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부유섬-5
중심부의 안쪽을 향해 걸어가던 진원은,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마치 폐허가 된 도시의 느낌.
건축물같이 보이는 것들은 상당히 훼손되어있거나, 무너져 있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곳에 몬스터들이 바글거린다고 안 했냐?”
“이상하네요. 분명히 제 기억대로라면 맞을 텐데요?”
타노아 역시 이상함을 느꼈는지 공중으로 올라가 주위를 넓게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네. 뭐야?”
“그거야 내가 모조리 잡아버렸으니까.”
“히익!”
어느새 타노아의 눈앞으로 나타난 남성이 녀석의 혼잣말에 대답해주었다.
새하얀 무술복을 입은 흑인.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뒷짐을 진 채, 진원을 보며 진하게 웃어 보였다.
[보스: 부유섬의 제왕]
“주군, 조심하셔야 합니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 나도다.”
위기감을 느낀 붉은 늑대와 메시아, 그리고 그의 소환수들까지 나와 자리를 잡았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닌가?’
재빠르게 뒤편에 빠져 있는 관리자.
녀석은 제왕의 모습을 보고 뭔가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행성에서 봤나? 모르겠다. 어쨌든 저 녀석은 위험해!’
관리자는 진원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더욱 뒤로 물러났다.
“이런, 아직은 싸울 생각이 없다. 정말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서 들떴구나. 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주겠나?”
제왕은 싸울 의사가 없다는 듯이 양팔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너, 정체가 뭐야? 겉보기에는 그냥 사람 같은데.”
진원은 혹시 모를 공격에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사람, 이었지. 지금은 이렇게 보스 몬스터가 돼 버렸지만.”
제왕은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흰자위밖에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력도 잃어버렸지.”
제왕은 언제든지 달려들 것 같은 진원과 소환수들을 앞에 두고 말을 이어나갔다.
“본래는 나도 너처럼 인간이며, 플레이어였다. 동료들과 함께 부유섬을 공략하러 들어온 아주 평범한 플레이어.”
“플레이어였다고?”
진원은 처음 보는 현상에 눈을 크게 떴다.
플레이어가 던전의 보스가 되었다는 전례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악마를 인간의 몸에 소환했던 것도 인위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플레이어도 같은 루트를 밟은 건가?
“이젠 몇 명이었는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나는 동료들이 몸을 던져 싸우는 동안 도망치고, 숨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남게 되었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 창이 하나 떠올랐다고 했다.
“‘보스의 힘을 이어받겠습니까?’였다. 당연히 나는 살기 위해 엿 같은 힘을 이어받았다.”
그가 부유섬의 보스가 되고 살아남은 것은 좋았지만, 던전의 영향으로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삶에 대한 고독감, 죄책감. 이것을 이겨내기 위해 오로지 수련에만 매달렸다. 정신만큼은 인간이라는 뜻이다.”
말을 마친 제왕은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나를 죽여줄 인간이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럼 곱게 죽지, 왜 싸우려고 하냐?”
“그냥 죽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겠나? 이곳에서 평생을 수련만 했는데.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 알고 싶다.”
진원은 제왕을 보며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생각했다.
‘녀석의 이름··· 검은색이다. 바짝 긴장해야 되겠어.’
정말 오랜만에 본 색깔이었다.
자신이 이토록 레벨을 올리고, 스텟을 올리고, 에픽 아이템까지 소지하고 있어도, 시스템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먼저 공격해오게. 선공은 양보하지.”
제왕은 진원을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 * *
같은 시각.
엘리트 길드의 사무실.
최은식은 업로드한 영상의 조회 수를 보며 흡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목과 섬네일, 그리고 편집까지. 완벽해!”
[제목: 응. 그거 아니야. 김진원에게 참교육 당하는 몬스터들.]
최근에 채널 아트까지 바꿔 더욱 눈에 띄게 변한 진원의 채널.
그가 보았으면 당장 최은식의 멱살을 잡았을 법한 그런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불꽃 남자 김진원의 구독자 수는 이번 영상으로 구독자 600만을 돌파했다.
업로드한 동영상이 10개도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장이었다.
“올린 지 1시간도 안 지났는데, 조회 수가 200만을 넘겼어! 이거 좀 봐요! 이시현 씨!”
“아, 예. 사장님이야 항상 대단하시죠.”
옆에서 프라모델을 조립하고 있던 이시현은 적당히 그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저는 분명히 말렸습니다, 최은식 씨.’
유치찬란한 채널 아트.
과연 사장님이 보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이이잉: 아, 형님. 제발 영상 좀 자주 올려주세요. 저 이러다가 정말 쓰러질 각입니다. 아시겠어요?
주모: 여기 국뽕 한사바아아알!
헬 조선: 제주도 주민들은 집값 떨어진다고 오히려 김진원 욕하던데. 진짜 너무 한 거 아니냐? 언제는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더니.
칭찬 일색인 댓글들.
그러나 채널 규모가 커지면서, 악플들 또한 눈에 띄게 많아졌다.
야쑤오 핵장인: 편집해서 좋은 장면만 짜깁기 했겠지 뭘ㅋㅋㅋ. 분명히 보스한테 애먹었다는데 내 손모가지 건다.
“너 차단이야, 짜식아.”
악플러는 이미 다른 유저들에게 댓글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하지만 최은식은 댓글 삭제와 함께, 채널에서 차단까지 하는 빈틈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너 살려주는 거야.”
* * *
진원과 제왕과의 전투가 시작 된 지 10분이 지났다.
그동안 보스의 전투 스타일을 파악한 진원은, 놈으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뒀다.
“흡!”
티잉!
“헙!”
붉은 늑대와 메시아. 그리고 소환수들이 최대한 흩어져서 공격한다.
그 사이 진원은 묠니르나 원거리 스킬을 이용해 놈의 머리를 노렸다.
“얘들아! 사용해라!”
“분부대로.”
“···….”
[붉은 늑대가 귀신검: 나락을 사용합니다. MP를 600소모합니다.]
[꼬마 디멘션 워커가 뒤틀린 차원: 메가모프를 사용합니다. MP를 600 소모합니다.]
끼아아아!
지면에서 나타난 혼령들이 제왕을 향해 쇄도했다.
동시에 몸집을 부풀린 소환수가 지면을 박차고 놈에게 돌진했다.
“재밌겠구나.”
제왕은 그 뒤로 추가로 달려드는 소환수들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무장.”
그가 상의를 탈의하며 말을 내뱉자,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투웅!
제왕은 그 상태로 주먹을 내뻗어, 앞으로 달려드는 디멘션 워커를 쳐냈다.
그리고 혼령들과 함께 돌진해오는 붉은 늑대와 메시아의 공격.
거기다 진원의 스킬까지.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방어해내고 있었다.
“미친 새끼네. 저게 된다고?”
진원은 제왕의 움직임을 보며 거친 말을 뱉었다.
놈에겐 사각이란 게 없는 건가?
“일단 뒤로 물러나라!”
“분부대로.”
[알았어!]
이대로면 소환수들의 회복에 소모되는 MP가 너무 크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시며 제왕을 응시했다.
“이것이 보스에게서 물려받은 힘. 무장이다. 엄청난 내구력과 공격력을 가지는 스킬이지. 단지, 그뿐이지만.”
그러자 놈은 보란 듯이 검지손가락을 들어 땅을 눌렀다.
푸욱!
지면이 마치 두부라도 된 것처럼 부드럽게 파여 들어갔다.
“나머지는 오로지 혼자서 수련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다.”
“김진원 님! 그냥 도망쳐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구요! 저걸 어떻게 이겨요!”
“저도 동감입니다! 저런 괴물이 하필 여기에 있다니!”
뒤편에 떨어져 있던 타노아와 관리자는 제왕을 보며 몸을 떨었다.
저 정도의 힘을 가진 보스는 연옥 3층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수준이었다.
‘크윽! 여기서 나가고 싶지만, 보스를 쓰러트리는 것 말고는 도저히 방법이 없잖아!’
관리자는 진원과 제왕이 서로 싸우는 동안 혹시라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심장부 외곽을 세밀하게 조사해 보았다.
‘완벽하게 아무것도 없었어.’
관리자는 두 손을 모으고, 마음속으로 김진원을 응원했다.
‘도대체 이놈의 약점이 뭐지? 분명 시력이 없다고 했는데. 진짜 맞나?’
한편, 진원은 자신에게 천천히 걸어오는 제왕을 보며 자세를 낮췄다.
[제왕]
- 설명: 제왕에게서 힘을 계승한 플레이어. 오랜 세월 동안 수련을 통해, 상당히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 공략 포인트: 최대한 마주치지 않은 것이 좋다.
백과사전으로 놈에 대해 열람했지만, 딱히 이럴듯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마누스는 최대한 아껴야 한다. 한 번 쓰면 끝이다.’
지금까지 모은 명예 포인트가 148포인트.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상점에서 마누스의 스킬을 구매할 수 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자신이 놈에게 근접전으로 이길 확률은 상당히 낮다.
그렇다면 최대한 거리를 벌리고 싸워야 한다.
‘그러기엔 소환수들이 놈의 힘을 견뎌내지를 못하니.’
진원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자, 제왕이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흥미가 식으니 나의 약점 하나를 알려주겠다.”
그는 진원의 생각을 읽은 듯 말을 걸어왔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력이 없다. 그래서 청각과 후각을 통해 대상을 찾는다. 완벽한 무음과 무취. 그것이 나의 약점이지.”
“그냥 약점이 없다고 하지그래.”
“하하핫!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를 나누니 정말 즐겁구나.”
시원스럽게 웃던 제왕은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내 머리는 무장을 사용하지 않겠다.”
“봐주겠다는거냐?”
“난 그저 즐기고 싶을 뿐이다.”
말을 마친 그는, 먼저 오라는 듯이 오른손을 들어 까닥거렸다.
‘일단 시간을 끌자. 앞으로 1포인트만 모으면 된다.’
진원은 와인드업 하고 마구: 블랙홀을 사용했다.
스스스.
“오오, 재밌구나.”
제왕은 생각보다 강한 흡입력에 발을 들어 지면에 박았다.
“아직 안 끝났다!”
진원은 실실 웃는 녀석을 보며 곧바로 마구: 칼날폭풍을 사용했다.
그와 동시에 붉은 늑대와 메시아가 제왕을 향해 달려 나갔다.
팅! 팅!
“큭!”
[강해…….]
검은 단검들이 허무하게 튕겨나가길 잠시, 붉은 늑대와 메시아 역시 제왕의 주먹질에 뒤로 밀려났다.
“이러면 재미없지. 어떤가? 나와 일 대 일로 싸워보는 건? 무장은 풀도록 하지.”
놈은 진원에게 보란 듯이 무장을 풀어보였다.
보통 같으면 당연히 무시하는 진원이었지만, 제왕의 마지막 말이 그를 열 받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부하들 뒤에 숨어있을 셈인가? 부끄럽지 않은가?”
진원은 대답 없이 놈을 따라 상의를 벗었다.
그리고 묠니르를 들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래야지. 이제야 재밌어질 것 같구나.”
“너희들은 빠져 있어.”
“주군… 분부대로.”
[…….]
어느새 얼굴 가까이 마주 보고 선 진원과 제왕.
‘불굴과 순간 가속은 아껴놓는다.’
진원은 짐짓 화난 척을 하며 제왕의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한 번에 몰아쳐야 해. 그때까지 최대한 버틴다.’
소환수들이 놈의 공격에 적중당했을 때, 자신의 MP가 한 번에 절반 가까이 빠져나갔다.
그만큼 놈의 힘이 강하다는 말이다.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건가?”
제왕을 가만히 쳐다보던 진원은 놈의 말에 팔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