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침식-2
- 진원 씨! 긴급 상황입니다. 제주도에 포탈이 발생하자마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습니다! 현재 플레이어들이 제주도로 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일 것 같습니다.
손태욱은 어딘가로 급히 달리며 전화를 걸었는지, 가쁜 숨을 연신 내뱉었다.
“포탈이 생성되고 바로 브레이크가 일어났다고요?”
- 예! 이런 경우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예전 야구장에서의 사건.
그 이후로는 발생한 지 최소 3개월 이상이 흐른 포탈에 브레이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빈도도 낮은 편이었는데.
- 후욱. 거기다 포탈에서 나온 몬스터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그리고 서귀포 쪽부터 땅표면이 점차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포탈의 등급이 어느 정도 되나요?”
- 측정된 수치는 A급 수준입니다만··· 몬스터들이 기존에 비해 강해진 느낌입니다.
이어지는 손태욱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새롭게 발생한 포탈은 서귀포 쪽에 있다고 한다.
거기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며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
놈들은 측정된 마력 수치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고 말했다.
- 현재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몬스터들의 이동속도는 느려 공항까지 도달하기에는 시간이 꽤 걸릴 듯합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진원에게 정중히 도움을 요청했다.
- 오늘 밤, 제주도로 가서 협력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워낙에 변수가 많아 진원 씨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죠. 그럼 준비가 끝나는 대로 도와드리겠습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진원 씨! 나중에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그의 통화를 유심히 듣고 있던 이시현과 최은식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사장님, 방금 통화 내용, 상당히 위급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만······.”
“형! 이번에는 저도 꼭 데려가 주세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은식아, 말리지는 않겠는데 네가 상대해야 할 몬스터들은 A급 이상일 수도 있어.”
진원은 장비를 챙기는 최은식을 보며 경고하듯이 말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따라가겠다고 대답했다.
“김진원, 나도 데려가 줬으면 한다. 나, 이제부터 너의 길드원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블라즈코비츠는 계약서를 흔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너, 전투능력이 없다고 들었는데. 내가 지켜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 그냥 여기 남아있어.”
“그거야, 연금술로 만든 포션을 마시지 않아서 그렇다. 걱정 말고 나도 데려갔으면 좋겠다. 이젠 나도 엘리트 길드의 일원이다.”
그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포션들을 진원에게 보여주었다.
“그래, 일단 너도 따라와라.”
옵션을 확인하던 그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일단 아까 했던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알았다. 나도 바로 준비하겠다.”
* * *
김수환이 자주 이용하는 단골집 식당.
그는 자신의 딸을 잠시 맡기기 위해 가게주인을 찾았다.
“아빠, 또 어디가?”
그의 딸, 수진이가 불안한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빠가 자신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쓸쓸하고 외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빠가 신세를 진 분이 있거든. 그분을 도와드려야 해. 말해줬지?”
“응, 나 아픈 것 낫게 도와준 사람.”
“금방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다음에 아빠가 수진이 좋아하는 에버랜드 데려가서 하루 종일 놀게 해줄게.”
김수환은 수진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자세를 낮추고 그녀의 등을 살살 두드리며 달랬다.
“우와! 진짜?”
“그럼! 아빠가 거짓말한 적 있었니?”
“아니, 없어!”
“그럼 미리 들어가서 아빠가 챙겨준 짐 정리하고 있어.”
“응! 빨리 돌아와야 해!”
그가 놀이공원에 데려가 준다는 말에, 표정이 한껏 밝아진 수진이는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애가 참 착해.”
“항상 감사합니다, 사장님.”
“사장님은 무슨, 그냥 편하게 불러.”
그와 동시에 식당 문을 열고 나온 노인.
그녀는 사장이라는 말에 질렸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자네, 또 위험한 곳에 가는 거 아닌가? 딸을 생각해야지. 자네까지 가버리면 수진이는 누가 볼 텐가.”
“최대한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받아주십시오.”
김수환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인에게 돈 봉투를 건네주었다.
“에이! 넣어둬! 난 그냥 작은 애 먹여주고 재워주고 하는 것밖에 없어! 수진이가 하도 착해서 손도 안 가.”
돈 봉투를 본 노인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봉투를 도로 김수환의 품으로 들이밀었다.
“그러기엔 제 양심이 찔립니다.”
단호한 그의 태도에, 노인은 결국 못 이겼다는 듯 봉투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조심혀.”
“예,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수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짧게 인사를 남긴 뒤, 등을 돌려 공항으로 향했다.
‘서둘러야겠군.’
김수환은 뉴스를 통해 제주도에서 던전 브레이크와 함께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는 보도를 들었다.
처음에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관심을 껐다.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 던전 브레이크 발생! 최단시간을 기록해.]
[땅표면이 검게 물들며 퍼져나가기 시작… 현재 조사 중.]
[S급 플레이어 김진원, 그리고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제주도를 지원하기로 해.]
그러나 김진원을 선두로 해 플레이어들이 제주도로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역시 제주도로 향하기로 한 것.
‘전시회 때는 도와드리지 못했다.’
진원이 묠니르를 공개적으로 전시하던 날.
김수환 또한 그를 돕기 위해 문화관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하필 수진이가 그 날 감기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길 것을 알고서도 도와주지 못했다.
‘나는 아직 그분에게 갚아야 할 것들이 많다.’
그는 제주도를 가기 위해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 * *
그 뒤로 3시간이 지난 제주 국제공항.
“아니, 비행기 좀 빨리 내줘요! 이러다 우리 모두 죽겠습니다!”
“벌써 몇 시간째예요! 플레이어들은 곧바로 지원 온다 해놓고 아직도 안 왔다고요!”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찬 공항 내부.
사람들은 빨리 비행기를 띄우라며 화를 내며 소란을 피웠다.
배는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운항이 중지된 상태.
사람들이 공항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안심해 주세요. 서귀포 쪽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했고 몬스터들은 미리 오신 플레이어분들께서 막아주시고 계십니다.”
공항의 직원들은 진땀을 흘리며 상황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 갔다.
“이러다 여기에 몬스터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우리다 죽어요! 알아요? 이런 상황을 미리 대비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참다못한 중년의 남성이 앞으로 나서서 직원들에게 따지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 기세를 타 언성을 높였다.
“나라는 도대체 뭐 합니까? 우리 다 죽고 나면 도와주러 올 거예요?”
“우리가 뭐 때문에 세금을 냅니까!”
공항의 직원들은 사람들의 거센 반응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 저기! 김진원 씨가 왔습니다!”
“여, 여러분! 대한민국의 S급 플레이어 김진원 님이 직접 도와주시러 오셨습니다!”
때마침 진원이 공항 로비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직원들.
그들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돌렸다.
“김진원? 진짜 김진원이다!”
“어디? 진짜로 왔냐?”
멀리서 진원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은 그제야 진정하는 듯했다.
‘역시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 있네.’
진원은 넓은 공항을 빽빽하게 메운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자, 시끄럽다는 듯 양쪽 귀를 막고 출구로 향했다.
“김진원,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너는 한국에서 슈퍼 스타냐?”
“시끄러워.”
그의 뒤를 따르던 블라즈코비츠는 진귀한 광경을 보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휙휙 돌렸다.
“형, 바로 서귀포로 향하나요?”
그의 옆에서는 빈틈없이 갑옷과 함께, 방패를 장비한 최은식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해왔다.
이시현 씨의 말을 듣자니, 녀석은 자신이 없을 때도 틈날 때마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 던전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래, 바로 가야지. 그런데 너 레벨은 몇이냐? 자세가 좀 나오는데?”
“알아보시겠나요? 이번에 열심히 올려서 57입니다.”
“뭐야? 생각보다 높네.”
“형이 길드 마스턴데 부길마인 제가 약해빠져서는 길드 이미지가 안 좋아지거든요.”
공항 밖으로 나온 최은식은 진원의 말에 방패를 들고 자세를 이리저리 취해 보였다.
‘별로 긴장하지 않은 것 같네.’
아무래도 녀석의 말이 허세는 아닌 듯했다.
“김진원 님, 여기에 타십시오. 손태욱 님께 미리 보고받았습니다. 추가적인 설명은 가면서 해드리겠습니다.”
“그러죠.”
잠시 후.
미리 제주도에 도착한 플레이어 한 명이, 그를 서귀포로 데려가기 위해 차를 이끌고 왔다.
“지금까지 뭐 밝혀진 것들은 있나요?”
조수석에 앉은 진원의 질문에, 운전대를 잡은 플레이어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는 도착하자마자, 아무래도 점차 새까맣게 물들어가는 땅이 의심되다 보니 그 부분을 중점으로 조사를 진행하려 했습니다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A급 5명, B급과 C급 30명 등의 협회 소속 플레이어들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포탈로 향했었는데.
“측정된 포탈의 마력 수치는 A급입니다만… 안에서는 C급이나 D급에서 나올 법한 몬스터들이 나왔습니다.”
몬스터들이 생각보다 너무 강해 애를 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고블린이나 오크, 코볼트나 미들 웜 같은 몬스터들의 몸 색깔이 칠흑처럼 새까맸습니다.”
“전부 다 그렇던가요?”
“예, 특이한 것은 놈들이 포탈에서 나오고 땅을 밟자마자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더군요.”
그 광경을 떠올리던 남성은 치가 떨리는지 입술을 떨었다.
“A급 플레이어들을 포함해 B급과 C급이 연계를 해야 놈들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남성은 입을 꾹 다물고 액셀을 힘껏 밟아 나갔다.
‘설마 그 보라색 용액이 문제를 일으킨 건가?’
이전에 손태욱에게 들었던 보고와 상당히 유사한 느낌이 들었다.
‘퍼진다는 건 모르겠는데, 땅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는 것은 동일하다. 일단 도착해봐야 알겠지만.’
진원이 손태욱에게서 추가적으로 받은 부탁.
그것은 연구원들이 문제가 된 장소에서 조사를 진행하면, 그들을 보호하며 쏟아져나오는 몬스터를 막는 것이었다.
“형, 저는 가서 어떻게 하면 될까요? 플레이들과 몬스터를 막으면 되나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최은식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래, 최대한 지켜주는 쪽에만 신경 써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네! 그건 제 전문이니까 맡겨주세요!”
“진원, 나도 있다. 놈들의 뚝배기를 깨버릴 거다.”
진원의 대답에 그들이 맡겨만 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그는 벌어진 광경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