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전시회-1
그가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부탁했을 때 내심 기뻤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무거운 문제인지 걱정이 앞섰다.
‘김진원 씨가 우려하는 것은, 그의 가족들과 지인들.’
당연히 단신으로 그들 모두를 위험으로부터 지킨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 능력이 닿는 대로 도와줘야겠군.’
얼마 전, 자신의 손녀 손하윤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돌아온 것을 보고 진원에게 얼마나 고마움을 느꼈는지.
“저야 당연히 힘이 닿는 대로 도와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협회 소속의 플레이어들 모두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라도, 진원의 가족들이나 지인들에게 호위로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단기간일 때에 한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길게는 2주일까지 협회 소속의 플레이어들이나 그 밖의 플레이어들을 고용하는 형식으로 해서 도와드리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겠네요.”
“그렇습니다.”
진원이 에픽 무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각국에서 플레이어들이 끊임없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고.
상당한 실력자들 것임이 틀림없었다.
손태욱은 진원의 말에 아쉬운 듯이 대답했고.
“음····.”
다른 사람들 역시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지 침음만 뱉었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진원 씨.”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문명호가 입을 열었다.
진원이 그를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숨을 고르고 설명을 시작했다.
“분명히 이 건에 대해서는 사건이 발생할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 미리 조치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거기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플레이어 수가 적은 편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해외의 수많은 플레이어가 한국으로 넘어온다고 하더라도 입국을 막을 명분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아예 공식적으로 진원 씨의 에픽 무기 묠니르···라고 했습니까. 그것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전시회 말입니까?”
“그러면 더 위험해지잖아요?”
문명호의 말에 손태욱과 신혜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전시회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네요.”
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생각하던 진원이 이해했다는 듯이 문명호를 쳐다보았다.
“네. 전시회를 연다고 알리면, 진원 씨의 무기를 노리는 플레이어들 대다수가 그쪽으로 몰릴 겁니다. 아예 끌어들여서 한꺼번에 처리해버리자는 말이지요.”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누군가를 위해 나서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그 대상이 S급 플레이어, 김진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렇게 은혜를 입혀놓는다면, 나중에 어떤 형식으로든지 돌아오겠지.’
문명호는 손태욱에게 진원이 도움이 필요하다는 알게 되자마자, 다음날 있는 스케줄을 취소하면서까지 협회로 향했던 것이었다.
“상위권의 플레이어들은 각 나라에서도 귀할 테니, 혼쭐을 내주면 웬만해서는 얼씬거리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 해당 나라의 플레이어들 입국을 거절할 명분도 생기지요.”
그는 설명을 마친 뒤, 조심스럽게 진원의 기색을 살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 해도, 일단 본인의 무기를 미끼로 해야 성립되는 일이었으니까.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이 건에 대해서는 저에게 맡겨주시지요. 장소 지정부터 홍보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문명호는 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하고 협회를 떠났다.
“어··· 벌써 해결된 거야? 정말 이걸로 된 건가?”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합니다. 오히려 놈들을 끌어들인다는 발상을 할 줄이야.”
신혜진과 손태욱은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 대화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너희들한테도 부탁 좀 하자.”
진원은 주위에 남은 플레이어들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 협력 좀 해줘.”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래서?”
신혜진이 진원을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래서 뭘 줄 건데?’라는 표정.
“네 길드나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무보수로 1번 도와준다. 아니, 무보수는 좀 그렇고 20퍼센트만 받을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오케이, 콜! 이야기는 끝났으니까, 나도 이제 간다.”
그녀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서 묠니르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은지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너도 안 나오고 뭐 해. 김진원이랑 친하다고 해서 기껏 데려와 줬더니.”
“뭐? 나랑 얘가 친하다고? 그럴 것 같냐?”
“아니야? 표정 보니까 아닌 것 같네.”
진원은 신혜진의 말에 은지희를 응시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너, 내가 누구라고 구라를 쳐? 길드에서 퇴출당해볼래?”
“아악! 아파요! 전 오빠가 짐꾼일 때부터 던전에 들어가서 돈독한 관계를······.”
“미친 소리 하고 있네.”
“아, 오빠! 저랑 던전 클리어 한두 번 한 게 아니잖아요!”
“거의 나 혼자 클리어 한 거지, 무슨.”
신혜진은 그녀의 귀를 잡아끌며 밖으로 향했고, 진원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하는 은지희를 보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 내가 우스워? B급 던전에서 혼자 살아남기 한번 해볼래?”
“악! 잘못했어요, 길드장님!”
요란하게 타이거 길드의 길드장과 길드원들이 퇴장하자, 그 장면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보던 손태욱이 입을 열었다.
“저도 협회의 길드원들을 경호원으로 당분간 붙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진원 씨의 도움을 꽤나 받았으니.”
“그럼 부탁드릴게요. 이제 저도 가보겠습니다.”
진원이 나간 것을 확인한 손태욱은, 협회 소속의 플레이어 중 A급과 B급만 자리에 남으라고 지시했다.
* * *
중국 베이징. 만리장성의 무이엔위.
단체 관광객들로 항상 붐빌 정도로 인기 있는 스팟에서, 벽에 기대어 하품하던 중국인 한 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갈 거냐? 장 슈잉.”
“끼끼끼. 당연히 가야지. 에픽 아이템이라고 안 했냐?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무기라고!”
괴상하게 웃는 남성과 그 표정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남자는 장 슈잉과 장 민.
장 슈잉은 세계 랭커 40위권 반열에 있는 플레이어이며, 장 민은 60위권에 있는 플레이어다.
등급은 각각 S급과 A급.
“끼끼. 왕 첸이 녀석을 섣불리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만, 가만있을 장 슈잉이 아니지.”
그는 양손에 착용한 철제의 클로를 치켜 올리며 의욕을 불태웠다.
키가 150cm 정도밖에 안 돼, 지나가던 어린아이가 신기한 듯이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너 그거 뭐야? 되게 신기하다. 장난감이야? 어디서 살 수 있어?”
“끼익! 꼬맹아! 죽기 싫으면 꺼져라!”
“우아아앙! 엄마아!”
장 슈잉은 어린 소년을 위협하듯이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한국의 김진원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강하다는 소문이 많아. 좀 더 준비해서 가자고.”
울면서 멀어져가는 남자아이를 쳐다보던 장 민은, 시선을 낮춰 장 슈잉에게 말했다.
“끼끼끼! 겨우 세계 랭크 90위권에 있는 놈이 강하다고? 나는 40위권이다! 그리고 너와 내가 스킬을 연계한다면 20위권도 안심할 수 없다고!”
장 슈잉은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장 민에게 비행기표를 예매하자고 졸라댔다.
“자리를 구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그래도 최소한의 계획을 세우자는 말이다. 음? 잠깐.”
장 민은 다리에 매달려대는 장 슈잉을 무시한 채로, 현재 화제가 되고 있다는 전시회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에픽 무기 묠니르를 단 하루, 해외의 관광객들을 위해 24시간 동안 개방 한다라…….”
“끼끼! 멍청한 놈들! 가져가 달라고 광고하는 꼴이 우습다! 이건 기회라고, 장 민! 끼끼끼!”
전시회의 날짜를 확인한 장 민은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장 슈잉을 보고 졌다는 듯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무리 김진원이라도 나와 장 슈잉의 스킬 연계를 쉽게 파훼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운이 좋다면 단번에 에픽 무기만 가지고 빠져나올 수도 있다.’
아무리 세계랭킹 순위가 낮아도, 김진원은 S급 플레이어. 되도록 접전은 피하고 싶었지만…….
“몸을 꿰뚫어 주마! 끼끼!”
장 슈잉을 보면 놈과 싸우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래도 저 묠니르만 어떻게 손에 넣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확 바뀌겠지.’
장 민은 구체적인 작전을 세우기 위해, 장 슈잉과 함께 본거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 뒤로 2일이 지났다.
문명호는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전시회를 연다고 알렸고, 다음 날 아침 9시부터 24시간 동안 세종 문화회관에서 자신의 에픽 아이템, 묠니르를 전시한다는 광고를 했다.
그리고 진원은 현재 서울의 성북구에 위치한 파워 키즈 태권도장 앞에 도착해 있다.
“아오. 왜 이리 찾기가 어려워? 무슨 산골짜기에 틀어박힌다고 하시더니.”
진원은 유아틱한 표지판을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듯이 툴툴댔다.
“다음날이 전시회라 그런지 외국인들이 아주 넘치는구만.”
그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외국인들을 보며 넌더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진원의 얼굴을 확인하고 사인을 해달라니, 같이 사진 찍어달라니, 무기 구경 좀 하게 해달라니.
끈질기게 따라다녔기 때문.
“내일까지만 참자.”
그는 가져온 선물을 한번 쳐다보고, 태권도장으로 들어갔다.
“힘차게 정권 지르기!”
“합!”
“얍!”
가장 앞에서 태권도복을 입고 어린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고재원.
흑색 도포만 입고 있는 모습만 보다가, 검은 띠를 두른 도복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후우. 협회의 정보통이랑 은식이랑 소환수들까지 동원해서 하루가 넘게 걸리다니.’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찾아보니, 스승님이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었을 줄이야.
“다음은 앞차기! 응?”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던 고재원은 진원이 온 것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걸 알았냐는 눈빛이다.
“오늘은 20분 일찍 끝내주도록 하마.”
“진짜요? 관장님 최고!”
“아싸! 피시방 가야지이!”
“너희들, 부모님한테는 말하면 안 된다!”
“네에!”
진원을 잠시 쳐다본 고재원은, 아이들을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도복을 입은 채로 힘차게 밖으로 나갔고, 어느새 도장에는 진원과 고재원만이 남게 되었다.
“스승님,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길래 이렇게 찾기가 힘들어요? 태권도 관장이 본업이셨어요?”
진원은 그를 보며 잘 어울린다고 하면서 실실 웃었다.
“시끄럽다 이 녀석아.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냐.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고재원은 그런 진원을 째려보며 팔짱을 끼었다.
“스승님께 부탁드릴 것이 좀 있어서요.”
“네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느냐?”
현재 자신의 제자는 상당히 강해진 상태다.
거기다 녀석만의 싸움 스타일을 굳혔기에, 자신이 더 이상 간섭해봐야 악영향만 끼칠 터.
‘그런 녀석이 나에게 부탁을 해온다라…….’
뭔가 싶어 들어 보기로 한 고재원은, 이어지는 진원의 말에 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