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발렌타인
“이건 또 뭐냐?”
플레이어 협회의 입구에 도착한 진원은 인상을 살짝 구겼다.
앞에서 칼 같은 간격으로 주차된 검은색 차량들.
그리고 검은색 양복을 입은 거한의 서양인들이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진원 님.”
그중 한 명이 자신에게 다가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네, 누구시죠?”
“저는 그저 발렌타인 님의 경호원입니다. 김진원 님을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깔끔한 한국어 발음.
“제가 알아서 갈게요.”
진원은 영업용 미소를 짓는 그를 깔끔하게 거절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대통령이 와도 이 정도까지는 아닌데, 뭐지?’
과할 정도의 호위들.
느껴지는 마력을 보면, 그중 대다수가 플레이어였다.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이건가. 일단 들어가 보면 알겠지.’
진원은 곧바로 협회장실로 향했다.
“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진원 씨!”
소파에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던 손태욱이 그를 보자마자,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네, 그런데 괜찮으세요?”
“예? 아, 예. 허허허.”
손태욱은 긴장했는지, 이마에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그 청년이 세계 랭크 1위의 플레이어, 김진원 맞아?”
“예, 확실합니다.”
진원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던 손태욱은, 곧바로 뒤를 돌아 외국인 여성에게 대답했다.
미국인이지만 동양적인 외모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 발렌타인.
‘하필 진원 씨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여야 하다니…….’
손태욱은 예전, 그녀에게서 큰 도움을 받았었기에 김진원을 갑작스럽게 불러내는 부탁을 받아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망할 놈들. 뻔하지, 뻔해.’
발렌타인.
30이 넘은 나이지만, 20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 여성.
그리고 미국에서 유일하게 레전더리 직업을 보유한 플레이어.
“손태욱, 지금까지 약속을 잘 지켜줬군요. 감사드려요.”
“아, 아닙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손태욱은 재빠르게 손사래를 치며, 진원을 자리로 안내했다.
공식적으로 레전더리 직업을 가진 플레이어는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즉, 발렌타인은 미국에서 철저하게 정보를 은폐하고 관리하는 플레이어라는 뜻이다.
‘역시… 이번 이벤트를 보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건가.’
이번에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된 플레이어 이벤트의 실체.
그리고 이벤트에서 보여준 김진원의 압도적인 힘.
미국은 발렌타인을 앞에 내세워서라도, 그를 꼭 데려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발렌타인이라고 합니다. 본명은 따로 알려드릴 수 없어서, 죄송하네요.”
“김진원입니다.”
그녀는 진원에게 악수를 건넸다.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가 뭔가요?”
진원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맞잡은 뒤,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를 보면 대강 예상은 간다.
앞에 앉은 저 여자가, 손태욱 씨를 이용해 나를 불러낸 것이겠지.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 제안 같은 걸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호호, 그건 또 의외네요.”
발렌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진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겠어? 분명히 저 남자의 성에 차지 않았겠지.’
이미 김진원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플레이어다.
웬만한 재화로는 그를 움직이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거든.’
짝짝.
발렌타인이 가볍게 박수를 치자,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남성들이 다가와 진원에게 서류 1장을 내밀었다.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겨우 이것 때문에 저를 부른 겁니까?”
미국 특별 이민 서류.
내용을 확인할 가치도 없다.
진원은 화난 기색으로 대답하며, 발렌타인의 눈을 응시했다.
“릴렉스 하세요. 제가 찬찬히 설명해 드릴게요.”
발렌타인은 가볍게 웃으며, 지금까지 일어난 이벤트.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위협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까지 3번의 플레이어 이벤트가 열린 것은 알고 계시겠죠? 그리고 김진원, 당신은 3번의 이벤트에서 모두 살아남았고요.”
“그래서 미국으로 넘어와 달라, 이거 아닌가요?”
“호호, 급하시네요. 원래는 기밀인데, 당신에게는 특별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발렌타인은 앞으로 최소 1년 동안은 이벤트가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년…….”
이전, 바알이 자신에게 말했던 기간과 일치했다.
설마 이 여자도 바알과 같은 계열의 스킬을 가진 건가?
“그리고… 이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10년 안으로 지구는 멸망합니다.”
“미래를 보는 스킬이라도 가지셨나요? 1년 동안 이벤트가 열리지 않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진원의 질문과 대답에, 발렌타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3번이나 이벤트에 참가한 당신이라면 알 만한 정보군요. 그리고 말하신 대로, 저는 미래를 예측하는 스킬을 가졌습니다.”
“발렌타인 님!”
“스킬을 함부로 알려주시면!”
그 대답에, 경호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발렌타인을 불렀지만, 그녀는 손을 들며 괜찮다고 말했다.
“세계 랭크 1위잖아요. 저도 최대한 성의를 보여야죠.”
“그 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호호, 흥미가 생기셨군요? 그럼 이걸.”
발렌타인이 진원의 말에, 이민 서류를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더 듣고 싶으면 도장을 찍어라, 이 말인가.
그렇다면, 일단 한번 떠볼까.
“천사.”
“네?”
진원이 뱉은 단어 하나에,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천사? 그게 뭐지?”
다른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저 인간이 어떻게… 설마 막 던져 본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자신의 직업은 오라클.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꿈을 통해 일정 부분 읽어내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 뿐만이 아니다.
레전더리 직업인 만큼, 다른 플레이어의 직업 등급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는 직업 스킬이 존재했다.
‘정말로 알고 있는 건가?’
발렌타인 역시, 진원을 떠보기 위해 세라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냈다.
그러자 진원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신 건가요? 혹시 자세한 내용을 알고 계시나요?”
“자세히는 말 못 해 드립니다. 그리고 단면적인 것 말고는 모릅니다.”
“하아…….”
그녀는 진원의 대답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살살 꼬신 뒤에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면, ‘클래스 어퍼’ 스킬로 마무리를 하려고 했었는데.
“다들 나가 주세요.”
“예? 하지만 발렌타인 님.”
“두 번 말 안 합니다. 나가 주세요. 그리고 절대로 듣지 마세요.”
“예… 예!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손태욱을 포함한 호위들이 밖으로 나갔고, 협회장실에는 진원과 발렌타인만이 남게 되었다.
“저는 오라클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레전더리 직업을 보유한 사람이죠.”
“레전더리라고요?”
“네.”
공식적으로는 유니크 직업까지 밖에 없을 텐데.
의외의 대답에 진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어느 정도 읽어 낼 수 있어요. 하필이면 지구가 멸망하는 미래를 봐 버린 게 문제지만요.”
그리고 그녀는 오늘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과 보유한 특수 스킬인 클래스 어퍼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저를 꼬셔서 미국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이걸 저한테 다 말해주셔도 되는 건가요?”
그녀가 1년에 1번만 사용할 수 있다는 스킬, 클래스 어퍼.
직업 등급에 상관없이, 무조건 한 단계의 등급이 올라가는 스킬이라니.
‘미국이 이 사람을 철저하게 숨기는 이유가 있었구만.’
레전더리 직업의 스킬에 대해 속으로 감탄하던 사이, 발렌타인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말해주면, 당신도 알려주실 것 아닌가요?”
어떻게 할까.
저 여성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모든 정보를 알려줄 수는 없지.
잠시 자리에서 고민하던 진원이 입을 열었다.
“저 역시, 그쪽과 비슷한. 아니, 보다 상위 계열에 있는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건네받았습니다.”
“사, 상위 계열? 그런 플레이어가 존재한다구요?”
“제가 만난 녀석은 과거와 함께, 수많은 미래를 읽어냈습니다. 한 9만 개 정도?”
“9만… 개.”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다.
보통 같으면, 장난치지 말라고 불같이 화를 내야 정상인 상황.
그러나 진원의 표정을 보면, 그것이 거짓이 아닌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혹시, 그중에서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미래는 몇 개 있나요?”
그 정도로 많은 미래를 읽어냈으면, 적어도 수천 개의 길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내심 희망을 품던 발렌타인이었지만,
“1개입니다.”
“막을 수 있는 방법은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하아…….”
단 한 개라는 말에,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믿기 힘드네요. 저보다 상위 계열의 플레이어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방금 말하신 내용도 그렇고요.”
“믿는 것이야 자유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말은 하지 마세요.”
“그거야 당연합니다. 저는 당신과는 다르게, 전투능력이 전혀 없거든요. 저에 대한 정보가 밝혀지면 다른 나라들이 가만 놔두겠어요?”
발렌타인은 진원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고, 이 남자의 페이스에 완전 휘말려 들었어.’
자신의 패를 모두 내보이고도, 그를 미국에 끌어들이지 못 했다라.
정말 최악의 결과였다.
‘거기다 나보다 더욱 상위 계열의 플레이어가 있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김진원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능력은 그 플레이어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아쉽네요. 당신을 앞으로 내세워, 미국의 전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생각이었는데요.”
그녀는 이민 서류를 진원이 보라는 듯 찢은 뒤, 선물을 주겠다며 두 손을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호호, 저는 지금, 당신의 등급을 한 단계 올려드리려고 해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자신의 두 손을 잡아달라고 말했다.
“그걸 아무 대가도 없이 해준다고요?”
“저야 그러고 싶은데, 그러면 김진원 씨가 수상하게 생각하실 테니. 제가 곤란에 처하면 한 번 도와주는 걸로 어떠신가요?”
그리고 이어지는 발렌타인의 설명.
클래스 어퍼라는 스킬은 잠재력이 있는 플레이어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히 김진원 씨는 잠재력이 충분하다 못해 넘쳐요.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죠.”
그녀는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며 재차 말해왔다.
‘어떻게 할까.’
딱히 수상하다는 느낌은 안 드는데.
자신의 직업인 계약 소환사.
당연히 레전더리 등급으로 상승이 가능한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게 언제인지가 몰라 문제일 뿐.
‘전직 퀘스트 때도 고생했는데, 레전더리는 분명히 더 하겠지.’
지금이라면, 눈앞의 여성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 그 과정을 강제로 건너 뛸 수 있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에 한해서 도와드릴게요.”
“좋아요. 그럼 제 두 손을 잡고, 제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발렌타인이 진원의 눈동자를 응시하길 잠시.
“…이게 왜 이러지?”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끔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