진원 님의 영향 때문인지, 저 녀석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마기까지 방출되었다.
빠악!
“크, 크악!”
“그만 나대고 쓸만한 아이템이나 챙겨.”
“아, 알겠습니다!”
보스를 단 10초 만에 두 동강 내버린 진원의 소환수, 제노사이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녀석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보스 몬스터의 시체로 향했다.
‘좋아, 역시 항마력 문제였나 보네.’
연옥 3층의 몬스터와 보스를 잡으니, 조금씩 새던 마기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보상이네.”
관리자의 설명에 따르면, 연옥은 3층이 끝이었다.
그리고 연옥을 클리어한 플레이어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주어진다고 했었지.
띠링.
잠시 후, 메시지가 나타나며 이계 던전의 클리어를 알렸다.
[이계 던전, 연옥을 클리어했습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귀환 포탈이 생성됩니다.]
[10일 뒤, 이계 던전이 소멸합니다.]
‘차원의 조각과 레전더리 아이템 중 선택이라.’
보상 내용을 확인한 진원은 관리자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녀석은 자신의 시선에 흠칫 놀라며 입을 열었다.
“보상 엄청나게 좋은 거 준다며.”
“예? 물론입니다. 저기 차원의 조각하고 레전더리 아이템 중에, 필요하신 것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진원은 대답 대신, 자신이 착용하고 있는 에픽 장비들을 보여주었다.
“그, 그것이…….”
녀석은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려고 안간힘 썼다.
그 모습을 본 진원이 피식 웃으며 차원의 조각을 보상으로 골랐다.
“장난이야, 임마.”
“예에…….”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아이템이 있다면, 딱 차원의 조각이었다.
붉은 늑대의 힘을 완전히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었으니까.
하나 문제가 있다면…….
[아이템: 차원의 조각 상자]
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뽑는 것이다.
종류: 기타
등급: 레전더리
효과: 1~5개의 차원의 조각을 획득합니다.
나오는 개수가 랜덤이었다.
‘잘못해서 1개가 나오면 망한다.’
세라핌과의 결전에 대비하려면, 붉은 늑대 또한 완전한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3개의 차원의 조각이 필요했다.
콩콩이까지 생각하면 4개 정도?
“지배자님, 여기서는 저한테 한번 맡겨주시는 것이…….”
“시끄럽고 아이템이나 빨랑 내놔.”
“예…….”
제노사이더는 진원에게 아이템을 건네고, 소환의 방으로 돌아갔다.
‘이런 데는 적임자가 있거든.’
진원이 새빨간 상자를 손에 쥔 채로, 메시아와 시선을 맞췄다.
끄덕.
그녀는 이제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뭔가 느낌이 좋아.”
예전의 조심스러웠던 때와는 다르게,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건네준 상자를 사용했다.
* * *
같은 시각.
몬스터가 출현했다는 손태욱의 연락을 받은 신혜진과 최은식, 그리고 손하윤까지 지원을 위해 인왕산으로 향했다.
“야! 최은식! 김진원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까부터 연락이 안 됩니다!”
최은식은 발레포르의 공격을 막아내며, 최대한 시간을 끌자고 말했다.
신혜진은 그사이, 자신의 길드원들과 함께 다친 플레이어들을 뒤쪽으로 대피시켰다.
“인간 놈이 생각보다 단단하군. 너의 그 잘난 방패가 언제까지 버티나 한번 지켜봐 주마.”
쉬익!
“으윽!”
“뒤로 빠져요! 튼튼아! 막아!”
손하윤의 말에, 최은식이 뒤로 빠졌다.
그리고 바로 크기를 키운 탱크가 발레포르의 무거운 공격을 방어했다.
“귀찮게 하기는. 언제까지 방어만 할 거냐!”
“진원 오빠만 오면 넌 한 방에 죽어! 튼튼아! 아이언 바디!”
서열 6위의 악마, 발레포르.
놈은 예상보다 강력해, 최은식과 신혜진, 그리고 손하윤까지 지원을 위해 인왕산으로 향했다.
‘버텨야 해. 할 수 있어!’
할아버지가 제발 가지 말아 달라며 뜯어말렸지만, 유니크 직업을 가진 내가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조금만 더 버티면 S급 플레이어, 송현성도 올 거야!’
손하윤은 입술을 굳게 깨물며, 발레포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항상 실습을 해왔고, 훈련해 왔다.
‘언제까지 오빠가 혼자서 다 막아줘야 해?’
지금까지 오빠가 혼자서 막은 위기만 하더라도 몇 갠데.
“크르르르. 네놈들, 뭔가 생각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언제까지고 통할 것 같나?”
한 명이 떨어져 나가면 다른 한 명이 붙는다.
방패를 든 인간이 생각보다 튼튼해 슬슬 짜증이 올라오던 사이, 눈앞의 인간 역시 자신을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았다.
“크으, 이러다가 다른 놈들에게 뺏겨버리겠는데.”
발레포르가 갑자기 허공을 응시하며 혼자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