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전조-1
콩콩이가 동생의 눈을 가리는 동안, 플레이어들을 모조리 죽인 고재원은 놈들을 쓰러트린 척하고 빠르게 장소를 벗어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지원이가 어리다 보니 그 나름대로 배려해준 것 같았다.
“한동안 경호는 이대로 유지하도록 해야겠네.”
진원이 스승님에게 또 어떤 비싼 술을 사 드리며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칭호: 레드 플레이어]
조건: S급 플레이어를 1명 살해.
효과: 플레이어에게 가하는 모든 데미지 15퍼센트 증가.
“뭐야? 또 칭호를 준다고?”
차원 퀘스트에서 칭호를 얻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새로운 칭호라니.
물론 많을수록 좋기야 하지만.
“근데 왜 이제 와서 주는 거냐? 하여튼 지 맘대로라니까.”
플레이어 시스템에 불만을 내뱉던 진원은 상태 창을 열었다.
<플레이어>
이름: 김진원
레벨: 63
직업: 계약 소환사
등급: 유니크
업적: 군락의 지배자
칭호: 차원의 견습 수호자
HP: 4100
MP: 4300
항마력: 50
[스텟]
근력: 80 민첩: 80 체력: 60 마력: 130 지배력: 140
미분배 포인트: 10
#플레이어중 유일하게 상점 기능이 개방됩니다.
#모든 데미지 10퍼센트 감소 효과가 적용됩니다.
#뱀파이어 군주 메시아와 피의 계약을 맺은 상태입니다.
[스킬]
마구: 블랙홀 Lv.7
마구: 칼날 폭풍 Lv.20 (Max)
마구 Lv.10 (Max)
불굴 Lv.1
순간 가속 Lv.10 (Max)
미분배 포인트: 1
[직업스킬]
소환의 방 Lv.3
계약 소환: 꼬마 임프 Lv.10 (Max)
인핸스 본드 Lv.10 (Max)
계약 소환: 꼬마 마도사 Lv.10 (Max)
계약 소환: 심연의 마누스 Lv.3
계약 소환: 꼬마 디멘션 워커 Lv.10 (Max)
[상점]
Lv.7
이전까지 거의 오르지 않던 레벨이, 지난번 전투에서 한 번에 2나 올랐다.
“한 놈이 S급 플레이어였나.”
진원은 자신을 습격했던 중국인 둘을 떠올렸다.
심연의 마누스를 제외하고 붉은 늑대와 메시아, 그리고 소환수들까지 놈의 몸놀림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었다.
“속도에 특화된 직업이나 민첩에 몰빵한 놈이었나? 도대체 뭘 알 수가 없네.”
중국의 S급 플레이어, 장 슈잉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던 정보는 그가 세계 랭크 40위권에 안착해있었다는 점뿐이었다.
“40위 정도 되면 특화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겠네.”
진원은 이전의 일 때문에, 민첩에 포인트를 우선적으로 사용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60레벨이 넘으니까 레벨 올라가는 속도가 느려졌어.”
그가 상태 창을 쳐다보며 곰곰이 생각하기도 잠시.
띠링.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신혜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신혜진: 야, 나 입원했는데 어떻게 문자 하나 안 주냐?
신혜진: 와, 내가 너한테 지금까지 해준 게 얼만데.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
“…잊고 있었네.”
진원은 곧바로 차 키를 챙기며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김진원: 많이 다쳤냐? 안 그래도 오늘 중으로 가려고 했다.
신혜진: 구라치고 있네. 올 때 치킨이나 한 마리 사와줘. 병원 밥 맛없어 죽겠다 ㅡㅡ.
김진원: ㅇㅋ 최대한 빨리 감.
그녀에게 병원 주소를 전달받은 진원이 곧바로 집을 나서자.
[진원, 나가는 거야? 나도 갈래.]
소파 근처에 앉아 있던 메시아가 심심한 듯 자신에게 다가왔다.
“상관없긴 한데. 신혜진 병문안 갈 거라서. 따라올래?”
[…난 걔 별로 안 좋아해. 그래도 진원의 곁에는 있을게.]
그녀가 표정을 살짝 구기더니 모습을 감췄다.
“콩콩아, 집 잘 지키고 있어. 병문안 좀 갔다 올게.”
진원은 태평하게 있는 콩콩이를 한번 쳐다보고, 현관문을 열었다.
“크이!”
녀석은 이제 집 지키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거실 바닥에 누워 배를 보인 채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 * *
서울 아산병원의 1인실.
“아오, 이놈 도대체 언제 와. 치킨을 병아리부터 키워서 사 오나?”
신혜진은 하루 입원에 45만 원 이상의 병원료를 자랑하는 상급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워 한쪽 팔을 기대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별거 아니라니까 입원을 3일이나 하라고? 너무 과해!”
이제는 그것도 지겨운지 곧 스마트폰을 치우고 짜증 나는 듯이 말을 뱉었다.
“하여튼 더럽고 치사한 새끼들이었어.”
그녀는 습격했던 플레이어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놈들은 상황이 불리해짐을 알아차리고 대피하는 민간인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신혜진은 그들을 최대한 보호해가며 싸우다가, 결국 빈틈이 생겨 오른쪽 허벅지에 공격을 허용해 버렸던 것이었다.
“나 왔다. 몸은 좀 괜찮아?”
잠시 후.
치킨을 포장해 온 진원이 병실 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고급스럽게 포장된 치킨을 건넸다.
“야, 치킨 하나 사 오는 게 그렇게 힘들어? 너 일부러 늦게 왔지?”
“문자 받자마자 바로 달려온 거야. 그리고 그 푸라닭인가 뭔가 꼭 그걸로 가져다 달라며? 줄 엄청 많았거든?”
진원은 괘씸하다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신혜진의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기고,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래서 어디 다친 거야?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그는 신혜진의 몸에 딱히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아, 혹시 저주라도 걸리진 않았는가 생각했다.
“그냥 재수 없게 다리에 한 방 맞았지 뭐. 별거 아닌데 태우 오빠가 정밀검사 받아야 한다고 그 난리를 치더라고.”
- 길드장님!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세요! 타이거 길드를 책임지는 분 아니십니까! 무슨 독이라도 묻어있었을 줄 누가 압니까!
붕대가 감긴 발을 들어 보이던 그녀는 진지한 기색으로 말을 뱉던 김태우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뉴스 보니까 문화관 밖에서도 난리가 난 것 같던데.”
“그래! 내가 아직도 그 외국인 새끼들을 생각하면 열 받아 죽겠다니까!”
치킨 닭다리를 물고 맛있게 뜯던 그녀는, 진원의 말에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조사결과는 나오는 대로 협회장님이 너한테 먼저 연락하겠다더라. 고맙다고 전해달래. 많이 바쁘신가 봐.”
“그래. 너 입원은 언제까지 하냐?”
“내일까지 하고 그다음 날 퇴원. 하아…….”
신혜진은 지루한 생활을 앞으로 하루 더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별일 아니라서 다행이네. 저주라도 걸렸으면 희석된 엘릭서라도 주려고 했는데.”
“뭐?”
희석된 엘릭서라는 말에 순간 눈이 커진 그녀는 재빠르게 먹던 치킨을 내려두고 다리를 부여잡은 뒤, 얼굴을 힘껏 찡그렸다.
“야, 나 갑자기 스킬 맞은 곳이 아픈데…….”
“어, 안 속아. 그럼 난 이제 간다. 나중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라.”
진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한번 쳐다본 뒤, 등을 돌려 오른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갔다.
“하, 저주! 내가 왜 그걸 몰랐지. 일주일 안으로 뒈지는 저주라도 걸렸다고 할걸!”
그녀는 자리에서 아쉽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몇 번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 * *
서울의 한 삼겹살집.
“혀엉! 여깁니다!”
가게 앞에서 서 있는 최은식이 진원의 차를 보고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최근 들어 진원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어 따로 만나자고 연락한 것이었다.
“미리 들어가 있지 그랬냐.”
“혼자 들어가 있기 좀 어색해서요.”
보통 같으면 그의 말을 적당히 흘려넘기는 진원이었지만.
‘그동안 이 녀석이랑 제대로 얘기도 못 해봤으니, 신혜진 병문안 갔다 온 김에 한번 어울려 줘야겠네.’
최근에 플레이어 이벤트를 비롯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져, 최은식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대화조차 제대로 못 나눴기 때문에, 진원은 녀석의 술 한잔하자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내가 살게. 마음껏 먹어라. 여기 삼겹살 6인분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네! 감사히 잘 먹을게요, 형!”
“삼겹살 가지고 호들갑은.”
최은식은 자신과 비교도 안 되게 진원의 돈벌이가 좋아졌다는 것을 알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불판 위에서 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가는 동안, 조금씩 말을 꺼내던 녀석은.
“혀엉! 그러니까 은지희 걔가 성격 이상한 거 맞죠?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래. 나도 짐꾼일 때 당했다. 싸가지 없는 거로는 걔 이길 사람 거의 없을걸.”
“예? 걔가요? 혀엉을요? 감히 형이 누군데! 제가 당장 연락해서 혼을···….”
“그러니까 과거라고. 이놈 완전히 취했네.”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그동안 쌓인 불만이 꽤 있었는지 진원에게 한탄하듯이 말했다.
어느새 테이블 위로 쌓인 빈 소주병만 4병.
“혀엉은 항상 그래요! 저는 혀엉의 등을 쫓아가기 바쁜데. 정신을 차려보면 다시 앞으로가 있으시고!”
“네 페이스대로 하면 되지. 굳이 나를 쫓으려고 할 필요는 없어.”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원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뱉었고, 진원은 녀석을 적당히 상대해주며 고기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레벨이 올라서 그런가? 전혀 취하는 느낌이 안 드는데.’
소주가 아니라 그냥 쓴맛 나는 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여기 콜라 하나 주세요.”
적당히 탄산음료나 마시려고 하던 찰나.
“커어어···….”
“뭐야. 뻗었어? 얌마! 집에 가서 자라.”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최은식은 테이블에 앉은 상태 그대로 잠들어 버렸고, 진원은 그런 녀석을 보며 기가 찬 듯한 표정을 지었다.
* * *
같은 시각, 서울 국제공항.
등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기른 외국인 한 명이 입국심사를 보는 중이다.
“여권 주세요.”
“여기 있다!”
“러시아의 A급 플레이어 블라즈코비츠 님이군요.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나, 관광목적으로 왔다!”
밝은 표정으로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내뱉던 여성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한국 입국심사가 이렇게 빡셌나?’
누가 봐도 미국 저리 가라 할 수준의 심사.
정확히 러시아의 어느 지역에서 왔으며, 가족 관계 및 한국으로 여행 온 이유와 어디에서 얼마나 머물 건지.
심지어 한국어는 왜 그렇게 잘하는지 질문하는 감독관을 보고 여성은 혀를 내둘렀다.
“나, 한국을 좋아한다. 한국말은 유투브를 통해서 열심히 배웠다.”
“확인 끝났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심사관은 그녀가 A급 플레이어인 것을 확인하고 여느 때보다 엄청 깐깐하게 그의 정보를 찾아보았고, 별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여권을 다시 건네주었다.
“아!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원래 한국의 입국심사가 이렇게 까다롭나?”
심사관은 그녀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워낙 생글생글하게 미소를 지으니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최근에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외국인들에 대한 심사가 상당히 강화되었습니다.”
“오! 그렇구나! 뭔가 안심되는 설명이다!”
여성은 심사관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준 뒤, 한쪽 등에 여행용 배낭을 멘 채로 출구를 찾아 나갔다.
“그동안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 보람이 있다!”
그녀는 실실 웃으며 스마트폰에 저장된 김진원의 프로필 정보를 보고, 예약된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한국에 오면, 뜨끈한 국밥 든든하게 먹는 게 국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