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이벤트: 괴수의 무덤-5
“주, 죽었다고?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이연우는 소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몬이 죽자,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 강력한 악마를 불러냈는데,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죽어버리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다른 악마들 역시 자신들 중에서 가장 강한 아몬이 죽자, 인상을 쓰며 이연우에게 접근했다.
“인간, 제대로 불러들인 것이 확실해?”
“아몬이 저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다고! 우리의 피를 그렇게 가져가 놓고 뭐 하는 짓이냐!”
악시온과 제파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따졌다.
“화, 확실합니다! 그분이 품은 기운을 당신들께서도 느꼈지 않으셨습니까!”
이연우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모든 악마들에게서 일정량의 피를 받아냈다.
자신의 소환이 실패할 리가 없었다.
‘열악한 재료로도 인간의 몸에 악마를 소환했었던 나다. 이 내가, 실패할 리가 없단 말입니다!’
거기다 김진원한테 쓰러진 것도 아니다.
그는 현재 핵과 근접한 위치의 탑을 부수려고 스킬을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인간, 너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줄게. 아몬보다 더 강한 악마를 불러내. 피는 얼마든지 줄 테니까.”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을 깨달은 제파르가, 탑으로 날아가며 말을 남겼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연우는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겠다며, 몸을 일으켜 뒤쪽으로 빠졌다.
* * *
한편, 진원과 일행들은 핵에 근접한 탑에서 애를 먹는 중이었다.
지이이!
지금까지 아무 능력도 없던 탑에서, 갑작스럽게 붉은 레이저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쌓였던 미니 몬스터들은 가볍게 훑고 간 레이저에 전멸했다.
“야, 저거 사기 아니야? 저걸 어떻게 뚫어!”
“일단 뒤로 물러나서 원거리 공격을 퍼부어 보자.”
섣불리 들어가기에는 상당히 위협적인 레이저였다.
진원은 일행들과 함께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났다.
“흡!”
“하!”
그리고 바로 와인드업하고 칼날 폭풍을 사용했고, 신혜진도 그를 따라 자세를 잡고 다크레인을 사용했다.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저건 안 되겠어.”
때마침 탑에 도착한 제파르가 공격을 방어하려 했지만, 엄청나게 쏟아지는 스킬들에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드르르륵!
탑을 향해 세차게 쏟아지는 검은 단검과 수많은 창들.
“데미지는 들어가는 것 같은데, 저 레이저가 문제네.”
탑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 부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탑에서 발사된 굵직한 레이저가 두 갈래로 나눠지며, 자신과 신혜진의 스킬들을 깔끔하게 지워냈다.
“여기서 뒤로 빠지자. 경험치 이득은 많이 봤어.”
“아, 핵이 코앞에 있는데. 뭐 저딴 게 다 있어?”
신혜진이 밸런스 똥망 이벤트라며 불만을 품던 사이, 진원이 지도의 크기를 키웠다.
‘분명히 저 탑을 부술 다른 방법이 있을 텐데.’
생각보다 강력한 탑의 방어능력.
다른 무언가를 이용해 뚫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중립 몬스터 싸움꾼에 대해 떠올랐다.
‘어떤 능력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싸움꾼들을 선두에 세우고, 뒤에 괴수를 붙인다.’
그리고 그 뒤에서 원거리 공격까지 퍼부으면, 탑을 부술 수 있지 않을까.
“제자야, 포션 하나만 더 다오.”
“돌아가서 드릴게요. 다들 귀환 준비해!”
스승님이 아몬을 상대하는 동안, 탑을 뚫으려고 해 보았지만 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상당히 지쳐 보이시니까, 일단 여기선 한번 정비하자.’
* * *
일행들이 기지로 귀환하고 잠시 후, 최은식도 진원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형, 탑에서 레이저를 쏴댄다고 했죠? 제가 그 공격을 막는 사이, 다른 분들이 탑을 부수면 되지 않을까요?”
“야, 내가 장담하는데 너 1초 컷이다.”
“…그렇게 세요?”
“그래.”
진원의 진지한 대답에, 최은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눈으로 직접 레이저를 못 봤으니, 저런 말이 나오지.
“직업 스킬만 풀려도 바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체 왜 나한테만 페널티가 생기는 건지 모르겠네.”
제아무리 강력한 공성 능력을 가진 탑이라 하더라도, 소환수들과 같이 밀어붙이면 솔직히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을 텐데.
“네가 규격 외의 힘을 가졌으니까 그런 거 아냐? 플레이어 이벤트가 빨리 끝나는 걸 막는 거지.”
“그러면 형을 이벤트에서 제외시키면 되는 거 아닐까요?”
“껄껄! 내 제자가 좀 특출나긴 하지.”
다른 일행들이 진원의 혼잣말에 의견을 나누던 사이, 스킬을 사용하던 이서훈이 싸움꾼의 남은 시간을 알려왔다.
“형,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시간이 늘어나 있어요.”
“얼마나?”
“어… 아까 20시간쯤이었는데 지금은 40시간 정도?”
대답을 들은 진원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중립 몬스터가 나타날 때까지, 비는 라인에서 경험치를 먹는다.
그리고 딱 그때가, 자신의 직업 스킬이 돌아오는 타이밍!
“일단 다들 여기서 정비하고 있어. 내가 경험치 먹고 있을 테니까.”
“너 혼자 괜찮겠어?”
“아직 쌩쌩하다.”
그동안 티는 안 냈지만, 일행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팀 레벨 상승으로 어느 정도 레벨과 스텟이 돌아왔다고 해도, 이대로 피로가 누적되면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 그럼 적당히 쉬고 우리랑 교대해.”
“커어어…….”
“우와, 진짜 할아버지가 코 고는 것 같네.”
패왕의 영역을 사용했던 고재원은, 어느새 앉은 채로 곯아떨어졌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채팅 보내라.”
진원은 묠니르를 꺼낸 채로, 중앙라인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저놈은 스텟이 얼마나 높길래 저렇게 평온해?”
“…그러게요. 사실은 저도 좀 힘들었는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혜진이 기가 막힌 듯이 중얼거렸고, 높은 체력 스텟을 자랑하던 최은식 역시 방패를 내려두고 주저앉았다.
‘레전더리 아이템으로 체력을 올려놨는데도 형은 못 따라가겠네.’
다시 한번, 자신들을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이는 형이 존경스러워졌다.
* * *
“이, 이러다가 지겠어! 지겠다고! 팀 레벨 따라잡아야 하는데 왜 불러!”
기지로 돌아온 제파르가 다급한 표정으로 날개를 파닥거렸다.
안 그래도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데, 인간 놈이 꼭 모여달라며 자신들을 불러모으다니.
“이 이벤트, 이대로 가면 무조건 집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전부 죽습니다.”
이연우의 말에, 악마들은 불쾌한 듯이 혀를 찼다.
그럼에도 불같이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그들도 현재 상황이 불리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인간들은 이 이벤트를 능숙하게 다루더군. 마치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그것은… 이 이벤트 맵이 전설의 연합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전설의 연합?”
“그게 뭐지?”
이연우의 대답에 다른 악마들이 설명을 요구했다.
“인간들이 즐기는 게임 이름입니다.”
사실 그도 게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전설의 연합은 그조차도 알 정도로 유명한 게임이었다.
그 회사의 CEO가 엄청난 자금력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한국의 문화유산을 사들여 보였으니까.
“그 게임의 규칙이 이벤트 맵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렇게 차이가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차이가 벌어질수록,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대답했다.
“인간! 무슨 방법이 없어? 인간들한테 져서 죽는 악마들이라니!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제파르가 이연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떻게든 해보라며 머리를 툭툭 쳤다.
“당신들의 신체 부위가 하나씩 필요합니다.”
그 말에, 악마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멎었다.
“인간, 우리가 정말로 네놈을 못 죽일 거라 생각하나?”
“쿠헤헤! 재밌는 인간인데? 우리한테 팔다리를 내놓으라는 인간은 처음 본다!”
악시온이 발을 들어 올리며 정말 죽일 기세로 자세를 잡았고, 부에르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대로 진짜 인간에게 질 생각이십니까? 악마가 고작 인간에게 말입니까? 저는 이 상황을 역전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연우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도와준다면, 가장 강력한 악마를 불러낼 수 있습니다. 아까 보았지 않습니까? 아몬을 불러낸 저의 힘을.”
그럼에도 악마들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악마도 자존심이 있다.
어떻게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는 말인가.
뿌득!
그렇게 생각하던 사이, 부에르가 한쪽 팔을 뜯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팔 한쪽이야 시간만 지나면 자라 날 테고, 재밌어 보이니 한번 도와주지!”
그것이 신호가 되었는지, 다른 악마들도 마지못해 팔을 하나씩 뜯어 이연우에게 던져주었다.
“반드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정도의 재료라면, 아몬보다 훨씬 강한 악마를 불러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김진원을 죽여버릴 수 있다.
‘기다려라, 김진원. 이번 이벤트에서 반드시 죽여주마.’
* * *
“크아아악!”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도발에 잘 넘어오네.”
시간이 지나 중립 몬스터가 나타날 때쯤, 악마 하나가 진원의 도발에 못 참고 돌진해왔다.
그 사이 팀 레벨은 17이 넘어갔고, 거의 대부분의 힘을 되찾은 진원에게는 경험치일 뿐이었다.
이서훈: 형! 나왔어요!
망치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자니, 이서훈이 싸움꾼이 나타났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수도 500개 가까이 모았고, 이제 이벤트를 끝낼 일만 남았네.”
잠긴 직업 스킬도 곧 풀린다.
‘이 정도 레벨이면 메시아도 힘을 되찾았겠지. 스킬의 위력을 시험해볼 기회다.’
메시아와 붉은 늑대도 그동안 자신의 영향 때문인지,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고 전해왔다.
진원은 곧바로 녀석들을 중립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불러들였다.
* * *
“나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해라.”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중립 몬스터의 첫마디였다.
키가 3미터는 넘어갈 듯했지만, 몸이 너무 빈약해 보여 과연 이 녀석이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놈 진짜 싸움꾼 맞아? 되게 약해 보이는데.”
“정수를 200개나 줘야 한다고요?”
일행들의 생각도 자신과 같은지, 못 믿겠다는 눈으로 중립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40시간이나 걸려서 나타났으니까, 일단 주자.”
이걸로 괴수를 연속으로 불러내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
[중립 몬스터가 매수되었습니다!]
정수를 건네주니, 메시지와 함께 몬스터의 붕대 색이 붉게 물들었다.
“너를 따라 움직이겠다.”
“좋아. 그럼 기지에서 괴수를 소환하고, 차원문으로 바로 간다. 이벤트 끝낼 준비해. 긴장 풀지 말고.”
“그래.”
“네, 형!”
진원이 그렇게 말하니, 금방이라도 이벤트가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버스 탔네. 도움 좀 되려고 했는데.’
레전더리 아이템을 받은 만큼, 확실하게 서포트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자기 혼자서 다 해버리다니.
신혜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일행들과 기지로 귀환했다.
“그럼 바로 간다. 준비해.”
기지의 핵에 정수를 반납한 진원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한곳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