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테로토스 -3
쿠란은 지상으로 나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일단 이곳을 따라서 쭉 가면 돼요!”
그리고 손을 들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거대한 잔해가 쌓여 산을 이룬 듯한 모습.
거리는 꽤 멀어 보였다.
“그다음은?”
“어… 그건 도착해서 살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 알았다. 붉은 늑대.”
“분부대로.”
진원의 말에, 붉은 늑대가 실체화해 쿠란을 옆구리에 끼고 안았다.
마치 짐 같은 취급.
“어? 어어? 갑자기 뭐예요?”
“20일은 너무 오래 걸려. 빠르게 갈 거니까, 그때마다 알려줘.”
“네? 그게 무슨…….”
쿠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진원이 콩콩이를 안은 채로, 순간 가속을 사용해 내달렸다.
그 뒤를 붉은 늑대가 쿠란을 안은 채로 따라붙었다.
“아아악!”
녀석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기겁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 이러다 토하겠어.’
너무 빠른 속도에, 순간 구역질이 올라올 듯했지만 어떻게든 삼켰다.
* * *
30분 뒤.
진원은 쿠란이 지정했던 위치에 도착했다.
“허, 허억! 허억…….”
쿠란은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되게 빠르다. 이 정도면 하루 안에 거인을 찾아낼지도 몰라.’
자신의 발걸음을 기준으로,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걸어야 했던 거리다.
그걸 이렇게 간단하게…….
“힘들어? 좀 쉬었다가 갈까?”
“괜찮아요! 바로 길을 찾겠습니다!”
쿠란은 진원의 말에,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소환수들을 마음대로 꺼낼 수 없는 게 불편하긴 하네.’
진원은 탐색을 위해, 소환수들을 한 번 꺼낸 적이 있었다.
녀석들은 자신보다 피해를 많이 받는지, MP가 쭉쭉 감소해 그대로 집어넣었다.
‘거인과 싸울 때는 최대한 짧게 끝내야 하겠는데…….’
일단 녀석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부터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쿠란이 안내해 주는 대로 길을 따라가던 도중.
“어? 김진원 님! 여기, 이거 보세요!”
쿠란이 지하로 연결되는 통로를 발견했다.
“누군가 살았던 흔적이에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몸을 낮춰 통로로 들어가려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진원을 멈춰 세웠다.
* * *
서울의 한 국밥집.
“여기 돼지국밥 하나랑 순대국밥 하나 주세요!”
“네. 아가씨 한국말 잘하네.”
블라즈코비츠는 아버지를 데리고 국밥집을 찾았다.
“흐음. 혼자서는 역시 버겁단 말이지.”
니콜라이는 평소 진원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인지, 협회장이 마련해준 연구실에서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으음. 집중 잘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그러다가 몸 망쳐요. 바깥 공기도 마셔줘야 두뇌 회전도 잘되죠!”
메뉴판을 보며 아쉬운 듯이 한숨을 쉬는 니콜라이.
블라즈코비츠는 그게 못마땅한지 한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후루룩.
“그래서 넌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거냐?”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갈 맛본 니콜라이가 그녀에게 넌지시 말했다.
자신은 처치가 처치다 보니, 당분간 한국에 있을 생각이었다.
“나? 일단 계속 있으려고 하는데. 왜요?”
“아, 아니. 네가 마음에 들면 있는 거지.”
자신의 딸은 러시아에서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설마 너, 김진원 때문에 있는 거냐?”
“네? 일단 그의 길드에 가입하긴 했죠. 그게 왜요?”
“다시 말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어 정도는… 아니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자, 리콜라이는 말을 멈추고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능력은 나를 닮아서 좋은데…….’
하필 성격이 아내와 판박이라니.
그는 식사 중에도, 슈트에 대한 연구를 빨리 끝내기 위해 머릿속으로 계산을 이어 나갔다.
* * *
“이봐 네놈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아니?”
낯선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수염을 머리카락처럼 덥수룩하게 기른 남성이었다.
“드워프?”
“뭐라고?”
중년의 남성은 진원의 말에 표정을 찡그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너도 테로토스인이냐?”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드워프와 딱 들어맞는 키와, 외모였다.
진원은 녹슨 둔기를 들어 올리는 그를 진정시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잠깐만. 난 거인을 처치하러 다른 차원에서 왔다. 테로타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네놈, 테로토스인이 아니군? 이곳을 멸망시키러 온 놈이구나!”
놈은 쇠붙이를 진원에게 들이밀며 위협했다.
“자, 잠깐만요! 저분은 우리를 구해주기 위해 오신 구원자님이세요!”
“꼬맹이는 빠져 있어!”
“진짜라구요!”
쿠란이 놈에게 달라붙어 제지했지만, 딱히 효과는 없는 듯했다.
‘이건 퀘스트다, 참자.’
성질이 더러워 보이는 놈이었지만, 진원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테로토스인의 위협조차 용납되지 않는 퀘스트의 난이도에,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콩콩아. 안 되겠다. 부탁한다.”
“크이? 크이!”
[골드 캥거루가 섬광을 사용합니다.]
콩콩이는 진원의 말에, 그의 뒤로 가 스킬을 사용했다.
화아아!
“저, 저것은…….”
진원의 머리 위로 뿜어지는 잔잔한 빛.
그것을 바라본 녀석은 눈을 부릅떴다.
“저렇게 성스러운 수가 있나… 당신, 정말로 이곳을 구해주러 온 건가?”
“그래.”
“이런, 내가 오해를… 정말 미안하군.”
놈은 손에 쥐었던 무기를 버리고, 자신에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콩콩이를 안 데려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녀석들이 왜 콩콩이의 섬광을 보고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한결 수월해져서 다행이었다.
“이런, 이곳에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지. 내 은신처로 안내하겠다. 나는 크루라고 한다.”
“그래. 김진원이다.”
진원은 녀석의 안내에 따라 지하로 들어갔다.
“편하게 앉게. 딱히 내줄 것이 없어서 미안하군.”
“아니,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것보다 거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데, 혹시 알고 있냐?”
“흠. 자네, 저 꼬맹이를 달고 온 것을 보면 파쿨이 있는 곳에서 왔군.”
크루는 벽 한쪽에 기대고 있는 쿠란을 가리키며 턱짓했다.
“녀석을 알아?”
“알다마다! 그런 무계획에 겁만 많고 말만 많은 멍청한 놈… 이런, 내가 너무 흥분했군.”
순간 성을 내던 그는, 무안한지 잠시 헛기침을 했다.
“괜찮다. 저쪽에서는 거인의 왼쪽 다리가 약점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약점? 하! 그놈들의 말은 전부 거르면 된다. 녀석들은 아무것도 몰라!”
그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거인 테로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녀석을 최대한 관찰했다.”
크루의 말에 따르면 거인은 약점은 단 하나.
테로나이트라는 광석으로 만든 무기에 취약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테로나이트를 찾아다녔지. 티끌밖에 못 모은 게 문제지만.”
크루는 구석진 곳에 쌓아둔 돌을 가리켰다.
에메랄드빛을 은은하게 내뿜는 돌이 그가 말한 테로나이트인 듯했다.
“좋아. 설명을 잘 들었다. 일단 네 말을 믿는 쪽으로 할게.”
“당연하지! 그런 겁쟁이 놈들이랑 같은 취급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그는 처음에는 파쿨과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이대로 머물다가 개죽음을 당할 것 같아 은신처를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한심한 놈들. 내가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을 해도, 전혀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기술?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
진원의 말에, 크루는 몸을 일으켜 커다란 망치를 하나 들고 왔다.
“테로나이트만 있다면, 내가 너에게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 난 손재주가 좋거든. 거기다 이곳에는 공방도 만들었지.”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찌그러진 것들도 있지만, 수많은 연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너, 이것 좀 살펴봐. 이걸로 거인을 죽일 수는 없을까?”
진원은 인벤토리에서 묠니르를 꺼내, 크루에게 보여주었다.
녀석과 대화를 나눠보니, 확실히 파쿨에 비해서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듯했다.
지상이 오염된 원인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으니까.
“이, 이것은…….”
꿀꺽.
뭔가에 홀린 듯이 시선을 묠니르에 고정했다.
“만지지는 말고. 잘못 만지면 죽는다.”
“오오… 도대체 이건 어떤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이지?”
그는 한동안 묠니르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관찰했다.
“음… 전혀 모르겠다. 이것이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으니. 그래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일단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50일이다. 그 무기를 만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
“50일? 하! 나한테는 10일만 있어도 충분하다!”
크루는 가소롭다는 듯이 대답하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테로나이트가 있는 지역이 이곳에서 멀다는 점이지. 사실상 불가능…….”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진원은 인벤토리에서 HP포션을 꺼내, 녀석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뭔가?”
“그걸 꾸준히 마시면, 지상에서도 활동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얘도 있고.”
“크이!”
“…좋다! 그럼 바로 서두르지!”
크루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나갈 준비를 했다.
‘테로토스가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른다. 절망적인 상황이야.’
그럼에도 자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보를 모으고 테로나이트를 조금씩 긁어모았다.
‘역시 나의 행동은 옳았다!’
테로나이트만 충분하다면, 그리고 눈앞의 김진원이 함께한다면.
거인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받아라.”
“뭐냐? 지도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진원은 거인이 있을 곳으로 표시해 둔 종이를 건네받았다.
조잡한 그림 실력을 보면, 아무래도 본인이 그린 듯했다.
“우리가 현재 있는 곳이 이쯤 될 거다. 그리고 테로나이트는 이곳에서 많이 구할 수 있다.”
녀석은 손가락으로 지도 끝부분을 가리켰다.
“쉬지 않고 이동한다면, 15일은 잡아야 한다. 그리고 공방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오는 데도 그 정도 걸리겠지.”
“좋아. 그럼 바로 가자.”
“김진원, 화끈해서 마음에 드는군.”
크루는 진원을 보며 씨익 웃었다.
* * *
“우와아악! 잠까안! 이건 도대체 뭐냐!”
크루는 붉은 늑대의 옆구리에 짐처럼 안겨, 소리를 질러댔다.
진원이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
“후우… 적응되면 괜찮을 거예요.”
쿠란은 메시아의 등에 업혀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우웁! 그, 그래도 이 정도 속도면 확실히 일찍 도착할 수 있겠어!’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김진원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는데, 이걸로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는 괴상한 힘을 지닌 구원자가 맞았다.
‘거인 놈과 한패였다면, 나는 이미 죽었겠지!’
크루는 필사적으로 어지러움을 이겨내며, 진원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주위를 살폈다.
이 정도의 속도를 유지한다면, 3일 안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잠, 잠깐! 멈춰! 멈춰야 한다!”
“왜 그래?”
크루는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진원에게 경고하며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