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지배자의 부름
그러자 고재원의 오른손에 푸른 오라가 진하게 맺혔다.
“헙!”
그리고 그대로 주먹을 움켜쥔 채로, 지면에 힘껏 박았다.
파아아!
그의 주먹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오며 필드를 가득 채웠고 바글거리던 쿤족들 절반 가까이가 고재원과 함께 사라졌다.
“뭐··· 무슨 짓을 한 거냐, 인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지배자 쿤은 진원을 노려보며 답변을 요구했지만.
“알 거 없잖아. 어차피 곧 나한테 뒤질 몸인데.”
진원은 놈의 반응을 보고 실실 웃으며 주머니에서 지배자의 부름을 꺼냈다.
‘이 정도 숫자면 충분하다.’
* * *
“기이!”
“기이이?”
갑작스럽게 다른 장소로 이동된 쿤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딜 보고 있느냐. 여기다! 잡것들아!”
아무것도 없는 황야.
그리고 그 중간에 서 있는 남성, 고재원.
그의 옆에는 6미터가 넘는 광개토대왕릉비의 형태와 유사한 비석에 세워져 있었다.
“음, 정말 오랜만에 사용해보는구나.”
그는 비석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댔다.
“나, 고재원은 패왕의 힘을 원한다.”
우우웅-
그러자 그에 반응하듯 비석에서 검이 하나 빠져나왔고.
“기, 기이이!”
“기이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쿤족은 공포감을 느꼈는지 등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쯧쯧, 1만이 넘는 녀석들이 겁은 많구나.”
이전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모습과 목소리는 사라졌고 190이 넘는 키와 굵직한 목소리, 그리고 전신을 붉은 갑주로 무장한 성인이 혀를 차며 검집을 벗겨냈다.
“한동안 기절 하겠구만.”
그가 보유한 스킬 중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패왕의 영역은 플레이어의 역량에 따라 다수의 적을 고유공간으로 끌어들인다.
“허, 참. 플레이어란 무섭단 말이야. 검 하나 다룰 줄 모르는 내가 이 검을 쥐니, 자연스럽게 베는 방법이 머리에 흘러들어 오다니.”
그는 이 공간에서만큼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특히 광개토대왕이 사용했다고 알려지는 보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진짜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다만. 성능 하나만큼은 완벽하단 말이지.”
검면을 찬찬히 감상하던 고재원은 두 손으로 검을 고쳐잡은 뒤, 심호흡하며 위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스으읍.
“나! 패왕의 이름을 짊어진 자! 등을 보이며 도망치는 왜를 쳐부술지니!”
쉬이이익!
고재원의 횡 베기와 함께 쏘아진 거대한 푸른 빛.
반달 모양의 형태를 갖춘 검기는 도망치는 놈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갔고.
“기이!”
“키이이!”
그것을 본 쿤족은 기겁하며 속도를 높였지만, 이미 고재원의 고유공간에 있었기에 결말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촤아악!
“키아아!”
“기이이이!”
검기는 놈들의 몸통을 자비 없이 두 동강 냈고.
“후우, 정신을 잃을 뻔했다.”
고재원은 땅 위에 서 있는 놈이 한 놈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숨을 돌리며 진원이 건네주었던 포션을 정신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 * *
한편.
지배자 쿤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자신의 양팔을 희생해서 연 포탈.
3만이 넘는 쿤족을 불러들였고, 절대 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절반 가까이가 인간 하나와 함께 사라졌다.’
눈앞의 인간은 분명히 그게 어떤 현상인지 알고 있겠지만, 가르쳐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에겐 1만 7천의 하수인들이 남아있다. 뒤쪽에 빠져있는 2천은 곧 이쪽으로 온다.’
진원은 지배자 쿤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자, 메달을 높이 치켜들고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놈이 더욱 초조해지도록.
“그쪽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안 들어오냐?”
“인간,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그래 보이냐?”
사실 불러낸 놈들이 과연 전투에 도움이 될까, 라는 애매한 느낌이 들었지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사용해야 한다.’
악마 군락의 악마들.
놈들이 얼마나 힘을 되찾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바로 아이템을 사용할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녀석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면 다시 돌려보내면 되니까.’
“나와라!”
진원이 힘차게 말을 내뱉자, 메달이 잠깐 번쩍였고.
스스스.
그의 등 뒤로 검은 포탈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지배자님이 우릴 부르신다!”
“김진원 님을 위하여!”
“와아아아아!”
포탈에서 무기를 갖춘 수많은 악마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놈들. 확실히 단련 많이 했네.’
진원은 녀석들의 몸에 자리 잡은 탄탄한 근육들을 보며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의 비쩍 말라, 힘없어 보이는 악마들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크르르르······.”
“김진원 님! 드디어 저희를 불러주셨네요!”
마지막으로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케르베로스와 활을 든 에레나까지 나왔고.
“이, 인간. 어떻게 나와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배자 쿤은 당혹스러운지 말을 더듬었다.
“알 거 없다니까 그러네?”
놈의 말을 가볍게 받아친 진원은 인벤토리에서 추가로 칠지도를 꺼내고.
“어차피 넌 여기서 뒤져.”
특수 효과를 사용했다.
띠링.
[군주의 힘을 사용합니다. 반경 2킬로미터 이내, 모든 아군의 스텟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30일]
그러자 칠지도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진원은 가만히 명령을 기다리는 악마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아주 단순한 말.
그러나 칠지도의 효과 때문일까.
그를 지켜보던 악마들은 땅이 울릴 듯이 소리를 질러댔고.
“군락의 지배자님을 위하여!”
“김진원 님을 위하여!”
“모조리 죽여라!”
붉은 늑대와 진원의 소환수들을 선두로 해, 저마다 엄청난 기세로 쿤족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아아아!
“기····기이!”
“기이이이!”
악마들의 숫자는 기껏 해봐야 300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쿤족이 도리어 움찔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겁먹지 마라! 내가 보장한다! 우리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그러자 지배자 쿤이 그들을 향해 일갈했고.
“기이!”
“기이이!”
다시 사기를 회복한 쿤족 역시 악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촤악! 푸확!
“우리 곁에는 김진원 님과 붉은 늑대가 있다! 겁먹지 말고 이대로 밀어붙여라!”
“으아아아!”
“크르르르!”
흡사 전쟁터를 연상시키는 광경.
악마들과 쿤족은 서로 뒤엉켜가며 싸워나갔다.
‘확실히. 이 녀석들이 생각보다 강해졌긴 하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길게 끌게 된다면 유리해지는 것은 저쪽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놈들의 수는 1만이 넘으니까.
“너야 양팔이 없으니까 아무것도 못 하겠지만. 나는 아니거든.”
진원은 심연의 마누스를 소환해 쿤족을 최대한 많이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저기 악마들은 같은 편이니까 조심하고.”
홱!
마누스는 역시나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곧 쿤족들에게 접근해 놈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칠지도야 공격력이 상당이 높긴 하지만.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두자.’
혹시라도 적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니까.
치이이.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
“으아아!”
한편.
악마들은 쿤족의 피가 몸에 튀어도 개의치 않고 전투를 이어 나갔고, 뒤에 진원의 소환수들까지 합세하자 놈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말이 안 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다!”
학살과도 같은 장면을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던 지배자 쿤은 절망감에 자신도 모르게 땅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된 이상··· 뒤에 빠져있는 나약한 인간들이라도 죽여버리겠다!’
놈은 미리 빠져있던 2천의 쿤족에게 명령을 내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명의 인간을 처리하라고 지시했지만.
“뾰족아!”
칠지도의 버프 효과를 받고 있는 손하윤과 김수환의 전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박아버려!”
그녀가 크기를 키운 RC카가 몰려드는 쿤족들을 향해 사나운 기세로 들이박았고.
“흡!”
김수환은 스킬: 쉐도우 스톰을 사용해 놈들의 몸통을 꿰뚫어나갔다.
“뻔하다 이 새끼들아.”
일행들이 시간이 벌어주는 사이, 진원은 순간 가속을 사용해 김수환과 손하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진원 씨!”
“오빠!”
“뒤로 물러나 있어!”
“뾰족아! 돌아와!”
그는 마구: 블랙홀을 사용해 놈들을 한곳으로 끌어모은 뒤 이어서 칼날 폭풍으로 스킬에 끌려 들어간 놈들을 휩쓸었다.
“내 하수인들이 죽어 나간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쿤족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고, 어느새 양팔을 잃은 지배자 쿤만이 땅 위에 남아있게 되었다.
“네가 마지막이다.”
상황이 종료된 것을 확인한 진원은 놈을 마무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고.
파앗!
“아이고, 나 죽는다. 제자야, 뒤는 잘 좀 부탁한다.”
그 사이, 스킬을 사용한 고재원이 지친듯한 기색으로 말을 뱉다가 그대로 몸이 허물어졌다.
“붉은 늑대, 스승님을 부탁한다.”
“분부대로.”
진원의 명령에 붉은 늑대가 쓰러진 고재원을 업고 뒤로 물러났다.
꿀꺽. 꿀꺽.
그는 MP 포션을 마시며 놈의 코앞까지 다가갔고, 그 뒤로 수많은 악마가 따라붙었다.
‘저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지배자다.’
지배자 쿤은 마지막까지 기회를 노리며 공격을 시도하려 했지만, 눈앞의 인간과 그를 따르는 악마들을 보며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인간, 너의 하수인들은 단 하나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3만이 넘는 하수인은 모조리 죽었다. 나는 지배자의 자격이 없다.”
“너희들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다.”
진원은 지배자 쿤을 향해 토르의 망치를 힘껏 휘둘렀고.
퐈학!
놈은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가며 뒤로 넘어졌다.
띠링.
[지배자 쿤을 처치하였습니다.]
[337번 행성의 지배자를 처치하였습니다.]
[명예 포인트 50을 획득하였습니다.]
“지배자님!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진원 님 덕분에 저희는 변할 수 있었습니다!”
와아아아!
그 장면을 본 악마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러대며 진원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김진원 니임! 저도 엄청나게 많은 적을 죽였어요!”
“커엉!”
그 사이 진원에게 가까이 다가온 에레나가 칭찬해달라는 듯이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고, 케르베로스도 커다란 머리들을 들이밀었다.
“그래. 고생했다. 너희들도.”
“네! 헤헤. 열심히 연습했어요!”
“헥헥!”
진원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준 뒤, 케르베로스의 머리도 만져주었고.
“오빠! 괜찮아요?”
“진원 씨!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멀리서 뛰어오는 손하윤과 김수환을 보며 피식 웃었다.
* * *
그 뒤, 진원은 군락으로 돌아가는 악마들에게 추가적으로 식량을 건네주었다.
[337번 행성: 0명]
[338번 행성: 4명]
쿤족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확인한 뒤, 포인트 존을 빠르게 점령해 나갔다.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낸 일행들은 간이 텐트에서 순식간에 곯아떨어졌고, 특히 고재원은 10시간이 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스승님이 그런 엄청난 스킬을 가지고 계셨다니.”
진원은 모닥불에 앉아 혹시나 발생할 변수에 대비하며, 이전에 있었던 전투를 떠올렸다.
“저, 오빠······.”
“뭐야, 안 자냐?”
그렇게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던 사이, 왼편의 간이 텐트에서 나온 손하윤이 자신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