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중국으로-4
“후우.”
진원이 묠니르로 철문을 두들기길 수차례.
문이 찌그러지며 블라즈코비츠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우웁! 우우웁!”
중년의 금발을 하고 있는 남성은, 망치를 들고 다가오는 진원을 보자 기겁하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청테이프와 밧줄.
영화에서나 볼 법한 구식적인 방법이었다.
‘아, 이건 바로 넣어야지.’
진원은 남성을 안심시키며 묠니르를 인벤토리에 다시 넣었다.
주위에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실하게 살폈으니, 아마 괜찮을 것이다.
“아버지!”
“으읍? 우웁!”
남성은 그녀를 보자, 놀란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
머리색이나 피부색이 바뀌어도, 아버지인 그가 딸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지금 바로 풀어드릴게요.”
블라즈코비츠는 아버지를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달려가 입에 부착된 테이프를 뜯어주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당하신 거예요!”
그녀는 아버지의 얼굴이나 다리에 있는 타박상을 발견하고 울상을 지었다.
“이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 없다.”
그녀는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순간 분노를 느꼈다.
“이, 일단 나가자. 나가서 모든 것을 설명해 주마. 으윽!”
남성은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리다가, 몰려오는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 드세요. 괜찮을 겁니다.”
진원은 그들이 러시아어로 나누는 대화를 못 알아들었지만, 남성의 상태가 나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맙네.”
남성은 진원이 건네준 희석된 엘릭서를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엄청난 효과군. 감사 인사는 나가서 하도록 하겠네. 어서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병력들이 몰려 들 거다!”
포션의 효과로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시간이 빠듯하네. 좀 더 박살 내 주고 싶었는데.’
진원은 이곳의 모든 시설을 부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본래의 목적은 그녀의 아버지를 이곳에서 빼내는 것.
‘왕 첸, 운도 좋네. 있었으면 뚝배기 깨 버렸을 텐데.’
그는 블라즈코비츠의 아버지를 따라 움직였다.
* * *
진원은 지상으로 나가자마자, 둘의 허리를 감싸 안고 순간 가속을 사용했다.
“허억! 고, 고맙네. 이제 괜찮을 것 같다. 연구소에서 꽤 멀리 떨어졌으니.”
블라즈코비츠의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외딴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 누군가? 감사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네. 나는 니콜라이라고 부르면 되네.”
“뭐라시는 거야?”
“고맙다고 하신다, 진원.”
그녀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이 가볍게 웃었다.
진원은 악수를 신청하는 그의 손을 가볍게 잡아주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구나.”
니콜라이는 그녀를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자신이 본격적으로 독방에 갇히기 전.
밑져야 본전 식으로 딸에게 편지를 건넸었는데.
“전부 김진원 덕분이죠. 들어보셨나요? 한국의 S급 플레이어.”
“그렇군··· 연구소에 갇혀있어서 밖의 상황은 잘 모른다. 그런데 그런 대단하신 분을 네가 어떻게 모시고 왔지?”
“나도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인데, 딸에 대해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네요.”
블라즈코비츠는 자신을 의문스럽게 쳐다보는 아버지를 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리고 품에서 물약을 하나 건넸다.
“이걸 마셔요. 그리고 빨리 공항으로 가죠.”
“이건 또 어디서 났느냐?”
“제가 연금술사라는 건 기억나시죠?”
“아, 아아··· 그렇군. 맞아.”
그녀가 아버지를 향해 혼내듯이 말하자, 그는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변신 물약을 마셨다.
“크헙! 뭐 이딴 맛이 다 있는······.”
“진원, 너도 마셔야 한다.”
인상을 잔뜩 쓰는 니콜라이 뒤로, 그녀는 진원에게도 물약을 건넸다.
“뭐? 또 마셔야 한다고?”
“당연하다. 모습을 다시 바꿔야 한다.”
“후우······.”
그는 한숨을 쉬며 물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지금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한다. 이야기는 한국으로 넘어가서 들려줘요.”
“그래, 그러는 것이 낫겠다.”
대화를 마친 그들은 곧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 * *
그 후로 4시간 뒤.
아수라장이 된 연구소를 둘러본 왕 첸은, 순간 화가 났는지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아!”
왕 첸의 부하들은 차렷 자세를 유지하며, 그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그들은 이성을 잃은 듯한 왕 첸을 보며 몸을 조금씩 떨었다.
그가 이번 일로 자신들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지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그놈들 정체가 도대체 뭐야?”
“그, 그것이··· 저희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하면 끝이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라도 알아내야 하는 거 아니냐!”
“죄, 죄송합니다! 놈들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 구별이 어려웠습니다!”
부하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왕 첸은, 곧 생각에 빠졌다.
‘무장한 C급 플레이어에, 해외의 용병들. 그놈들이 힘도 못 써보고 쓰러지다니.’
카메라의 영상을 확인해보았을 때, 이곳을 습격한 플레이어는 최소 A급이었다.
‘그중 A급 중에서도 최상위권, 아니면 S급이겠지. 거기다 병력들이 도착하기 전,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왕 첸은 연구소 내의 카메라를 수십 번씩 돌려보았었다.
그런데 놈들의 특징을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
중간부터는 남성 한 명이 완력으로만 병력들을 처리해 나갔으니까.
‘그 자세. 설마 김진원인가? 아니, 그건 너무 나갔다.’
그는 와인드 업하며 불붙은 공을 던져대는 남성을 보고 순간 김진원이 생각났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망치도 없고, 소환수들도 없다. 거기다 공 색깔도 달라. 김진원은 분명 검은색이었다.’
놈들은 슈트 연구에 있어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니콜라이를 귀신같이 빼내갔다.
구조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내부를 훤히 꿰뚫는 듯한 움직임.
‘스킬이라도 사용했나 보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연구 데이터를 사전에 백업시켜 두었다는 것이었다.
“망할 새끼. 단순히 주먹으로 이곳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줄이야. 그런 무식한 놈은 살면서 처음 본다.”
그는 정신없이 주위를 박살 내는 카메라의 영상을 보며, 표정을 찡그렸다.
이곳을 다시 복구하려면 최소 6개월은 잡아야 한다.
“니콜라이를 잡아 오는 것은 일단 미루고, 여기를 고치는 것을 되돌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라.”
“예! 알겠습니다!”
왕 첸은 긴급 회의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그는 중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대기업, 킹 길드의 회장이었다.
* * *
진원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블라즈코비츠와 니콜라이를 데리고 엘리트 길드로 향했다.
“사장님, 예정보다 빨리 오셨군요. 별일은 없으셨습니까?”
문을 열자, 이시현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
“블라즈코비츠의 아버지라네요. 오늘은 다들 일찍 퇴근해 보세요.”
퇴근이라는 말에 눈치를 보던 직원들.
그들은 이시현을 바라보며 허락을 구했다.
“그렇군요. 남은 업무는 돌아가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퇴근해. 내일 아침까지 알지?”
“넵······.”
업무와 관련된 일에는 철저한 성격인 그는, 당연히 직원들을 편하게 보내줄 리 없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장님.”
이시현은 테이블 위에 커피를 세 잔 올려두고, 조용히 나갔다.
세 명이 남게 된 건물 안.
주위를 살피던 니콜라이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설명할 것이 많지만, 최대한 알아듣기 쉽도록 말해보겠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일부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찬찬히 설명해나갔다.
니콜라이는 블라즈코비츠와는 다르게 한국어를 못해, 그녀가 진원의 옆에서 번역해 주었다.
“난 분명히 무기개발이 아닌, 치료 용도로 사용하는 로봇의 개발로 알고 있었네.”
니콜라이는 모든 질병의 정복에 대한 꿈을 안고 연구를 해나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중국의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킹 길드가 운영하는 연구소. 그곳에는 엄청난 자본과 함께, 내가 연구를 수월하게 진행할 장비들이 많았네. 실력 있는 연구자들이 많기도 했고.”
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그는 자신이 개발하고 있던 수트가 치료용이 아닌 군사 목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히 군사 용도로 쓰여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에, 연구를 중단하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놈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더군.”
니콜라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뒤로부터 약 한 달간. 연구소를 지키던 놈들은, 나를 독방에 가둬 놓고 무식하게 패더군. 수트를 만들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들이!”
가만히 말을 듣던 블라즈코비츠는 순간 화가 나 험한 말을 내뱉었다.
“너, 내가 예전에도 말은 가려서 하라고 안 그랬나? 그래서 결혼을 언제 할 거냐?”
니콜라이는 그게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아버지는 언제 나를 신경 써줬다고 그래요? 내 말 무시하고 중국으로 간 사람이 할 말이야?”
“크, 크흠. 난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그러니까 엄마가 이혼하자고 한 거 아니야!”
그녀의 묵직한 팩트 미사일.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딸이 수상하다고 가지 말라고 했던 곳을, 자신이 기어코 들어갔으니까.
“왕 첸.”
부녀가 러시아어로 싸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원이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듣자 니콜라이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래도 그가 왕 첸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불안한 듯한 눈빛이었다.
“호, 혹시 그와 무슨 관계인가?”
“걱정 마세요. 제 눈에 보이면 바로 죽여버릴 겁니다.”
“으, 음. 그건 다행이군. 그놈은 거대 기업의 회장이다. 엄청난 자본력을 가지고 있지.”
설명을 마친 그는 당분간 러시아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할 것 같네. 이곳에는 딸도 있고, 놈들도 피해를 입었으니 당분간은 못 움직이겠지.”
한동안 커피를 홀짝이던 니콜라이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잠깐,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우리 딸과 무슨 사이인가?”
“내 남자친구다.”
“뭐, 뭐라고! 그럼 적어도 러시아어는 가르쳤어야지!”
진원은 장난스럽게 말하는 블라즈코비츠를 보며, 제대로 설명하라고 말했다.
“엘리트 길드의 길드장이야. 그리고 나도 얼마 전 여기 길드원이 됐어. 진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중국에 갈 생각도 못 했을걸.”
“그렇군. 자네, 한국의 S급 플레이어라고 했는가. 내 딸이 그런 유능한 사람 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진원은 블라즈코비츠와 대화를 나누다 안심한 듯이 웃는 니콜라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걸 손태욱 씨한테 어떻게 말해야 한다······.’
듣고 보니 생각보다 심각한 일인 듯했다.
‘수트라고 했지. 그렇게 몰래 무기개발을 해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지?’
“크허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난 생각보다 유능하거든. 내가 없으면 그놈들은 수트를 제대로 못 만들 거다.”
니콜라이는 그런 진원의 표정을 읽기라도 했는지, 시원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