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세라핌.
“어? 저게 언제부터 있었지? 형! 포탈이네요!”
진원의 시선이 한쪽으로 고정되자, 최은식과 손하윤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와, 오빠! 던전 안에서 포탈이 나타나는 경우는 잘 없다던데! 오늘 대박이에요!”
그녀는 진원의 능력 정도면 거저먹는 수준이라 생각하며,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오빠?”
“형?”
“너희들은 돌아가 있어.”
은은하게 빛나는 검붉은 색의 포탈.
저건 분명히 자신이 0레벨일 때, 짐꾼으로 들어갔었던 포탈과 똑같았다.
‘확실하다. 느낌이 똑같아.’
분명히 아까까지는 없었다.
거기다가 눈에 잘 띄는 위치였고, 자신이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형,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최은식과 손하윤은 험악하게 일그러진 진원의 표정을 보고 순순히 귀환 포탈로 향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나보고 다시 와보라 이건가?”
진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은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 *
“역시 똑같네.”
통로를 거쳐 텅 빈 공간으로 들어온 진원은 눈앞에 보이는 비석을 향해 걸어갔다.
과거에 이 공간에서 죽어 나간 플레이어들의 시체나 핏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 한번 나와 봐라. 늑대 새끼야.”
진원은 붉은 늑대와 메시아, 그리고 소환수들을 꺼내 배치한 뒤 비석의 기능을 활성화했다.
스스스.
그러자 붉은 털을 가진 늑대 괴물이 공간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1분? 내가 1분 안에 죽여준다.’
그런데 이번에는 1분 동안 살아남으라는 메시지가 없었다.
쿵!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눈앞의 몬스터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뭐지?’
진원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인상을 구겼다.
놈에게는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플레이어 김진원,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냥 처리할까 생각하던 찰나.
늑대 몬스터가 얼굴을 들더니, 중성적인 목소리를 냈다.
“…뭐야?”
[제 이름은 세라핌입니다. 이전부터 당신을 눈여겨보고 있던 천사죠.]
진원은 세라핌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 감정을 격하게 드러낼 뻔했다.
“이런 씨…….”
- 인간, 마음을 다스려라. 그리고 놈의 말에 넘어가지 마라.
그때, 머릿속으로 바알의 목소리가 울렸다.
[본래는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만, 너무 특출난 존재였기에 이렇게라도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특출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마음을 진정시킨 진원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녀석에게서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다.
‘바알과 발렌타인이 나에게 말했던 정보는 비슷하다.’
그럼 그 내용이 확실한지, 이 녀석을 잘 이용해야 해.
[수많은 행성 중에서, 강인한 생명체를 찾고 있었습니다. 제 특별한 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거든요.]
세라핌은 자신의 소멸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방대한 힘을 받아들일 대상이 필요하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몬스터들을 내보내고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해야 하는 거냐?”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저로서도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라핌의 말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최대한 자신에게 편의를 봐주며 대답하는 느낌이 들었다.
‘대강은 알겠네.’
대략 20여 분.
진원은 녀석에게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아내려 노력했다.
‘네가 하는 말 대부분이 거짓인 것쯤은 알겠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을 이어받을 존재를 찾지 못하면, 우주 자체가 소멸한다는 세라핌의 대답.
놈은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여, 수많은 생명이 죽어 나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진원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강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이라도 한 방 날리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일단 세라핌의 본체를 끌어내야 하기도 하고.
녀석이 가장 약한 시간에, 최적의 상태로 쓰러트려야 했으니까.
[말이 길었군요. 그래서 당신에게는 제가 특별한 제안을 하나 할까 합니다.]
“제안?”
[그렇습니다. 제 표식을 받아주었으면 합니다.]
세라핌은 이마에 자신의 표식을 남기는 대신, 강력한 스킬들을 주겠다며 유혹해왔다.
그리고 진원의 눈앞으로 에이션트 붐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의 스킬들이 떠올랐다.
‘표식이라고? 내가 그걸 받을 리가 있겠냐? 뭔지도 모르는데.’
세라핌의 속내를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녀석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몰랐다면,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 정도로 스킬들의 성능이 강력했으니까.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진원은 잠시 고민하는 척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저는 특별대우를 싫어합니다. 지금까지도 정당하게 강해져 왔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천사라고 하시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놈이 기분 나쁘지 않게 적당히 둘러서 말했다.
괜히 잘못 말했다가, 무슨 돌발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주군…….’
‘진원…….’
붉은 늑대와 메시아, 그리고 소환수들은 그저 초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 표식을 받는다면, 당신의 직업을 레전더리 등급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스킬들을 전부 드리죠.]
진원의 거절에, 세라핌이 다시 한번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당신의 대답 한 번이면,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작업이 끝납니다.]
거기에 덧붙여 스킬들은 자신의 독단으로 건네주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얻을 수 없을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많이 아쉬운가 보네? 저렇게까지 할 정도면.’
- 인간, 놈의 표식을 받게 되면, 저놈에게 몸을 바로 빼앗기게 된다.
‘나도 예상했어, 임마.’
평소엔 말을 걸어도 대답해 오지 않는 바알.
놈은 이럴 때만 열심히 자신을 설득해왔다.
“감사합니다만, 전 특별대우를 싫어합니다.”
[당신의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저도 이 이상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진원이 완고하게 거절하자, 늑대 몬스터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다시 비석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귀환 포탈이 생성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뒤로, 귀환 포탈이 생겨났다.
- 인간은 욕망이 가득한 생물이며, 유혹에 약하다고 들었는데 전혀 다르군.
“야, 그것보다 저놈이 왜 갑자기 나를 부른 거냐?”
바알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잠잠해졌다.
“지 할 말만 하네.”
진원은 가슴팍을 한번 쳐다보고,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
“인간… 이 정도로 유혹해도 끄떡도 안 하다니.”
늑대 몬스터에게 잠시 빙의했던 세라핌이 고개를 저었다.
위그드라실의 시스템에 간섭하면서까지 김진원에게 표식을 남기려고 했는데, 일이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을 너무 썼다.”
세라핌은 그와의 대화 중,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다시 한번 시스템에 간섭해볼까 생각했다.
“아니, 안 된다. 이 이상 힘을 사용하면 소멸이 앞당겨질 뿐이다.”
이미 위그드라실에게 대부분의 힘을 사용해버렸다.
잠시 몬스터의 육체를 사용하는 것도 부담되는데, 시스템을 강제로 건드린다면 엄청난 부하가 걸릴 것이다.
“인간 중에서 저렇게 우수한 놈이 있었을 줄이야. 덕분에 계획을 좀 더 빨리 진행해도 되겠어.”
세라핌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 * *
진원은 던전 밖으로 나오자마자, 곧바로 다른 포탈로 향했다.
‘괜히 조바심 나네.’
오늘은 은식이와 하윤이를 데리고 적당히 경험치 좀 나눠주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세라핌.
녀석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망할 새끼. 그리고 그 포탈이 뭐? 잠재력이 있는 대상에게만 나타난다고?’
과거에 자신이 죽을 뻔했던 그 1분.
그딴 짓을 다른 곳에서도 벌이고 있었을 줄이야.
‘일단 오늘은 최대한 던전만 돌아보자.’
아까 B급 던전의 보스를 처치하니, 미약하게 마의 근원의 동화율이 올랐다.
미리 예약한 A급 포탈 5개와 B급 포탈 4개.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B급 보스 한 마리에 0.1퍼센트? 너무 짠데.’
이걸 어느 세월에 100퍼센트로 만드냐.
포탈의 개수만 충분했어도 한 달 안에 만들 자신이 있는데.
“…역시 해외로 가야 되겠는데.”
길드의 직원들이 예약해준 던전으로는 턱도 없었다.
진원은 스마트폰을 꺼내 손태욱에게 연락했다.
- 안녕하십니까, 진원 씨!
손태욱은 역시나 3초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제가 단기간에 던전을 많이 클리어 해야 하는데, 도움 좀 받을 수 있을까요?”
- 해외 말입니까? 던전 한두 개 정도야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이어진 그의 설명.
해외 소속의 플레이어가 한 달에 10개 이상의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 법이 있었나?’
솔직히 자신의 힘 정도 되면, 억지로라도 포탈에 들어가면 상관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국가 이미지까지 망치는 건 좀 그렇지.’
뭔가 방법이 없나 싶어 생각하던 도중, 문득 중국이 떠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대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중국.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만큼, 당연 포탈의 개수도 세계 최고였다.
“중국에서 가장 높은 분을 만나러 가야겠네요.”
- 예? 중국 말입니까?
놈들은 현재 한국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고 있다.
정확히는, 자신의 눈치였지만.
‘이놈들을 끝까지 빨아먹어야겠는데.’
진원은 말 좀 잘 전해달라며 말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 * *
중국의 북경 중남해.
“후우, 도대체 그 한국인은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건가?”
중국의 최고 지도자, 시젠타오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었다.
안 그래도 이곳저곳에서 자신의 나라를 들쑤시고 있어 짜증 나 죽겠는데.
그 와중에 김진원이 자신을 만나러 온다니!
당연히 그에게 거절할 권한은 없었다.
“크으… 망할 플레이어 새끼들…….”
시젠타오는 주먹을 쥔 채로 업무용 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최고의 대접을 준비해.”
“예!”
“알겠습니다!”
그의 무거운 말 한마디에,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 간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킹 길드가 그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산 건가?’
엄청난 자금력과 함께 힘을 지녔던 킹 길드.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세계 1위의 플레이어가 저렇게 대놓고 공격을 해온단 말인가.
‘후우,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는 수밖에.’
시젠타오는 그동안 킹 길드에게서 온갖 뇌물을 받아왔다.
그것을 이용해서 중국의 입지를 더욱 튼튼하게 다졌고.
‘내가 킹 길드와 엮여 있다는 것은 들키면 안 된다.’
* * *
“어서 오십시오, 한국의 플레이어 김진원 님!”
진원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엄청난 수의 중국인들이 자신을 맞이해줬다.
‘억지로 웃는 거봐라.’
중국인들의 얼굴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자신들에게 있어선 원흉 그 자체일 테니.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국어가 능숙한 중국인 한 명이 자신을 공손하게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김진원 님.”
긴 복도를 따라가 나온 넓은 공간의 사무실.
정장을 입은 시젠타오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