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침식-1
“크아악!”
띠링.
[보스: 거대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아이템: 거대악마의 뿔을 발견하였습니다!]
[850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랭크: S
추가 보상: 최상급 마정석 1개
[귀환 포탈이 생성됩니다.]
“후, 이제 두 번 정도로는 택도 없나 보네. 그래도 경험치 혼자 독식했는데.”
A급 던전을 클리어한 진원은 레벨 업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자 짜증 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여유롭게 던전 예약을 해놨으니, 오늘 최대한 클리어해봐야겠네.”
지난번에 이계 던전인 연옥 1층을 클리어해, 2층으로 가는 포탈이 열렸다.
하지만, 던전의 난이도가 1층에 비해 얼마나 높아지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 적어도 65레벨을 달성하고, 장비들도 어느 정도 교체한 뒤에 갈 생각이었다.
띠리리.
진원이 귀환 포탈을 타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시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 사장님, 던전 클리어하시느라 바쁘시겠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요?”
뭔가 기운 없는듯한 그의 목소리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물어보자, 이시현이 넌더리 난다는 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 아니, 무슨 러시아에서 온 플레이어가 진원 씨를 꼭 만나야 한다며 소파에 죽치고 앉아서 나가지도 않고 있습니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아니, 이봐요!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가로챈 듯한 플레이어가 말을 걸어왔다.
김진원, 너를 만나러 왔다. 이리로 와줘라.
“너 누구냐? 나를 왜 찾아?”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한국어 실력을 보면, 해외에서 온 외국인이 확실한 듯했다.
- 나, 러시아에서 온 블라즈코비츠라고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말로 할 때 길드 사무실에서 꺼져라.”
그러나 그녀는 진원의 거친 말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대답해왔다.
- 너, 나한테 나쁘게 대하면 후회한다. 나, 송현성의 의뢰를 받아 한국에 온 거다.
“···송현성이라고?”
- 맞다. 그리고 나는, 아무에게나 의뢰를 받지 않는다.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진원은, 예전 그에게서 요구한 부탁이 생각났고,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통화를 종료했다.
“내가 송현성한테 부탁한 건 하나밖에 없지.”
6개월 안으로 동생의 트라우마를 없앨 수단을 찾으라고 한 것.
“일단 가봐야 알겠네.”
* * *
엘리트 길드의 사무실.
이시현과 방금 전에 들어온 최은식이 지친듯한 기색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시현 씨, 도대체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죠?”
“러시아에서 온 플레이어라는 것밖에 모릅니다.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김진원 씨가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이시현은 골치 아픈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러댔다.
‘도대체 뭐지? 숨겨둔 여자친구나 그런 건가? 아니, 형이 그럴 리가 없지.’
그의 연락을 받고 들어온 최은식은, 블라즈코비츠라는 플레이어에게 목적이 뭐고 형과 무슨 관계냐고 캐물었지만.
‘나를 귀찮게 하면 김진원에게 피해가 간다.’라고 말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업무용 자리로 돌아갔다.
꿀꺽.
한편, 얼마 전 이시현이 새로 뽑은 직원들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조금씩 곁눈질하고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도 남자라서 자연스럽게 눈 돌아가는 건 알겠는데. 밀린 업무들부터 끝내야 하지 않겠냐?”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이시현은 다시 업무에 집중하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내가 좀 예쁘긴 하다.”
소파에 거만하게 등을 기대고 있던 블라즈코비츠는 씨익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네가 나를 찾던 플레이어냐?”
사무실 내에서 불편한 공기가 돌길 잠시, 문을 열고 들어온 진원이 소파에 앉아 있는 여성을 보며 입을 열었다.
“김진원, 역시 사진보다 실제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뭔 소리야?”
“그냥 혼잣말이다. 바로 본론부터 얘기할까?”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고 진원을 소파에 앉으라는 듯이 눈짓했다.
스스스.
진원이 블라즈코비츠의 맞은편에 앉기 무섭게, 메시아가 모습을 드러내 그의 팔에 달라붙었다.
‘왜 그래?’
[쟤, 기분 나빠. 진원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어. 조심해.]
마치 진원을 위험에서부터 보호하려는 듯한 행동.
“와우, 귀엽다. 사진 한 방 찍어도 되냐?”
메시아는 신기한 듯이 자기를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짐짓 화난 듯이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스마트폰을 들이댔다.
“장난은 적당히 하고. 송현성 씨한테서 의뢰를 받았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트라우마를 없애주는 비약.”
“그렇다. 얼마 전, 만들었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진원의 말에 블라즈코비츠는 품에서 푸른색을 띠는 포션을 하나 꺼냈고, 그는 아이템의 옵션을 확인하며 생각에 빠졌다.
[연금술사의 특수 물약]
시원한 맛이 일품인 포션. 그렇다고 원샷 하지는 말자. 생각보다 쓰다.
종류: 비약
등급: 유니크
효과: 특정 날짜의 기억을 떠올리기 애매한 정도로 지워줍니다.
제작자: 블라즈코비츠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아.’
동생이 송진호에게 납치당해 폐공장에 묶여 있었던 날.
사실은 완전히 그날에 관한 기억을 없애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딱 들어맞는 아이템을 찾기란 어려웠다.
“이건, 돈으로 해결되는 포션이 아니다. 먼저, 나의 실력과 정성이 들어간다. 그리고 매물이 없는 아이템이 구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그래, 잘 알았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포션의 효과를 확인한 진원은, 한결 더 부드러워진 태도로 블라즈코비츠를 대했다.
‘아마도 얘가 연금술사겠네.’
그게 아니더라도 주도권은 그녀에게 있다.
자신과 송현성, 그리고 협회의 힘까지 빌려 아이템을 찾았던 적이 있었지만, 결국 발견해내지 못했으니.
“난 네가 마음에 든다, 김진원. 너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다.”
그녀의 입에 나온 말을 들은 진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최은식과 이시현, 그리고 옆에 있는 메시아까지 질색하며 반대했다.
“형!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 상태가 이상해요! 길드원으로 들이는 건 반대입니다!”
“사장님. 아이템이 급하신 건 알겠지만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 편이······.”
[진원, 속으면 안 돼.]
진원은 이 녀석들이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나 싶어 의문감을 느끼던 중, 블라즈코비츠가 포션을 집어 흔들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 너의 팬이다. 불꽃 남자 김진원 유투브가 생기고 나서, 바로 구독했다. 그리고 난,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특별하다.”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하게 발음하며 자신이 유니크 직업인 연금술사라고 밝혔다.
“나는 전투능력은 별로 없지만, 제작능력에 자신이 있다. 나를 받아주면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런데 왜 굳이 엘리트 길드에 들어오려고 하는 거야?”
아무리 진원이 특출난 플레이어라고 하더라도, 엘리트 길드는 규모가 작은 회사나 다름없었다.
방금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대형 길드에서 돈을 부어서라도 데려가려고 애쓸 터.
“네가 있기 때문이다, 김진원. 네가 거침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나. 반한 것 같다.”
“···뭐라고?”
“나는, 진지하다.”
블라즈코비츠는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고, 유투브에서 인상 깊게 본 영상을 감회에 젖은 채로 말하기 시작했다.
[불여우야. 속지 마, 진원!]
“푸흡!”
“아! 이시현 씨! 더럽게 뭐 하는 거예요! 형!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잖아요!”
“커, 커헙!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본 메시아와 최은식, 그리고 이시현은 재빠르게 진원에게 다가가 반대했다.
“아, 좀 떨어져 봐! 나도 막 영입시키고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진원은 자신에게 달라붙은 녀석들을 떼어놓고 실실 웃어대는 녀석을 향해 말했다.
“미안한데, 엘리트 길드는 네 능력에 걸맞게 대우해 줄 힘이 없어.”
“상관없다.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진짜 목적이 뭐냐?”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네 길드에 정식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들어줬으면 좋겠다. 못 믿는 것 같으니 이것도 주겠다.”
그녀는 진원이 못 미덥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품에서 자그마한 구슬을 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너, 여동생 있지? 가족들 지키는 데는 이게 최고다. 그리고, 이런 건 나만 만들 수 있다. A급 플레이어의 스킬을 2번 정도는 막아준다.”
[연금술사의 수호 구슬]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종류: 기타
등급: 유니크
효과: 일정 피해를 대신 받아줍니다.
제작자: 블라즈코비츠
“확실히 쓸만하긴 하네.”
효과를 확인한 진원은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녀석이 연금술사인 것을 알았으니까, 받아줘서 나쁠 건 없겠는데.’
저 정도의 아이템들을 주겠다는데, 요구하는 조건이 엘리트 길드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거저나 마찬가지.
‘아이템. 특히 장비들의 매물 같은 것도 별로 없기도 해. 효과에 비해 비싼 것도 많고.’
거기다 해외에서 딱 1명밖에 없다고 알려진 연금술사 같은 경우는, 아주 희귀한 제작 계열의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악세사리 같은 장비를 만들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다.
“혀엉!”
[진원, 속으면 안 돼.]
그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최은식과 메시아가 안 된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진원은 녀석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신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웬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러시아의 연금술사 블라즈코비츠라고 알아?”
-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엄청 유명하지. 안 그래도 희귀한 직업을 보유한 데다가 능력도 좋아서 스카우트 제의 엄청 받았을걸?
“그래. 안 그래도 얘가 한국 와서 엘리트 길드에 넣어달라고 해서 물어봤다.”
진원의 마지막 말에 신혜진의 언성이 높아졌다.
- 뭐? 네 길드에 들어가겠다고? 너 돈은 있냐? 아니지. 그 사람은 특별한 조건이 없으면 영입이 불가능할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야야. 좀 천천히 말해. 랩 하냐? 저쪽에서 먼저 찾아왔어. 길드에 넣어달라고.”
진원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그녀를 진정시키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 아니, 하··· 말이 되냐? 진짜 그게 다야?
“그러니까 나도 의심이 들어서 너한테 연락해 본 거야. 이 녀석에 대해 알고 있나 싶어서.”
- 그 사람은 제작 계열 플레이어라서 딱히 너한테 해를 끼칠 힘은 없을 거야. 애초에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 어쨌든 알려줘서 고맙다.”
어느새 김빠진 듯한 목소리로 변한 신혜진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하다며 구시렁거리다가 통화를 종료했다.
“이시현 씨. 일단 뭐, 받아들이기로 정했으니 계약서 같은 건 알아서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크윽······.”
가만히 진원의 통화를 듣던 최은식과 이시현은, 그가 내린 결정에 입술을 깨물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
메시아도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다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왜 저러는 거지?’
블라즈코비츠의 엄청난 존재감 때문에, 자신들이 공기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까 봐 불안한 것을 진원이 알아챌 리 없었다.
띠리리.
사무실 내부가 조금씩 소란스러워질 때쯤.
협회장 손태욱에게서 연락이 왔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