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점령전-4
“손하윤 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 아저씨! 지, 지금 저한테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여기서 최대한 멀리 이동하겠습니다. 눈을 감아주세요.”
“네? 어떻게······.”
김수환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고 중립 몬스터, 어스 오우거가 위치했던 지점으로 움직였다.
“키이!”
“키이이!”
쿤족들은 김수환과 손하윤이 땅으로 꺼지는 것을 보자 한 명을 제외하고 바로 장소에서 모습을 감췄다.
* * *
진원의 소환수가 공중에서 일행들을 찾는 동안, 그와 고재원은 간이 텐트가 위치한 장소로 향했다.
“좀 비켜 이 새끼들아!”
“기이이!”
“기이!”
자신들의 위치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쿤족이 하나둘씩 나타나 진로를 막아섰다.
진원은 토르의 망치를 꺼내 놈들에게 휘둘러대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망할 놈들이. 약한 쪽부터 공략하겠다, 이건가.’
놈들은 어떻게든 진원과 고재원을 잡아두려는지,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
‘이놈들의 수는 이제 2,700도 안 남았을 텐데. 위기감을 못 느끼는 건가?’
쿤족은 방금 전, 어스 오우거와의 전투에서 400명 가까이 죽어 나갔다.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줄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놈들은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이 몸을 던져가며 자신과 스승님에게 달라붙었다.
“제자야, 좀 더 빨리 가자꾸나. 이놈들이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을 보면, 저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구나.”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고재원은 놈들을 뒤편으로 집어 던지며 더욱 속력을 높였고, 진원도 그를 따라서 다리에 힘을 실었다.
* * *
지도의 중앙부근에서 숨을 몰아쉬며 쿤족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남성, 박민석.
“기이이!”
“허억! 헉!”
그는 말년휴가를 앞두고 있던 군인이었다.
“헤엑! X발!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손을 들어 이마를 닦으며 뒤를 돌아보면, 노란 피부를 가진 쿤족들이 괴성을 지르며 자신에게 달려오고 있다.
“망할! 주위에 몬스터들 시체가 있어서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는데!”
박민석은 최대한 안전하게 생존하기 위해, 험하고 가파른 비탈이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혼자서 고민해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레벨 1에 아무 스킬도 없다고··· 그냥 평범하게 살려고 했는데!”
그는 플레이어로 각성했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로 하고 병역의 의무를 마치기 위해 성실하게 군 생활에 임했다.
“X바알··· 말년 휴가 갔다 오고 나서 다음 날이 바로 전역인데! 해외여행 일정까지 다 잡아놨는데! 후욱!”
박민석은 쫓아오는 놈들을 떼어놓기 위해 이를 악물고 내달렸지만.
“어억!”
굵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기이이!”
“사, 살려주세요! 제발!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박민석은 기겁하며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전 맛없습니다! 제 몸에는 지방이랑 콜레스테롤밖에 없습니다! 먹으면 확실하게 병이 올 겁니다!”
“기이.”
그런 박민석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쿤족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고.
툭.
그의 눈앞으로 작은 돌멩이를 하나 던져주었다.
“이, 이건 또 무슨······.”
“기이이!”
“힉! 알겠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영문도 모른 채로 눈을 깜빡이던 박민석은 성을 내는 쿤족을 보며 눈치껏 새하얀 돌을 집어 들었고.
[인간. 네놈에게 살 기회를 주겠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갈라지는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박민석은 명령을 수행한다면, 목숨을 살려준다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고.
“기이이.”
그런 박민석의 모습을 본 쿤족들은,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 시작부터 도망 다녔는데 이제는······.”
뒤통수까지 치라니.
박민석은 멀어져가는 쿤족들을 보며, 결정을 내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새하얀 돌을 강하게 쥐었다.
‘정말 쓰레기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나에게 있어서 타인이다. 우선 나부터 살고 봐야지.’
그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고, 다른 플레이어들을 찾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진원과 고재원이 간이 텐트가 있는 장소로 도착하기 무섭게, 푸른 피부를 띤 쿤족이 손톱을 치켜세우고 돌진해왔다.
“키이이!”
“이놈은 또 뭐야?”
놈은 다른 쿤족들과 다르게 엄청난 민첩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민첩 스텟이 80인 진원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헙!”
쿤족이 진원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고재원이 놈의 뒤로 접근했다.
그는 주먹으로 놈의 옆구리를 힘껏 가격했고.
“키아아!”
놈이 괴성을 지르며 땅에 한쪽 무릎을 꿇자마자 팔을 휘감아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제자야!”
“뒤져!”
진원은 놈을 향해 와인드업 하고 토르의 망치를 던졌고.
“스읍.”
[붉은 늑대가 발도: 추격을 사용합니다. MP를 50 소모합니다.]
그사이 실체화한 붉은 늑대가 검기를 날렸다.
[쿤족을 처치하였습니다.]
“후, 망할 놈들. 골드라도 주지.”
진원은 놈이 푸른 피를 쏟으며 죽은 것을 확인한 후, 고재원과 함께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아무래도 김수환 씨랑 하윤이는 이놈 때문에 도망간 것 같네요.”
“그래. 분명히 합세해서 공격했을 테지.”
고재원이 놈의 시체를 살펴보는 도중, 진원은 탐색을 진행하던 마도사에게 일행들을 발견했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찾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상황파악을 마친 진원은, 고재원과 함께 지도를 보며 어디부터 일행들을 찾아 나가야 할지 의논했지만.
“키이이!”
“키이!”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놈들이 저마다 나무 위에 올라타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하. 진짜 징하네, 이 새끼들은.”
“흠,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구나.”
진원의 짜증 나는 말투에 고재원이 동의한다는 듯이 대답하며 주먹을 어루만졌다.
‘이놈들을 보면, 분명히 다른 놈들도 있을 거다.’
푸른 피부색을 가진 놈들은, 기존의 노란 피부를 가진 쿤족보다 훨씬 날렵했으며 방금 전과 같이 무작정 달려들지 않았다.
“키이!”
놈들은 진원과 고재원을 한동안 내려다보았고 한 놈이 손짓하자, 일제히 나무를 타고 장소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것 같냐!”
당연히 등을 내보이며 무방비하게 도망치는 쿤족을 가만히 놓아둘 리 없던 진원은 와인드 업 하고 마구: 칼날 폭풍을 사용했고, 고재원 역시 놈들을 향해 기탄을 마구 쏴댔다.
“키이이!”
“키이!”
자신들의 날렵함을 믿고 장소를 벗어나던 놈들에게 마구에서 사출되는 수많은 단검과 고재원의 기탄이 쇄도했지만, 꼬마 마도사의 보고대로 마법 스킬은 별 효과가 없는 듯했다.
“허어.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몸놀림이구나.”
‘이놈들의 목적이 뭐지? 정찰인가?’
진원이 멀어지는 쿤족을 보며 찜찜한 기분을 느끼는 도중, 일행들을 찾은 꼬마 마도사가 위치를 알려왔다.
‘주인님! 찾았습니다! 말씀하신 인간들은 어스 오우거의 시체 주위에 있습니다!’
‘그들한테 붙어서 도와주고 있어라!’
‘맡겨만 주십시오!’
진원은 곧바로 미니맵을 확대하며 고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일행들이 있는 장소를 알아냈습니다.”
“그러냐? 그래서 이놈들이 어디에 있더냐?”
“우리가 방금 전에 잡은 중립 몬스터 근처에 있답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고재원이 표정을 구겼다.
“허어. 무슨 똥개 훈련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럼주 한 병 더 드리겠습니다.”
“어서 가자꾸나, 제자야. 일행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르니.”
그러기도 잠시.
진원의 말 한마디에, 입맛을 다시던 고재원이 앞장서며 지도의 중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놈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스킬을 사용한 김수환은, 어스 오우거의 시체 바로 옆으로 이동했다.
“꺄악! 깜짝이야!”
그의 지시로 눈을 감고 있었던 손하윤은, 주위의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고 뒷걸음질 치며 비명을 질렀다.
“쉿! 조용히!”
“죄, 죄송해요. 아저씨.”
김수환은 그녀를 보며 조용히 다그쳤고 빠르게 고개를 돌려가며 주위를 훑었다.
‘음, 주위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아니. 잠깐.’
주변을 살펴보던 김수환의 시선이 50미터쯤 떨어진 나무로 고정되었고, 뒤편에서 느껴지는 기척 하나에 망설이지 않고 그림자를 끌어올렸다.
쉬이익.
날카로운 형태를 갖춘 그림자가 목표를 향해 쇄도했고.
“아아악! 잠깐! 잠깐만요!”
나무 뒤로 다급한 기색의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저씨! 저 사람 몬스터 아니에요!”
그의 옆에 있던 손하윤이 재빠르게 김수환의 옷깃을 잡으며 그만두라고 말렸다.
잠시 후.
군복을 입은 남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면 1초만 늦었어도 그림자가 그의 목을 꿰뚫어 버렸을 것이다.
‘음, 이벤트 시작과 동시에 도망쳤던 놈이군.’
김수환은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그림자를 거뒀고.
“으으…….”
다리를 후들거리던 남성은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군인 아저씨,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요?”
점령전을 시작하자마자 빠르게 도망친 그를 좋은 시선으로 봐줄 리가 없는 그녀는, 날카로운 말투로 박민석을 향해 말했다.
‘되지도 않는 이유라면. 팔다리 몇 개를 분질러 버려야겠군.’
그것은 김수환 역시 마찬가지.
손하윤을 대할 때와는 다르게 박민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김수환은 그녀가 진원을 향해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확인했기에 최대한 잘 대해주는 것이었다.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 시간을 끌어라. 3분이다.]
눈알을 굴리던 박민석은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침을 꿀꺽 삼키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자신이 군 복무 중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의 레벨이 1이라고 말하며 거듭 사과했다.
“저, 전역까지 40일도 안 남았습니다! 어떻게든 살고 싶은 욕구가 커져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 같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후, 그만 됐다.”
그의 말을 듣던 김수환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저놈은 우리 중에서 가장 운이 없는 놈이군.’
그 역시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이었고, 박민석이 말하는 상황을 들어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군인 아저씨··· 그냥 저희랑 같이 다녀요. 제가 오빠한테 잘 얘기해 볼게요.”
박민석의 하소연을 들은 손하윤 또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다독였다.
[3분이 지났다. 인간, 약속대로 네놈은 살려주지.]
어느덧 3분이 지났는지 박민석의 머릿속으로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빠르게 주머니를 뒤적거려 새하얀 돌을 바닥에 내려두고 뒤로 물러났다.
“아저씨, 그건 또 뭐예요?”
“어이, 멋대로 움직이지 마라!”
손하윤과 김수환의 시선이 작은 돌멩이에 향하자 돌에서 백색의 빛이 강렬하게 번쩍였고, 그들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