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결전-1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
“좋아, 만족스럽다. 그대로만 계속하면 된다, 인간.”
세라핌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며 웃고 있었다.
그는 요즘 들어, 위그드라실을 통해 진원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 가는 것을 보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보통 인간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던 때에 비하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 셈이었다.
“저 인간의 지금의 몸 상태로도 천 년 이상은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불멸에 가까운 육체.
그릇이 좀 더 튼튼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세라핌 님! 또 그 인간을 보고 있는 거야?”
세라핌의 피조물이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자신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그래, 곧 내 것이 될 인간이니까. 그리고 저놈을 보고 있는 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확실히 가라앉는군.”
말을 마치고 다시 진원의 상태를 관찰하려는 순간,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뭐였지?”
이전에도 비슷한 느낌을 받기는 했었다.
하지만 방금 받은 느낌은 그전보다 확실히 진한, 그리고 기분 나쁜…….
“설마…….”
마기인가?
방금 느낀 기운은 마기와 매우 흡사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세라핌은 위그드라실에게 강제력을 행사했다.
꿀럭, 꿀럭.
“세라핌 님! 그러다 정말 소멸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그 모습을 본 천사 인형이 재빠르게 그를 말렸다.
“크으윽… 내 생각이 맞다면, 저 인간의 몸에 마기가 자리 잡고 있다!”
“마, 마기? 그냥 인간이 어떻게?”
세라핌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며 몸에 걸리는 과부하를 견뎠다.
꿀럭, 꿀럭.
위그드라실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세라핌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크, 크아아악!”
그 충격으로 세라핌은 세차게 튕겨 나갔다.
“다, 당장 막아야 한다! 커헉!”
그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위그드라실을 강제로 컨트롤 해 김진원의 상태를 엿본 결과, 그 인간의 몸에는 마의 근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알! 역시 네놈 짓이었냐!”
마의 근원은 서열 1위의 악마만이 가지고 있는 심장과도 같은 부위.
그것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넘겨줬단 말인가.
그리고 인간이 저 강력한 힘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 건가!
“네놈의 힘을 흡수하겠다.”
“뭐? 자, 잠깐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세라핌은 팔을 뻗어 자신이 창조했던 피조물을 분해했다.
위그드라실을 억지로 사용한 부작용을 메꾸기 위해서였다.
“망할… 악마들. 악마 놈들을 최대한 많이 338번 행성에 보내야 한다.”
세라핌은 서둘러 위그드라실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직접 그 행성에 강림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몸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바로 소멸해버릴 것이다.
무리하게 악마들의 힘을 흡수한다라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되었다간 마기에 타락해 이성을 잃어버린다.
‘먼저 강한 악마들을 추슬러 338번 행성에 보낸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다른 악마들까지 모조리 풀어버리겠다.’
현재 자신의 남은 힘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억지로라도 힘을 회복해 보는 수밖에.
“일단 강한 녀석으로 한 놈, 보낸다.”
꿀럭. 꿀럭.
세라핌은 이를 악물고 위그드라실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 * *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미친다, 내가 미쳐.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되는 거야?”
신혜진과 같이 S급 던전을 막 클리어한 진원은 불만스럽게 툴툴댔다.
자그마치 90일.
90일 동안 제대로 쉬지도 않고 기계처럼 던전만 돌았다.
그런데 마의 근원은 60퍼센트에서 거의 멈추다시피 했다.
방금 S급을 클리어했는데도 겨우 0.1퍼센트가 올라갔으니.
‘이제 남은 시간은 10일인데. 무리다.’
이걸 100퍼센트를 채우라고?
10일도 안 남았는데?
마기를 견디기 위해, 항마력을 더 올려야 한다는 메시지조차 나타나질 않았다.
‘이계 던전을 클리어할 때쯤이면 90퍼센트 이상은 채워질 줄 알았는데.’
완전히 계산 미스였다.
“야, 너 괜찮아?”
그런 진원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신혜진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방금 클리어한 S급 던전은 원래 그녀가 예약했었다.
그런데 진원은 아이템은 필요 없으니, 경험치만 얻게 해주면 던전을 1분 안에 클리어해 준다고 말해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너 요즘 제대로 쉬지도 않고 던전만 돌고 있다며, 이 또라이야. 좀 쉬어.”
그런 진원의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녀는,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전, 레전더리 직업으로 전직한 놈.
그리고 대강 추정되는 레벨만 85 이상.
거기다 에픽 아이템 다수 보유.
그런 놈이 도대체 뭐가 부족하길래 저렇게 던전을 들락거리는지.
“너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불만이야. 양보 좀 해주면 어디 덧나냐?”
이제는 포탈이 생겨나는 속도보다, 진원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말까지 나왔다.
“꼭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어서 그런다.”
“목표? 그게 뭔데?”
진원의 말에 신혜진이 궁금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말은 못 한다.”
“나한테만 말해봐.”
그러자 그녀는 꼭 비밀로 해주겠다며 진원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말하면 지구가 멸망해.”
“지랄하네. 그냥 말하기 싫다고 하지그래.”
“뭐? S급 던전 평생 들어가기 싫다고?”
“하… 그래, 내가 졌다.”
그녀는 진원을 째려보며 아이템을 챙기러 보스에게 다가갔다.
저 인간은 어차피 또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냥 신경 끄고 자기 할 일이나 하는 것이 답이라고 판단했다.
‘…야, 바알. 이거 진짜 잘되고 있는 거 맞냐? 이럴 때는 대답 좀 해줘도 되잖아.’
진원은 속으로 마기의 근원에게 말을 걸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해 죽겠네.’
바알이 예고한 날까지 10일도 안 남았는데, 여기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지.
‘슬슬 이계 던전이나 마무리할까.’
관리자 말로는 분명히 클리어 보상이 엄청나다고 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 크이! 크이이이!
- 아! 콩콩아! 좀! 오빠! 집에 좀 와서 콩콩이 좀 달래 줘봐. 오빠 보고 싶다고 난리야, 아주 그냥.
말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서럽다는 듯이 뭐라고 울어대는 콩콩이.
그리고 동생은 요즘 얘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자겠다며 제발 하루만 집에 좀 있어 달라고 애원해왔다.
- 그래, 오늘은 들어갈게.
그러고 보니.
최근 신경 쓸 일이 많아, 콩콩이를 의도치 않게 방치해 버리긴 했다.
‘…하루 더 한다고 동화율 100퍼센트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네.’
진원은 녀석을 달래기 위해 치킨을 포장해가기로 했다.
* * *
“크이! 크, 크이이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콩콩이는 진원의 다리에 달라붙어 머리를 비볐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할 일이 많아서 그랬어.”
진원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포장해온 치킨을 보여줬다.
‘저 정도면 나름 강해졌긴 하고, 내 이름까지 있어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빠, 그냥 얘 심심할 때마다 돌아다니게 하면 안 돼? 콩콩이 나름 똑똑해. 우리 집 비밀번호도 기억한다니까?”
“크이!”
콩콩이는 동생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이거 봐. 내가 목걸이 달아줬어.”
콩콩이의 목에는 목걸이가 하나 걸려 있었는데, 큼지막한 글자로 주인:김진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쯤 되면 녀석을 납치하기는 무슨, 오히려 피해갈 것이 분명했다.
“그래, 앞으로는 그렇게 해. 그 대신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말고.”
워낙 활동적인 녀석을 장기간 내버려 뒀으니, 미안함을 느낀 진원은 결국 콩콩이의 외출을 허락했다.
“크이이이!”
“얌마, 내 바지에 치킨 기름 다 묻는다.”
진원은 피식 웃으며, 콩콩이를 입가를 닦아 주려고 했고.
띠리리.
“타이밍 참 귀신같네.”
그때, 손태욱에게서 연락이 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 김진원 씨. 밤에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상황이라!
자신이 예상했던 대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태욱은 서울 외곽의 산에서 악마가 나타났다며,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알려왔다.
“…갑자기 악마라고요? 던전 브레이크일 리가 없는데.”
아까 클리어한 S급 던전을 마지막으로, 악마가 나타날 만한 등급의 포탈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았다.
S급 A급, 그리고 B급 던전까지 자신이 전부 클리어했으니까.
-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던전 브레이크가 아닙니다!
이어지는 손태욱의 설명.
악마는 인왕산 쪽에서 출현했는데, 그 근처에는 포탈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거기다 놈은 상당히 강한지, A급과 B급 플레이어들로는 시간 끌기조차 버거워 자신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 현재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중상을 입은 플레이어만 5명이 나왔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세요.”
- 감사합니다! 주소는 바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진원은 전화를 끊고, 곧바로 손태욱이 알려주는 위치로 향하려 했다.
- 그곳으로 가면 안 된다. 지금부터 내가 알려주는 위치로 가라.
“뭐?”
그동안 묵묵부답이었던 바알이, 우면산에 있는 이계 던전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했다.
“악마를 처리하고 가면 되잖아!”
녀석은 자신의 반박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우면산으로 향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망할 새끼…….”
진원은 인상을 구기며, 우면산을 향해 내달렸다.
* * *
같은 시간.
인왕산 근처에 출몰한 서열 6위의 악마, 발레포르.
육중한 근육질의 몸에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놈은, 손톱에 묻어 있는 피를 핥으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봐, 김진원인가 뭔가 하는 인간을 이리로 데려와. 그놈의 피가 최고로 맛있다던데? 거기다 엄청나게 강하다며?”
“김진원 씨는 금방 오실 거다! 그리고 네놈은 벌벌 떨다가 뒤지겠지.”
어느새 30명 가까이 모인 플레이어들.
그들의 목표는 김진원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거냐…….’
여기 근처에는 분명히 포탈이 없을 텐데, 어떻게 악마가 튀어나온 거지?
“크하하하핫! 뭐? 벌벌 떤다고? 이 내가?”
발레포르는 배를 부여잡고 크르릉거리며 웃었다.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놈이니, 죽일 생각 말고 시간만 끌어주면 된다는 세라핌의 말이 떠올랐다.
‘이 내가 그 인간을 가만히 놔둘 리가 있을 것 같나?’
물론 자신보다 훨씬 강했던 상위의 악마들이 김진원이라는 인간에게 죽은 것은 자신도 알고 있다.
‘예전의 나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
하지만 세라핌에게 힘을 건네받으면서, 평소의 자신보다 힘이 5배 이상은 강해졌다.
위그드라실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쉽게 지구로 올 수 있다니.
“김진원이 도착할 때까지 네놈들의 피를 마음껏 마셔주마!”
발레포르는 다른 악마들이 도착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인간의 피를 독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