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진실-2
“…지금 뭐 하는 거냐?”
진원은 팔을 넓게 벌리며 일어선 바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녀석의 말을 전부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에 있었던 이벤트.
기괴한 시계의 효과 덕분에, 바싸고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효과야 아직 확실하게는 모르겠지만.
[인간, 나를 죽이고…….]
“내가 너를 꼭 죽여야 마의 근원인가 뭔가를 얻을 수 있는 거냐?”
[그건 아니다.]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정보나 더 내놔.”
진원은 바알의 말을 끊고 자리에 앉았다.
붉은 늑대와 메시아는 그의 양옆으로 붙어, 여전히 바알을 경계했다.
[재밌는 인간이군. 나를 죽이면… 네놈 기준으로 5레벨은 오를 텐데. 그래도 마다하는 건가?]
“레벨이야 시간만 있으면 언제든지 올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세라핌에 대한 정보는 아니지.”
바알은 진원의 날카로운 대답에 의외라는 듯 표정을 지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저 인간에게 마의 근원만 넘겨주면 되는 일이니.’
오랫동안 홀로 자리를 지키다 보니, 저 인간의 말에 넘어가 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그렇게 판단한 바알이 알려줄 수 있는 정보만 몇 개 말해주겠다며 입을 열었다.
[위그드라실은 일정 주기마다 이벤트라는 명목으로 플레이어들을 강제적으로 데려가지. 이것을 마지막으로 1년 동안은 이벤트가 없을 것이다.]
대략 30분 정도 이어진 대화.
진원은 대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위그드라실이나 천사가 플레이어들의 상태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만든 영역뿐.’
그리고 이와 같은 짓을 수많은 행성에서도 진행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육체를 손에 넣기 위해.
‘겨우 죽는 게 무서워서 이런 짓을 벌였다라…….’
그것도 수천 년 동안 살 만큼 산 천사가…….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일단 세라핌을 상대하려면 이쪽으로 불러내야 한다는 거네.’
그러나 괜히 최종 보스를 지구에 불렀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것대로 문제다.
‘100일이라.’
바알이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
100일을 명심해라. 그리고 놈에게 들키지 마라.
100일이야 세라핌이 가장 약해지는 날이니 알겠지만, 들키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요구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는 건가.’
그렇게 진원이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푸학!
바알이 자신의 가슴팍으로 손을 깊게 찔러넣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원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상관없다.]
뿌득!
그리고 흑색을 띠는 커다란 구슬을 빼내, 진원을 향해 내밀었다.
[이것이 내가 가진 마의 근원이다. 이것을 소유한 자는 나 말고는 없다. 그리고…….]
바알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수명이 다했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그의 손안에 있던 구슬은 공중으로 떠올라, 천천히 진원을 향해 다가갔다.
“후우, 너무 갑작스럽잖아.”
진원이 바알에게 다가가 그것을 잡으려 하자, 구슬이 재빠르게 그의 가슴팍으로 들어갔다.
“뭐, 뭐야!”
워낙 순식간이라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그가 가슴팍을 잠시 매만지던 사이.
띠링.
[마의 근원이 몸 안에 깃듭니다!]
동화율: 0 퍼센트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모든 공격에 마의 기운이 강하게 담깁니다.
#동화율이 높아질수록, 높은 항마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의 기운이 담긴다라…….”
과연.
이 기운을 강화하는 것이, 세라핌을 죽일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또 다른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근데… 이거 세라핌이 알아차리는 거 아니냐?”
세라핌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마의 근원.
상태 창과 시스템을 세라핌이 만들었다고 하면, 당연히 자신이 마의 근원을 얻었다는 것도 알게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것을 당연히 가만히 놔둘 리가 없을 텐데…….
- 위그드라실은 능력을 나누어 줄 뿐이다. 그것을 훔쳐보는 능력은 없다.
“아, X발 깜짝아!”
갑작스럽게 바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자, 진원은 화들짝 놀라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렇게 될 거면 미리 말이라도 해 주고 죽든가.”
근원에 담긴 내 의지의 힘은 미약하다. 얼마 안 가 사라질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알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아, 이 새끼… 동화율이라도 어떻게 높이는지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일단 이곳에서 나가자.
진원은 차갑게 식어가는 바알의 시체를 보고, 상점을 열었다.
“이대로 놔두기에는 찜찜하다.”
그리고 커다란 모포를 구입해 녀석에게 덮어주고 한번 바라본 뒤, 발걸음을 옮겼다.
* * *
“어? 형!”
“야! 너 어디 갔다 왔어?”
“제자야!”
진원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소파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행들이 몸을 일으켰다.
“…제자야, 괜찮느냐?”
“네? 아, 네. 괜찮습니다.”
그의 표정 변화를 재빠르게 알아차린 고재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껴, 진원에게 심안을 사용했다.
“제, 제자야. 네 몸에 들어있는 그것… 도대체 뭐냐?”
그리고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말해드릴 수 없습니다.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최대한 숨겨주세요.”
“나한테도 알려줄 수 없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여느 때보다도 진지한 제자의 표정.
고재원은 침을 꿀꺽 삼키며,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형? 도대체 뭐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제자야. 이벤트 영상이 유출되었구나.”
최은식의 물음에, 고재원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바꿨다.
“…네?”
이벤트 영상이 유출되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사장님, 이것을 보십시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시현이 재빠르게 다가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유투브의 영상.
그것도 몇 시간이나 되는 재생시간.
화면에는, 확실히 자신을 포함한 일행과 악마들이 싸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 끄아아아아!
- 으아아아!
익명1: 아, 미쳤네 진짜;; 저거 봐라. 뭔 사람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없어지잖아.
익명2: 저거 수배 중인 S급 플레이어 이연우임. ㅅㅂ색기 꼴 좋다.
익명3: 아니 그것보다 우리가 이벤트에 끌려가면, 저렇게 될 수 있는 거 아니냐?
익명4: 플레이어만 간다는 보장도 없음. 다음엔 일반인도 끌려갈 수도 있음.
익명5: 아니 저 인형은 또 뭐 하는 새끼임?
당연히 규제되어 삭제되어야 할 영상이, 유투브를 포함해 SNS에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특히 이연우가 순식간에 녹아 없어지는 부분은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벤트가 시작되고 나서, 허공에 영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끝나자마자 바로 사라졌습니다.”
“…그렇군요.”
이시현의 설명에, 진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야 상관없겠지만, 동생이나 영호가 보면 기겁할 수준인데…….
띠리리. 띠링.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 돌아오자마자, 동생의 전화와 함께 영호의 문자폭탄 세례가 이어졌다.
“일단 다들 해산하죠.”
일행들에게 고생했다고 말하며 등을 돌린 순간, 신혜진이 자신을 멈춰 세웠다.
“자, 잠깐! 잠깐만! 너 이번 이벤트에서 1등 했잖아.”
“그래.”
“보상 뭐 받았어?”
“스킬 한 개.”
그녀가 설명을 요구하기도 전에, 진원은 바쁘다며 자리를 떠났다.
“아, 저놈 도대체 또 뭘 얻은 거야? 궁금해 죽겠네.”
* * *
“오빠!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으허어엉!”
집에 돌아오자마자, 동생 김지원은 자신에게 달려들며 울어댔다.
바로 밀쳐내려 하다가, 그 행동이 진심임을 걱정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너, 설마 그거 다 본 거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오빠 혼자서 계속 싸우던데!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라며? 왜 말을 안 해줘? 이거 엄마 아빠도 봤으면 식겁했을 거라고!”
“가족한테 그런 걸 어떻게 말하냐.”
앞으로는 이런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주며, 동생을 달래는 사이.
쿵! 쿵! 쿵!
“김진원! 안에 있냐! 빨리 문 열어!”
최영호가 사납게 문을 두드렸다.
“…야, 그거는 좀 내려놓고 말하자.”
문을 열어주자마자, 최영호가 배트를 들고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훈련하는 도중에 급하게 달려왔는지, 야구복에 흙이 잔뜩 묻어 있다.
“후우, 플레이어가 어딘가로 강제로 끌려간다는 건 듣기야 했는데, 그것이 하필 너일 줄이야.”
“그러니까! 왜 하필 오빠냐고오!”
식탁에 앉아 설명을 요구하는 둘.
진원은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정보만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콩콩아, 이거 좀 어떻게 해봐.’
“크이?”
심각한 분위기에 상관없이 진원의 다리에 붙어 얼굴을 비비고 있던 콩콩이가, 갑자기 식탁 위로 뛰어올랐다.
“콩콩아! 여기 위로는 올라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을…….”
“크이! 크이!”
녀석은 동생의 볼에 힘껏 얼굴을 비비다가, 최영호에게 가서는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녀석만의 위로인 셈이다.
“풉! 간지러워! 아하하하!”
“후우. 어쨌든 억지로 끌려간 거니까, 이 이상 뭐라 하기도 그렇네.”
김지원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최영호도 김빠진 듯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냐, 바로 가게? 밥이라도 같이 먹지, 왜.”
“…훈련 도중에 급하게 나온 거야. 바로 가야 된다.”
“그래, 나중에 경기하면 말하고. 힘내라.”
“너도.”
최영호는 잠시 진원의 얼굴을 슥 쳐다보고, 밖으로 나갔다.
“부모님한테는 연락 없는 거 보니까, 다행히 모르시는 것 같네. 말하지 말고.”
“알아, 내가 괜히 말해서 뭐하게?”
동생은 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몇 번 비비며, 방으로 들어갔다.
‘100일만 참아. 내가 꼭 끝내준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인 세라핌.
놈을 죽인다면, 위그드라실도 함께 소멸한다.
바알의 말대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개 같은 이벤트는 없애야지.’
플레이어들이 강제로 끌려가는 일만큼은 막을 수 있다.
‘해야 할 일이 많네.’
100일의 시간.
그동안 최대한 레벨과 함께, 마의 근원의 동화율을 올리고 싶지만.
‘왕 첸, 일단 그놈부터 처리해야 한다.’
이연우가 죽기 전에 자신에게 했던 말들.
그 말에 사실이라면, 이대로 놈을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일단 계획을 세워야겠지.’
왕 첸이 속한 킹 길드.
세계적으로 거대한 길드인 만큼, 무턱대고 쳐들어갈 수는 없으니까.
띠리리. 띠리리.
“아, 또 뭐냐.”
연속적인 연락에 살짝 짜증이 난 진원은, 화면에 손태욱의 이름이 떠 있는 것을 보고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 진원 씨, 이벤트 때문에 피곤하실 텐데 죄송합니다. 미국의 플레이어, 발렌타인 님께서 어떻게 해서든 진원 씨를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게 누구죠?”
누구길래, 웬만한 권력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손태욱 씨가 쩔쩔매는 거지?
“일단 바로 가겠습니다.”
- 저, 정말 감사합니다!
잠깐 얘기를 나누는 정도야, 상관없지.
진원은 그가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아, 한번 도와주기로 하고 플레이어 협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