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바알
크루의 은신처.
파쿨 쪽과 나머지 테로토스인들이 그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 쓸모없는 놈들이! 어디까지 기어오르는 거냐! 거인은 김진원이 확실하게 처치했다. 그거면 충분하다!”
“크루, 그 많은 테로나이트들은 어디서 난 거냐? 너 설마, 공용재산을 혼자서 독차지한 거냐!”
파쿨이 크루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는 다른 녀석들을 통해, 크루가 다량의 테로나이트를 손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 공용재사안?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오다니! 쓰레기 같은 놈!”
크루가 작업용 망치를 들고 사납게 몸을 일으켰다.
쿠란이 그것을 보고 빠르게 그들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또 왜 싸우는 거예요! 그리고 김진원 님이 거인을 죽였어요! 그걸로 된 거잖아요!”
어차피 진원이 아니었으면 테로나이트는 채굴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루와 진원에게 고마워해도 모자랄망정, 오히려 성을 내다니?
“이 장면을 김진원 님께서 보고 계셨다면, 당신들 전부 죽었을 거예요!”
“김진원 님이 거인을 처치해 준 것은 당연히 감사한다. 하지만! 공용재산인 테로나이트를 건드린 것은 별개의 문제다!”
파쿨은 쿠란의 설득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전까지 조용히 숨어서 숨만 죽이고 있던 놈들이, 거인이 처치되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자마자 기고만장해졌다.
“동작 그만.”
“허, 헉!”
“김진원! 자네, 괜찮은가?”
말다툼이 격해지려던 찰나, 은신처에 도착한 진원이 파쿨을 쏘아보았다.
당연히 녀석들이 나누던 대화도 대부분 들었다.
“거인은 죽였다. 상당히 힘들었지. 크루가 테로나이트로 무기를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놈을 못 죽였을 거다.”
파쿨.
그냥 겁만 많은 놈인 줄 알았는데, 이런 쓰레기였을 줄이야.
“하, 하지만 테로나이트는 이곳에서 한정된 소중한 자원…….”
“그걸 놔둬서 뭐 어쩌려고? 그게 없었으면 거인을 죽이지도 못했는데?”
진원은 우물쭈물 말을 이어가는 파쿨을 보니, 순간 열이 받아 묠니르를 꺼냈다.
“거기서 한 마디만 더하면, 너희들 다 죽는다.”
퀘스트는 이미 완료했다.
‘테로토스인을 죽여도, 보상은 받을 수 있겠지.’
무엇보다 아무것도 안 한 녀석들이 저렇게 갑질을 해대는 것이, 자신을 열 받게 했다.
정작 40일 넘게 망치를 두드린 크루는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그냥 다 죽여버려?”
“아, 아아,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김진원 님!”
꿀꺽.
진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파쿨과 그의 부하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10초 안에 꺼져. 죽기 싫으면.”
“네, 넵!”
진원의 엄포에, 녀석들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인 건 알고 있었는데, 저런 놈들인 줄은 몰랐네.”
“내가 괜히 따로 은신처를 마련한 것이 아니지. 참아 주어서 고맙네.”
크루는 진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거인이 쓰러졌고, 지상을 복구하려면 일손이 필요하다.
만약 진원이 진짜로 놈들을 죽이기라도 했으면, 그것대로 문제였을 것이다.
“이건 우리 문제니까, 너는 아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크루는 진원이 부상이라도 입었을까 싶어, 몸을 찬찬히 둘러보았지만.
거짓말처럼 깨끗했다.
“흠. 그런데… 거인을 쓰러트렸다고 했지? 자네 혼자서?”
“그래. 정확히는 나랑 소환수들이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크루는 진원이 죽음을 각오하고 거인에게 달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놈의 발을 묶는 것도 아니고, 죽여버릴 줄이야.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거인의 거대한 체구에 비하면, 테로나이트가 턱없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너무 잘 해결되어서,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 끝났다.”
진원은 그런 녀석을 보며, 안심하라는 듯 피식 웃었다.
“정말로 다 끝난 건가…….”
“크이!”
구석에서 마음 편하게 자고 있던 콩콩이가 크루에게 기운 내라는 듯이 대답했다.
“시간이 빠듯하다. 일단 너희들, 이거부터 다 챙겨.”
이곳에서 보낸 43일의 시간.
플레이어 이벤트를 대비하려면, 바로 돌아가서 준비해야 한다.
촤라락!
진원은 식량부터 물, 그리고 무기류와 잡다한 물품들을 구매했다.
“허어…….”
크루는 그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쿠란이랑 알아서 잘 쓰고. 나머지 놈들한테는 절대로 주지 마라. 그냥 맘에 안 들면 이걸로 찔러버려.”
“그, 그래. 그런데 바로 돌아가는 건가?”
“그래. 바쁘거든. 가자, 콩콩아.”
“크이!”
크루는 돌아갈 준비를 하는 진원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다.
자신이 무기를 만들어 주었다고는 하나, 그는 홀로 거인과 맞서 싸워주었다
‘시간이 하루, 아니 이틀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남은 테로나이트를 사용해, 그의 손에 무기라도 하나 쥐여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줄 게 없어서 미안하군. 김진원, 너를 평생토록 잊지 않겠다!”
“테로토스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원은 아예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녀석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 살짝 흔들어주었다.
* * *
[차원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마이룸의 이용시간이 2배로 늘어납니다.]
[현재 머물 수 있는 시간은 40분입니다.]
[남은 시간은 저장됩니다.]
마이룸으로 돌아오자마자, 진원의 눈앞에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이번에도 시간이 늘었네. 그런데 뭔가 바뀌었는데?”
마지막 문구.
이전에는 마이룸을 한 번 이용하면, 7일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차원 퀘스트를 완료해 생긴 영향인 듯했다.
“피시방 남은 시간을 저장하는 거로 생각하면 되나?”
어쨌든 이걸로 마이룸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띠링.
“또 뭐야?”
진원이 퀘스트의 보상을 확인하려고 한 순간, 메시지가 도착했다.
[악마들의 왕, 바알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스스스.
“또 나왔다 이거지.”
어느새 나타난 검은 포탈.
진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포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왔구나, 인간. 저번보다 확실히 강해졌군.”
바알은 지난번 본 모습과 똑같이, 거대한 왕좌에 앉아 있었다.
“이전보다 그게 더 늘어난 것 같다?”
진원은 녀석의 몸에 꽂힌 거대한 바늘을 보며 비웃었다.
“최대한 버텨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놈은 별 신경도 쓰지 않고, 잠시 숨을 골랐다.
“김진원, 네놈은 천사를 어떻게 생각하나?”
“…뭐라고?”
갑자기 이곳에 부르더니 묻는 말이, 천사?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오자, 오히려 자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악마도 있으면 천사도 있지 않겠나. 그래서 진실을 알고 싶나?”
놈은 미간을 좁히며 진원의 눈을 응시했다.
“말해주려면 진작 말해 줬어야지. 왜 이제 말해주려고 하냐? 그리고 네 말을 내가 쉽게 믿을 것 같아?”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중에 믿을 수밖에 없을 테니.”
바알은 소리 없이 웃은 뒤, 손가락을 들어 진원을 가리켰다.
“크, 크이!”
그러자 콩콩이가 손을 치켜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
스스스.
바알은 지난번과 같은 마기를 뿜어, 진원의 몸을 감쌌다.
“허튼짓 하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가만히 안 있을 거다.”
그의 말에 소환수들이 일제히 밖으로 빠져나와 바알을 노려보았다.
“걱정 말거라, 인간. 기괴한 시계를 한 번,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정도의 몸은 완성된 것 같구나.”
스스스.
놈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마기가, 진원의 가슴팍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지만, 그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뭔가 찝찝했다.
띠링.
잠시 후,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이건 또 무슨 말이냐?”
문자가 깨져 나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놈이 자신에게 주입만 마기 때문일까.
“음, 조절을 잘못했군. 설명은 내가 해주겠다. 기괴한 시계는,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아이템이지.”
“…그게 다냐?”
“정확히는, 네가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상황을 유리하게 역전시킬 수 있다. 그것이 본래의 기능이다.”
진원은 뒤에 이어진 바알의 설명에,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은 시간을 되돌리는 것 정도.
사실 이 정도만 돼도, 상당히 강력한 아이템일 것으로 생각했다.
“상황을 유리하게 만든다니,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
바알은 진원의 재촉에,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성격이 급하군, 인간. 예를 들어주지. 내가 네놈의 목을 벤다고 치겠다. 그때 기괴한 시계가 발동한다면, 내가 오히려 위험에 처하겠지.”
“…뭐 그딴 아이템이 다 있어?”
말도 안 되는 효과잖아?
적이 저걸 사용한다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아무나 이걸 사용할 수 없다. 최소한 내 마기를 견뎌낼 항마력이 필요하지.”
“항마력… 너무 이야기가 딱딱 들어맞는 거 아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진원이 의문감을 느꼈다.
마치 바알은 자신이 연옥을 클리어해, 항마력을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렇겠지. 이계 던전은 내가 힘을 좀 썼다. 하지만 기괴한 시계는, 순전히 너의 운이라고 할 수 있다.”
“후, 잠깐만 기다려봐.”
머릿속이 복잡해져, 바알의 말을 끊었다.
잠시나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천사는 도대체 또 뭐지?’
이전에 플레이어 이벤트에 나타나,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남기고 사라진 망할 인형.
그리고 방금 바알이 뱉은 단어.
“어려운 것 같으니, 아주 쉽게 대답해주마. 고위 천사, 세라핌이 네놈을 눈여겨보고 있다.”
바알은 진원의 표정을 읽었는지, 본론을 꺼냈다.
“뭐? 세라핌?”
“천사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놈의 육체를 탐내고 있지.”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너무나도 뜬금없는 이야기에, 순간 당황했다.
천사가 자신을 눈여겨본다니, 도대체 왜?
“어차피 말로 해봐야 설명만 길어진다. 그리고, 아직 이 이상은 말해줄 수 없다.”
바알은 뒤에 있을 플레이어 이벤트가 끝나고 난 뒤,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알맹이만 쏙 빼놓고 얘기해주네. 도대체 너의 목적이 뭐야?”
순간 짜증이 난 진원은 놈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녀석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
굳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도 그렇고, 이제 와서 천사라는 얘기를 꺼내는 것도 그렇고.
“내 목적은, 천사 세라핌의 소멸이다. 나머지는 다음에 말해주겠다. 아직 네놈의 몸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알은 자기 할 말만 뱉은 뒤, 손을 한번 휘저었다.
“뭐? 답답하게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
“네놈의 그 당당함은 칭찬해주도록 하지.”
진원은 갑작스러운 힘에 그대로 뒤로 밀려나, 마이룸으로 통하는 포탈로 들어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최대한 힘을 아껴야겠군.”
바알은 무너져 내리는 몸을 최대한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