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점령전-6
“그, 그게 진짜예요? 할아버지가 광개토대왕의 후손이라고요?”
고재원의 설명을 들은 손하윤은 기가 막힌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저렇게 잘생긴 애. 아니, 할아버지가 위인전에 나오는 그 인물의 후손?’
그녀는 역사책에서 봤던 광개토대왕의 거친 외모를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진원 오빠가 훨씬 잘생겼어. 그런데······.’
자꾸 일행들의 걸림돌만 되니,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 교칙을 어겨서라도 따로 던전에 갈걸······.’
손하윤의 레벨은 겨우 10.
당연히 그녀보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허허. 정확히는 내 직업이, 말이다. 어쨌든 너희들에게 주의할 점을 몇 가지 알려주도록 하마.”
그녀의 반응을 본 고재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지배자 쿤에게 심안을 사용해 얻은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놈은 짧은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는 점멸을 사용한다. 어디에 있든지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거라.”
추가로 놈은 자신의 신체를 검으로 변형시키는 힘을 주로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역시 스승님 심안이 좋기는 해. 하지만······.’
고재원의 심안은 자신이 보유한 백과사전이 캐치하지 못한 정보를 읽었지만.
‘역시 놈의 특수 능력은 심안을 써도 알 수 없는 건가.’
아무래도 신체를 소모해 사용하는 능력의 정체까지는 파헤치지 못한 듯했다.
어쨌든 스승님이 남은 쿤족들을 전부 정리해준다고 하니, 놈을 상대하는 것은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그럼 내일 어떻게 움직일지 정하죠.”
* * *
진원과 일행은 해가 뜨기도 전에, 지배자 쿤이 지정한 장소로 향했다.
“그럼 미리 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부탁드리죠. 붉은 늑대, 너도 같이 합류해.”
“분부대로.”
남은 거리가 1킬로미터 정도로 좁아지자, 김수환이 은신을 사용해 모습을 완전히 감춘 뒤 언덕을 올라갔고 그의 뒤를 실체화하지 않은 붉은 늑대가 따라갔다.
“그럼 우리도 주위를 둘러보죠. 놈들이 매복해 있을 수도 있으니. 마도사, 너도 위에서 상황을 지켜봐라.”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러자꾸나.”
“네.”
진원의 말에 소환의 방에서 나온 소환수가 하늘 위로 올라갔고, 나머지 일행들도 지도를 확인하며 주위를 확인해 나갔다.
* * *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아파트.
협회장 손태욱의 딸인 손하원은 3일째 거실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다.
“아버지! 우리 하윤이 어떡하면 좋아요! 어엉!”
그녀는 자신의 딸이 플레이어 이벤트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 것을 알게 되었고, 별다른 방법 없이 기다려야 된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듣게 되자 하늘이 무너진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하원아, 마음 단단히 먹어라. 우리 손녀는 괜찮을 거다. 하윤이는 날 닮아서 어떤 곳에 던져놔도 잘 적응할 거다.”
손태욱은 흐느끼는 딸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며 최대한 안정시켰다.
“너 그러다가 갑자기 쓰러지면 어떡할 거냐. 3일 동안 잠도 제대로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하윤이가 돌아왔을 때 네 모습을 보면 얼마나 슬프겠냐? 응?”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또한 걱정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손녀가 끌려갔으니까.
“음, 거기다 김진원 씨라고 알지? 얼마 전 S급 판정을 받고, 첫 번째 플레이어 이벤트에서 1등하고 온 사람.”
“김진원···이요?”
자리에서 한동안 훌쩍거리던 그녀는,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얼굴을 들어 손태욱을 쳐다보았다.
“우리 딸이 밥 먹듯이 얘기하던 그 사람··· 맞나요?”
손하윤은 원래도 활기찬 아이였지만,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틈 만나면 자신에게 김진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그럼! 우리 손녀가 그분하고 친하거든. 진원 씨라면 분명히 도와줄 거니까. 마음 차분히 먹고 기다리면 멀쩡하게 돌아올 거다.”
손태욱은 딸이 안정될 기미가 보이자 활짝 웃으며 식사를 권했고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네 곁에 있어 주고 싶은데 도저히 뺄 수 없는 일들이 밀려있다. 미안하다, 딸아.”
“괜찮아요, 아버지. 협회장이시잖아요.”
그는 미안한 기색으로 정장 자켓을 입으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아버지가 나간 것을 확인한 뒤 딸이 돌아오면 환한 얼굴로 맞아주자고 생각하며 식사를 준비했다.
* * *
30여 분 뒤.
김수환과 붉은 늑대는 지배자 쿤을 확인하고 미리 정해둔 집합장소로 돌아왔다.
“진원 씨, 주위를 둘러보고 왔습니다만, 놈 혼자서 온 것 같습니다.”
“이 부근에 기척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주군.”
“그래요. 그럼 미리 정해둔 대로 행동하도록 하고, 바로 가보겠습니다. 콩콩아, 말 잘 듣고 있어.”
진원은 자신의 발치에 있던 콩콩이를 들어 손하윤에게 건네주었다.
“크이······.”
왠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같았지만, 아직 이 녀석은 성장이 더 필요하다.
되도록 위험한 상황은 피하는 것이 좋겠지.
‘뭔가 기분이 찜찜하기는 한데.’
진원과 일행 역시 지배자 쿤이 있는 주변을 탐색했지만 별다른 기척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지배자 쿤이 단신으로 왔다고 결론을 내린 뒤 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드디어 왔다, 인간.”
평야 지대에 꼿꼿이 서 있던 지배자 쿤이 멀리서 다가오는 진원을 확인하고, 팔짱을 풀었다.
“꽤 꼼꼼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것 같던데.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까.”
짧게 대답한 진원은, 인벤토리에서 토르의 망치를 꺼냈고 그의 양옆으로 붉은 늑대와 소환수들이 나타났다.
“크이! 크이이!”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콩콩이가 자신도 가고 싶다는 듯이 손하윤의 품 안에서 발버둥을 쳤지만.
“어허! 이 녀석이! 네 주인을 믿고 가만히 있거라!”
“크이······.”
고재원의 호통에 시무룩해지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괜찮아. 진원 오빠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나중에 크면 못 데려가서 안달일걸?”
“크이.”
손하윤은 그런 콩콩이를 달래주며 진원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오빠가 위험하게 되면······.’
자신이 위험에 처하게 되더라도, 어떡해서든지 도와주겠다고 결심했다.
한편.
지배자 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의 진원을 찬찬히 살피며, 속으로 경악했다.
‘그런데, 인간이 저런 힘을 어디서 손에 넣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전에 대강 놈을 눈으로 훑었을 때도 만만치 않겠다고 판단했지만, 놈의 주위에 있는 부하들을 보니 시간을 길게 끌면 반드시 패배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특수 능력은 최대한 아끼려는 생각이었는데. 어쩔 수 없다.’
지배자 쿤은 자신의 모든 힘을 짧은 시간에 쏟아부어 보고 그래도 눈앞의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못한다면, 자신의 신체를 소모하고서라도 능력을 사용하겠다고 결심했다.
쉬익!
한동안 서로 대치하던 사이, 붉은 늑대가 지배자 쿤과의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둘렀고.
드르르륵!
진원의 소환수가 공중에서 마력탄을 연사했다.
“날카롭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회피하던 놈의 몸이 갑자기 사라졌고, 진원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알고 있다, 이 새끼야.”
당연히 고재원에게 미리 정보를 전달받은 진원은 놈의 점멸을 예측하고 있었고, 빠르게 반응해 놈의 머리를 향해 토르의 망치를 내려찍었다.
“인간, 역시 강하다.”
지배자 쿤은 한 손을 들어 진원의 공격을 막았지만, 곧 엄청난 힘을 느끼고 바로 뒤로 물러났다.
“스읍.”
[붉은 늑대가 스킬: 귀신 태우기를 사용합니다. MP를 500 소모합니다.]
그러나 조금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붉은 늑대가 스킬을 사용했고, 검은 검기들이 지면을 타고 놈의 옆구리를 노렸다.
‘저건 위험하다.’
지배자 쿤은 망설이지 않고 점멸을 사용해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고.
“흐읍!”
그사이 빠르게 반응한 진원이 놈이 나타난 방향을 향해 마구: 블랙홀을 사용했다.
스스슷-
“크으…….”
엄청난 흡입력에 끌려 들어간 지배자 쿤은, 몰아치는 공격을 막기 위해 주위에 배리어를 둘렀다.
‘바로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엄청난 연계에 정신없이 회피만 하던 지배자 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의 신체를 소모시켰다.
“나의 하수인들이여. 행성의 모든 쿤들이여! 나를 도와라!”
지배자 쿤은 자신의 신체를 소모하는 대신, 거리에 상관없이 장소를 이어주는 포탈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놈이 눈가에 핏대를 세우고 큰 목소리로 외치자, 오른팔이 녹아 사라졌고.
스스스스.
허공에 거대한 포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게 놈이 가지고 있는 능력인가.’
무슨 능력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진원과 소환수들은 일단 놈과 거리를 뒀다.
“기이!”
“기이이!”
잠시 후.
검게 빛나는 포탈에서 수많은 쿤족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놈은 아직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왼쪽 팔을 추가로 소모시켰고.
“기이이!”
“기이”
두 개의 포탈에서는,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듯이 쿤족들이 엄청난 기세로 나타났다.
“이런 X발… 미친놈인가.”
그 장면을 지켜보던 진원은 어이가 없는지 욕을 뱉었다.
[337번 행성: 32,340명]
‘4명으로 3만 명을 넘게 상대해야 한다고?’
거기다 쏟아지는 쿤족 중에는 푸른 피부와 붉은 피부를 가진 놈들도 섞여 있었다.
‘마누스를 소환한다고 해도··· 2분 남짓이다.’
진원은 어느새 터져나갈 듯이 가득 찬 평야를 보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고.
“인간, 역시 아무리 강해도 이 정도의 수에는 이기기 힘들겠지.”
지배자 쿤은 그런 진원을 보며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이로써 나는 전투능력을 상실했지만, 상관없다. 내가 죽으면 행성의 모든 쿤족들이 소멸한다.’
놈은 진원의 표정을 보며 자신의 능력이 통한 것 같아 안심했고, 바로 쿤족에게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제자야!”
멀리 떨어져 있던 고재원이 몸을 날려 진원에게 다가갔다.
“포션들을 있는 대로 다 주거라. 어서! 내가 최대한 이놈들을 많이 끌고 가보마.”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고재원은 황급히 진원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류를 최대한 고재원에게 건네주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진원은 인벤토리 구석에 박혀 있는 아이템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게 있었구나. 끄트머리에 박아놔서 알아차리지 못한 건가.’
그는 아이템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고 고재원이 스킬을 먼저 사용하길 기다렸다.
“키이!”
“기이이!”
그동안 수많은 쿤족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사나운 울음소리를 냈고, 지배자 쿤은 그들을 진정시켰다.
“인간들, 난 자비롭다. 죽기 전 대화를 나눌 시간 정도는 주겠다.”
그들이 급한 기색으로 아이템을 주고받은 것을 지켜보던 지배자 쿤은, 승리를 확신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허어, 고약한 놈이. 네놈이 뱉은 말도 지키지 못하다니.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한번 보도록 하마.”
놈의 표정을 보던 고재원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스킬: 패왕의 영역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