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침식-5
“야, 심술 그만 부리고 좀 도와줘라. 네가 무슨 애야?”
“흥, 김진원. 이게 얼마나 만들기 어려운 건데. 내 자존심이 상처 입었다.”
그녀는 10센티 정도 되는 플라스크를 보이며, 안에 들어있는 우윳빛 액체를 흔들어 보였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이 녀석의 표정을 보면 딱히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연금술사의 상급 정화 포션]
마시면 엄청난 복통이 발생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종류: 비약
등급: 유니크
효과: 사용한 대상에 상급 정화 효과를 적용합니다.
제작자: 블라즈코비츠
“효과는 확실히 괜찮네.”
“물론이다. 이게 바로 나다. 그리고 이거, 딱 하나밖에 없으니까 조심해야 한다.”
보통 프리스트들이 가지는 정화 스킬은 하급이나 잘해봐야 중급 정도.
상급 정화의 효과를 가진 아이템은 확실히 찾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쯤 하고 도와주겠다. 반 정도 장난이니까 안심해도 좋다.”
그녀는 옆에서 연신 사과해대는 플레이어들을 슥 쳐다본 뒤, 정화 포션을 사용하기 위해 포탈 근처로 향했다.
스스스.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빨리 부어버려야겠다.”
포탈의 이변을 느낀 블라즈코비츠가 마개를 열고 지면에 포션을 들이부으려는 순간.
쉬익!
포탈에서 가느다란 팔 하나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와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큭!”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뭐야! 이번엔 언데드야?”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 팔.
그것은 보기보다 악력이 강한지 블라즈코비츠의 팔을 꽉 붙들고 있었다.
“흡!”
진원은 묠니르를 힘껏 던져 팔을 부러트렸다.
“그어어어…….”
잠시 후.
전신을 낡은 로브로 감싼 해골 하나가 쇳소리를 내며 포탈 밖으로 빠져나왔다.
“팔, 너무 아프다. 망할 스켈레톤, 내가 부숴도 되냐?”
그녀는 새빨갛게 짓눌린 팔을 쓰다듬으며 스켈레톤을 응시했다.
“일단 뒤에 빠져있어.”
“알겠다··· 그러면 이걸 부탁한다.”
블라즈코비츠는 진원의 단호한 대답에 얼굴을 찡그리며 포션을 건네주었다.
“그냥 여기서 부으면 안 되는 거야?”
“되도록이면 포탈 옆에서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대상과 가까워질수록 효과가 커진다.”
“그래, 알았다.”
진원은 그녀에게 마개를 받아 다시 입구를 막은 뒤, 인벤토리에 넣었다.
“프리스트 분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지금부터 정화스킬을 사용해 주세요! 저놈은 제가 맡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진원의 지시에 프리스트들이 지면에 손을 올리고 정화 스킬을 사용했다.
“형! 이분들은 저한테 맡기세요!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최은식은 방패를 치켜세우고 공격에 대비했다.
장은결과 그의 일행들 또한 프리스트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보스: 강화된 리치]
“역시 이놈도 영향을 받은 건가? 자세히 보니까 아니네.”
매우 드물게 보스나 몬스터 앞에 추가로 문구가 붙는 경우들이 있다.
강력한, 강화된, 튼튼한, 끈질긴 등.
그런 경우의 몬스터들은 한 단계에서 두 단계 이상 강한 대신, 드랍하는 아이템들의 가치가 훨씬 높았다.
진원은 전신이 검게 물든 보스를 보며 와인드업했다.
보통 B급 던전에서 자주 출현하는 리치는, 등급에 비해 공략하기 쉬운 보스로 유명했다.
리치의 강점은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을 소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놈의 캐스팅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 그 전에 공략당하는 샌드백 보스 중 하나이기도 했다.
“흐읍!”
“그어어!”
그러나 리치 역시 땅의 영향을 받았는지, 별도의 캐스팅 없이 자신의 하수인들 소환해 방패로 삼았다.
드드드드.
“끼엑!”
“키에엑!”
칼날 폭풍의 단검들이 놈들의 몸을 꿰뚫어 나가는 것보다, 리치가 소환하는 몬스터의 속도가 더 빨랐다.
“이런 미친! 야! 저거 리치 맞잖아! 저건 또 왜 저래?”
뒤에 빠져있던 장은결은, 캐스팅도 없이 엄청난 물량을 뽑아내는 리치를 보며 충격받은 듯했다.
“무슨 캐스팅도 없이 저만한 수를 소환한다고?”
“저 정도면 웬만한 A급 보스랑도 비비겠는데요?”
“장은결 님, 저거··· 우리가 안 도와 드려도 될까요?”
그와 일행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상황을 살폈다.
최은식은 옆에서 형 혼자서도 충분하니 괜히 나서지 말라고 대답했다.
“이래야 할 맛이 나지.”
그 사이, 진원은 자신에게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 * *
같은 시각.
제주도의 한라산 국립공원에서 두 남성이 접전을 벌이고 있다.
쉬익!
자세히 보면, 한 남성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크윽! 김수환! 여기는 또 어떻게 온 거지?”
“공항에서부터 네놈인 것을 눈치챘다. 내 미행을 전혀 못 알아차리다니. S급 플레이어도 급이 있는 건가.”
이연우는 힘겹게 김수환의 그림자를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몸에는 베인 듯한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큭! 이제 물러나기만 하면 되는데!’
그는 전투에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인 악마 술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투능력 또한 없다.
민첩 스텟에 엄청난 투자를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김수환의 공격을 피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임프 소환진은 절대 들키면 안 된다!’
이연우는 자신이 설치한 마법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면서, 왕 첸이 건네준 은신의 반지를 착용했다.
“내가 가만히 놔둘 것 같나? 나를 좋을 대로 이용하고, 내 딸까지 들먹이고. 넌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겠다.”
그가 무언가를 하려는 낌새를 알아차린 김수환은 더욱 매섭게 그림자를 끌어올렸다.
‘크윽! 이렇게 된 이상 스킬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이연우는 반지를 착용할 틈도 안 주는 김수환을 보며 입술을 굳게 깨문 뒤.
스킬: 마의 벽을 사용했다.
“큭!”
김수환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물체를 보며 순간 뒤로 물러났다.
이연우는 그 틈을 이용해 은신의 반지를 착용한 뒤, 미리 설치해둔 마법진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망할. 놓쳤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응?”
우우웅.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림자를 거두는 사이, 뒤편에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이연우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새끼! 멀쩡히 가게 둘 것 같냐!”
“크으··· 이 일은 잊지 않겠습니다.”
김수환은 그림자를 끌어올려 놈의 몸을 노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지, 이연우의 옆구리를 살짝 꿰뚫는 선에서 그치게 되었다.
“후우, 저놈을 이렇게 놓치다니. 일단 다른 장소를 둘러봐야겠군.”
그는 이연우가 완전히 사라지자 놈이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염려되어 자리를 떠났다.
* * *
한편, 진원은 붉은 늑대와 메시아를 비롯한 소환수들과 함께 리치와 맞섰다.
[꼬마 디멘션 워커가 뒤틀린 차원: 메가모프를 사용합니다. MP를 600 소모합니다.]
[붉은 늑대가 귀신 태우기를 사용합니다. MP를 500 소모합니다.]
[메시아가 다크레이를 사용합니다. HP를 300 소모합니다.]
“다 죽어! 불타버려라! 벌레들아!”
“키기긱! 키긱!”
전방에서 거대화한 꼬마 디멘션 워커가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수를 줄이면, 뒤이어 붉은 늑대와 메시아가 뒤이어 스킬을 사용했다.
“흡!”
그 뒤로 진원이 마구: 블랙홀을 사용해 놈들을 끌어모았다.
꼬마 임프나 마도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덩이를 던져댔다.
“우와······.”
“역시 형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스킬은 계속 유지할게요.”
진원과 소환수들의 물 흐르는듯한 스킬 연계.
뒤에 빠져있던 플레이어들은 저도 모르게 입까지 벌려가며 바라보았다.
“어? 맞다! 아무나 저거 동영상 좀 찍어봐요! 형 명예 포인트가 필요해서요!”
“예? 명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지금 스킬 때문에 못 움직이니까 아무나 스마트폰 좀 꺼내서 촬영 좀 해봐요! 저건 놓치면 안 된다고요! 유투브 각입니다!”
명예 포인트가 생각난 최은식은 플레이어들에게 닦달했다.
“아, 예··· 일단 그렇게 하죠.”
그러자 그중 한 명이 마지못해 주머니를 뒤적거려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르르르······.”
“키에엑!”
보스 몬스터가 소환하는 엄청난 수의 하급 몬스터들.
보통 많아 봐야 수백을 쏟아내고, 그 뒤로 별 행동이 없는 리치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띠링.
[리치의 하급 하수인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얌마, 겨우 그게 다야? 더 없어?”
그러나 진원에게는 경험치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는 리치가 소환한 하수인들도 경험치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놈을 건드리지 않았다.
“엄청나게 잡은 것 같은데 이제야 레벨이 올라가네.”
진원은 인벤토리에서 MP포션을 마시며 메시지들을 슥 훑어보았다.
그가 혼자서 잡은 하수인들만 대략 2천.
하급 몬스터들로 이루어진 놈들이라고는 하나,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다 땅의 영향까지 받아 강화된 놈들을 상대하는 것은, 진원을 제외하고 이 장소에 있는 누구라도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그어어······.”
놈은 MP가 다 떨어졌는지, 그저 턱을 달그락거리며 진원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이제 뒤져.”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붉은 늑대가 빠르게 리치에게 접근한 뒤 그대로 목을 베었다.
띠링.
[보스: 리치를 처치하였습니다!]
[아이템: 리치의 이어링을 발견하였습니다!]
[해당 던전의 보스 몬스터 사망으로 인해, 포탈이 사라집니다.]
랭크: S
추가 보상: 상급 마정석 1개
“역시 B급 던전 수준의 보스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옵션이네.”
진원은 유니크 등급의 귀걸이를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뒤 포탈이 생성되었던 지점으로 가 블라즈코비츠가 건네준 정화의 포션을 사용했다.
“연구원분들! 분석기 한 번 더 사용해 주세요!”
“예! 바로 갑니다!”
방금 진원의 전투를 바라보았던 연구원들은, 한층 더 잽싼 몸놀림으로 진원에게 달려갔다.
“내 거. 확실히 효과 있을 거다.”
블라즈코비츠는 요란한 소리를 내는 분석기를 보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기냐?”
“아니다. 김진원, 네가 내 예상대로 강한 남자여서 다행이다.”
“뭐래냐.”
그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해로운 물질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후우, 일단은 안심입니다.”
긴장된 표정으로 분석기의 결과를 확인한 연구원들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장난 아니었네요.”
“예, 정확히는 김진원 씨가 말이죠.”
“후우. 다, 다행이다. 현기증 나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상황이 종료되자, 정화 스킬을 사용하던 프리스트들이 쓰러지듯이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살면서 이렇게 정화를 오래 사용해 본 적은 처음이네요.”
“어쨌든 고생 많았습니다. 전부 끝난 것 같으니 협회장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은결은 프리스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바로 진원에게 다가갔다.
“김진원 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정도의 힘을 가진 리치는 살면서 처음 봤습니다.”
“확실히 이상한 놈이긴 했는데, 별거 없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저희 힘으로는 상당히 버거웠을 겁니다.”
진원의 엄청난 힘을 목격한 장은결.
그는 진원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정작 본인은 별 감흥 없는 것 같았지만.
콰앙!
“···뭐야?”
“뭐, 무슨 일이지?”
잠시 후, 서귀포 지역을 벗어나려는 일행들에게 커다란 폭발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