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차원 퀘스트-4
“벌써 찾았나 보네.”
“김진원! 놈이 성체라면 덩치가 20미터는 넘는다! 일단 저곳에 숨어서······.”
“아니, 괜찮아.”
진원은 자신의 팔을 잡아끌려는 아돌프를 가볍게 떼어내고, 앞으로 걸어갔다.
쿵! 쿵!
그 사이 모습을 드러낸 드레이크는 묵직한 발걸음으로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향해 다가왔다.
“후우······.”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꺼내는 아돌프와는 달리, 진원은 편안한 표정으로 인벤토리를 열어 묠니르를 꺼냈다.
‘저건··· 그의 무기인가? 신기하게 생겼군.’
아돌프가 옆에서 손잡이가 짧은 망치를 감상하고 있는 사이.
“콰우우우!”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드레이크가 입을 크게 벌리며 진원의 소환수들을 쫓고 있었다.
[레드 드레이크]
‘다른 차원이라도 나타나는 정보는 똑같네. 저 정도면 묠니르는 쓸 일도 없겠는데.’
놈의 이름 색이 초록색인 것을 확인한 진원은, 꼬마 디멘션 워커를 제외한 소환수들을 자신의 뒤편으로 위치시켰다.
“디멘션 워커.”
“······.”
끄덕.
진원의 말 한마디에 뜻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인 소환수는, 놈을 마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꼬마 디멘션 워커가 뒤틀린 차원: 메가모프를 사용합니다. MP를 600 소모합니다.]
부가 스킬을 사용한 디멘션 워커의 주위로 균열이 발생했고, 그 틈으로 보랏빛 연기가 새어 나와 순식간에 녀석의 전신을 둘러쌌다.
“크, 크르르?”
자신보다 한없이 작았던 인간의 몸집이 점점 커지자, 당황한 레드 드레이크가 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스스스스.
잠시 후.
근육질 형태의 거인으로 모습을 드러낸 디멘션 워커가 레드 드레이크를 노려보며 자세를 낮췄다.
“크, 크르······.”
10미터가 넘는 놈의 덩치도, 20미터 가까이 되는 몸체를 가지게 된 소환수에게 있어 어린애 수준.
‘강력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는데, 저 정도로 거대화할 줄은.’
진원은 꼬마 디멘션 워커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테스트해보고 싶어, 녀석만 제외하고 다른 소환수들을 뒤로 물린 것이다.
‘저 덩치로 들이박으면 웬만한 놈들은 스턴은커녕 그냥 즉사하겠는데.’
진원이 명령을 기다리는 소환수에게 말을 뱉으려는 순간.
“쿠아아······.”
몸을 살살 떨던 레드 드레이크가 돌연 배를 까뒤집고 지면에 누웠다.
“김진원! 저건 복종의 의미다! 잠깐 멈추어다오!”
“그래? 디멘션 워커, 돌아와.”
놈의 항복 의사를 재빠르게 알아챈 아돌프가 다급하게 진원을 말렸고, 그의 말 한마디에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린 소환수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드레이크가 인간에게 복종한다고?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겠군.’
아돌프는 복종의 울음소리를 내는 녀석을 보고 기가 찬듯한 표정을 지었다.
흉포한 성격을 가진 녀석들은 같은 종이 아니고서야, 저런 행동은 하지 않을 텐데.
“야, 나한테 대가리 깨질래, 아니면 내 말 잘 들을래?”
진원은 레드 드레이크에게 가까이 다가가, 망치로 녀석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쿠, 쿠우우!”
녀석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 그냥 이놈 죽이고 경험치랑 아이템이나 얻을까? 뭔가 아쉬운데.”
“쿠아아아!”
진원이 레드 드레이크를 보며 입맛을 다시자, 녀석은 기겁하며 살려달라는 듯이 울었다.
“기, 김진원! 저 녀석을 죽이는 것보다 길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나!”
“흠, 어차피 너무 커서 데리고 가지도 못하는데.”
“저 녀석이 있다면 쉽게 성벽의 문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거다! 분명히 전력에 큰 도움이 된다!”
장난삼아 가볍게 뱉은 말이었는데, 아돌프가 진원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열변을 토했다.
“알았으니까 얼굴 좀 치워라. 침 튀긴다.”
“고, 고맙다.”
“얌마, 너 잘 할 수 있겠어?”
진원이 레드 드레이크와 시선을 맞췄다.
“쿠아아!”
그러자 녀석을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맡겨만 달라는 듯이 힘찬 괴성을 내질렀다.
“좋아, 그럼 바로 준비하자고.”
진원은 녀석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만 하면 금방 끝나겠는데?’
* * *
늦은 밤.
성벽의 외곽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 둘은, 지루함에 못 이겨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봐, 역시 이번에 새로 임명받은 기사단장님. 뭔가 이상하지 않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그래, 가끔 보면 그냥 이성이 없는 몬스터 같다니까? 전 기사단장 아돌프의 여동생을 자기 방에 가둬놓고 한다는 짓이······.”
“뭐, 뭐야? 궁금하게 하지 말고 빨리 알려줘!”
동료의 재촉에, 주위를 한번 살핀 병사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에 묶어놓고 가만히 바라보더라.”
“지X하네.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그걸 쳐다만 보는 남자가 어디 있냐?”
“아, 진짜라니까! 내가 어제 새벽, 기사단장님께 긴급보고를 하러 갔었다고!”
병사 하나가 답답한 듯 가슴을 작게 치며 말을 이어 나갔고, 그의 말을 듣던 다른 병사는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친 뒤 다시 경계를 위해 고개를 돌렸다.
* * *
같은 시각, 아돌프의 은신처.
진원과 아돌프는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면은 드레이크와 병사들을 앞세워 시선을 끌게 하고, 너와 나는 성안으로 진입. 맞지?”
“그렇다. 그리고 곳곳에 통신용 수정이 있을 텐데, 그것을 먼저 파괴해야 한다.”
진원의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인 아돌프는, 우선적으로 푸른 구 형태의 수정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도사들을 포함해 병력들이 충원되면 꽤 골치 아파질 거다.”
“수정은 몇 개나 있냐?”
“정확히는 모르겠다만··· 비상시를 대비해서 최소 두 개는 있을 것 같군.”
“좋아. 그럼 그거 먼저 처리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없지?”
“그것만 주의하면 된다. 김진원, 너의 힘이라면 충분하다고 믿는다.”
이미 아돌프는 진원을 마음 깊이 신용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인간들에게 물과 식량, 그리고 잘 곳을 베풀어 준 곳도 모자라, 길들인 레드 드레이크까지 건네주다니.
‘이대로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순 없다. 그것을 줘야겠군.’
아돌프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고, 잠시 후 작은 유리병을 꺼내 보였다.
“김진원, 이대로 받기만 하기에는 내가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다. 이것이라도 받아 주었으면 한다.”
“그게 뭐야?”
진원은 길이가 5센티도 되지 않을 듯한 유리병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피라고 하더군.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말한 이유는, 이게 어떤 용도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 같은 기사단에 속해 있는 마도사에게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는데 마도사가 돈 대신 받아달라며 자신에게 건넨 것이 이 검붉은 색을 띠는 피였다고 한다.
“뭔가 속은 느낌이 강하게 들긴 했다만. 그래도 네가 사는 세계에서라면, 뭔가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아돌프가 진원에게 작은 유리병을 건네주었고, 그것을 받은 진원은 인벤토리에서 백과사전을 꺼내 사용했다.
[고대의 피]
고대의 존재에게서 채취된 피. 이대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력한 기운을 머금고 있다.
종류: 비약
등급: 레전더리
효과: 알 수 없음
제한: 연금술사 전용 스킬 필요
“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사기당한 건 아닌 것 같네.”
아돌프가 건네준 아이템의 등급은 레전더리.
걸려 있는 제한만 해제한다면, 분명 강력한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연금술사라··· 적어도 한국엔 없겠는데.’
연금술사는 유니크 등급이며, 해외의 플레이어가 보유한 직업이라고 얼핏 알고 있다.
‘이건 돌아가서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자.’
정보를 확인한 진원이 백과사전을 덮기가 무섭게, 아돌프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역시 당신은 위대하신······.”
“아오, 좀 그만하라니까 그러네. 대장이라는 놈이 왜 이렇게 머리를 숙여? 어쨌든 이건 잘 받을게.”
그를 보며 질린 듯이 한숨을 내뱉은 진원은, 인벤토리에 고대의 피를 집어넣었다.
“아돌프 님! 싸울 준비를 마쳤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잠시 후.
막사 바깥에는, 철제 흉갑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기운찬 목소리를 뱉으며 정렬해 있었다.
허름한 가죽과 날이 나간 무기들은 진원의 도움으로 인해 교체해서인지, 그들의 사기는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쿠아아아!”
“얌마! 너, 나 없다고 해서 이 녀석들 말 안 들으면 알지?”
진원은 그들의 뒤에서 힘차게 포효를 내지르던 레드 드레이크를 노려보았다.
“쿠, 쿠아아!”
그러자 녀석은 움찔하며 알겠다는 듯이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가자.”
“우아아아아!”
“오늘이야말로 동료들의 복수를 하겠습니다!”
진원의 말에, 병사들이 저마다 무기를 높게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들의 수는 50도 안 된다. 반면, 성벽에 있는 기사들은 최소 수천.
그런데도 그들이 이토록 높은 사기를 유지하는 것은, 진원이 보여준 신기한 능력 때문이었다.
“콰우우우!”
거기다가 아군이 된 레드 드레이크까지.
‘오늘이야말로 네놈이 모가지를 날려버리겠다, 반센.’
아돌프는 성벽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 * *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새벽.
“아, 졸려 죽겠다. 너 내일 밤에도 경계냐?”
“그래, 3연속 외곽 경계다. 망할.”
“새끼, 운도 없네.”
성문 위에서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는 병사 둘은, 대화를 나누며 다른 병사들과의 교대를 기다렸다.
두두두두.
“어?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빠, 빨리 병사들 깨워! 반센 님한테 당장 보고해!”
지면이 심상치 않게 진동하자, 눈치 빠른 기사 하나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지만.
퍼억!
“커억!”
갑자기 나타난 정체 모를 인물이 칼자루로 기사의 목을 세게 가격했고, 기사는 목을 부여잡으며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저, 적이··· 컥!”
다른 한 명은 메시아가 복부를 가격해 기절시켰고, 둘은 진원이 지시한 통신용 구슬을 찾기 위해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대로 성문에 들이박아라!”
“쿠와아아!”
아돌프의 명령에, 힘찬 포효를 내지르던 레드 드레이크가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콰지직!
두꺼운 나무로 만든듯한 성문은, 녀석이 가하는 충격을 막지 못하고 힘없이 부서졌다.
“우리를 우습게 봤구나, 반센.”
아돌프는 성벽 외곽에 기사 두 명만을 배치해 둔 것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은, 그만큼 자신들을 우습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빨리 지원을 요청해라! 그리고 반센 님을 깨워!”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기사들은 우왕좌왕하며 통신용 수정부터 찾았다.
“수정이 전부 부서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기사들이 의식을 잃었습니다!”
“뭐라고? 비상시까지 대비해서 세 개나 있단 말이다! 그게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기사는 부하의 보고에 아연실색하며 소리쳤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아무리 그래도 수정 주위에는 10명이 넘는 기사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다.
“30이 넘는 기사들이 쓰러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를 못 채다니!”
그가 성난 듯이 말을 뱉기도 잠시.
뻐억!
“컥!”
기사의 복부에 갑작스런 충격이 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