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고재원-2
이른 아침.
김수환은 딸과 함께 근처의 공원을 찾았다.
“아빠! 나 이제 저기까지 뛰어가도 하나도 안 힘들다?”
“천천히 가, 수진아. 그러다 다쳐요.”
“네!”
그는 활기차게 앞을 향해 달려가는 딸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수진이는 희석된 엘릭서를 먹은 뒤로 단 한 번도 아프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다며 틈만 나면 밖에 나가자고 자신을 졸라댔다.
‘이제 슬슬 돈을 모아야 할 텐데…….’
한동안 딸을 더 지켜보다가, 상태가 괜찮으면 학교에 보낼 생각을 하던 그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으기로 했다.
‘예전처럼 더러운 짓은 그만해야겠어.’
과거에는 특정 인물들을 은밀하게 암살하거나, 비싸 보이는 장비를 두르고 있던 플레이어들을 노려 돈을 충당했지만.
‘이젠 수진이도 괜찮고, 그가 준 희석된 엘릭서도 여유분이 있으니.’
자신은 이미 레드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되도록 지양해야 한다.
‘굳이 던전이 아니더라도, 이 능력을 써먹을 방법은 많을 거다. 응?’
천천히 공원을 걷고 있던 그의 눈에 흑색 도포를 입은 은발의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아침부터 산책 나온 거니? 사탕 하나 줄까?”
은발의 남성, 고재원은 환하게 웃으며 수진이에게 왕사탕을 하나 건네주었다.
“응! 근데 오빠 옷이 되게 신기해. 책에서 본 저승사자 같아!”
수진이는 의심 없이 사탕을 입에 넣고, 고재원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냐? 그런데 나는 저기 있는 험악하게 생긴 아저씨보다 나이가 많은데, 할아버지라고 불러주겠니?”
“할아버지? 왜?”
그녀가 사탕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이.
“수진아! 뱉어! 아빠가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 함부로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
그 장면을 본 김수환이 빠르게 달려와 그녀의 입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맛있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사탕을 뱉으려고 하자, 고재원이 입을 열었다.
“어허! 내가 그런 짓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더냐? 김수환.”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그의 말에 흠칫한 김수환이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았다.
“흠, 이거 참. 보자마자 몸에 구멍을 뚫어 주려고 했는데.”
그는 실실 웃으며 수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딸내미가 있었을 줄은 몰랐구나.”
“···도대체 넌 누구냐?”
“아, 아빠 괴롭히지 마세요!”
김수환의 인상이 험악하게 물들자, 수진이는 그의 앞에 서서 팔을 넓게 벌렸다.
“안 괴롭혀, 요 녀석아.”
고재원은 수진이의 볼을 귀엽다는 듯이 가볍게 꼬집어 주고, 김수환의 앞으로 다가갔다.
‘도대체 누구냐. 이놈은.’
겉으로 보면 자신과 체격 차이가 상당했지만, 김수환은 눈앞의 남자아이를 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섣부른 짓을 했다가는······.’
분명히 죽는다. 자신의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 딸이 너를 살린 거야, 이놈아.”
김수환에게 가까이 다가간 고재원은, 그의 주머니를 뒤적거렸고, 작은 호리병 하나를 찾아냈다.
“흠, 이놈 때문에 꽤 고생했었지.”
“그, 그건 어떻게?”
파삭!
고재원은 손바닥보다 작게 줄어든 호리병을 부쉈고, 김수환이 놀랄 틈도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무슨······.”
“아빠, 저 오빠 누구야? 되게 만화에 나올 것처럼 생겼다!”
그가 벙찐 표정을 짓던 사이, 수진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 * *
같은 시각.
진원은 행운의 랜덤 아이템 박스에서 나온 직업체험권을 판매하기 위해 플레이어 거래소에 들렀다.
‘직업체험권은 이제 필요 없으니. 팔아서 스킬을 사는 데 보태야겠어.’
“어서 오세요~ 김진원 씨. 한동안 안 오셔서 섭섭했습니다.”
거래소의 여직원이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며 인사해온다.
“그동안 조금 바빠서요. 아이템을 하나 팔려고 하는데요.”
“네, 그런데··· 형태가 특이하네요.”
티켓 같은 종이를 건네받은 여직원은, 아이템의 효과를 확인했다.
[유니크 직업 체험권: 폭탄마]
24시간 동안 자신의 직업을 폭탄마로 변경합니다. 시간이 만료된 후, 본래의 직업으로 변경됩니다.
“이, 이거 어디서 얻으셨나요? 유니크 직업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니······.”
“적당히 던전 클리어하다가 주웠습니다.”
“······.”
그녀는 어안이 벙벙한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지난번 희석된 엘릭서도 그렇고, 도대체 뭐하시는 분이지?’
그가 가끔 가져오던 아이템 중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 섞여 있었으며, 대부분 엄청난 가격을 자랑했다.
당연히 돈 냄새를 맡은 거래소 측에서도, 엄청난 자금을 들여 정보를 긁어모아 봤지만.
‘괜히 정보료만 날렸어. 특별한 퀘스트라도 있는 걸까?’
“경매 시작가를 100억으로 해도 될까요?”
“아, 네! 시간제한이 있는 아이템이지만, 많은 사람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겁니다.”
진원의 말에, 정신을 차린 여직원이 아이템을 등록했다.
“협회장님한테서 S급 던전 입장 승인만 받으면, 곧바로 가야겠다.”
서류 작성을 끝내고 차로 향하던 그의 등 뒤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자야.”
‘뭐지? 나를 부른 건가?’
등을 돌려보니 흑색 도포를 입은 남자아이, 고재원이 서 있었고 자신을 보자 실실 웃었다.
“나?”
“그래, 네놈 말이야. 스승을 봤는데도 어서 인사를 안 하고! 성격은 여전하구나!”
‘스승? 스승이라.’
아주 가끔, 무의식적으로 스승 고재원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거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적이 있었다.
그 현상은, 분명히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기억일 것으로 생각했다.
‘나올 때 관련된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안 했나? 내가 어떻게 떠올렸던 거지?’
하지만 그때마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을 받아, 그 이후로는 흘려 넘겼었는데.
‘그런데 도저히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그래도 눈앞의 조그마한 초등학생 수준의 남자가 자신의 스승일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냥 가라.”
진원은 인상을 쓰고 말하는 남자애의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자.
쉬익!
전조 없이 그를 향해 푸른 기탄이 쏘아졌고, 진원은 고개를 살짝 돌려 기탄을 회피했다.
“이 새끼, 플레이어냐?”
“허어, 제자야. 네놈··· 상당히 강해진 것 같다?”
진원이 열 받은 표정으로 고재원을 바라보자,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랑 한판 하자꾸나, 제자야.”
“지X하고 있네.”
* * *
그 뒤로 둘은 플레이어 대련실을 찾았다.
웬 플레이어 하나가 스승을 자처하며 자신을 공격했을 때는 순간 욱했지만.
- 나를 이기면 아일랜드에서 있었던 기억을 복구시켜주마. 그리고 아이템도 하나 주도록 하마. 물론 완전하게 힘을 되찾은 나를 이길 리가 없겠다만. 껄껄!
기억을 되돌리는 특별한 업적을 달성하고, 추가적으로 아일랜드 아이템을 가지고 나왔다는 말에 일단 믿어 보기로 한 것.
“이겨놓고 나중에 구라면, 아무리 애라도 대가리 깨버린다.”
“어허! 스승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고재원은 험한 말을 내뱉는 진원을 보면서, 내심 뿌듯해했다.
‘사실은 바로 너의 기억을 돌려놓을 수도 있다만.’
지금 기회가 아니면, 언제 제자와 붙어보겠나.
‘허어···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엄청나게 성장했구나.’
심안을 사용해 진원의 상태 창을 열람한 고재원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나도 온 힘을 다 해야겠구만.’
어느새 마주 보고 선 둘.
“얘들아.”
진원의 말에 붉은 늑대와 메시아를 비롯한 소환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봐줄 필요 없다.”
“분부대로.”
[알았어.]
“맡겨주십시오, 주인님!”
“키긱!”
진원은 청소년을 포함한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제법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까 전의 그 공격은, 다짜고짜 자신의 머리를 노려왔다. 그것도 죽일 기세로 말이다.
‘너는 진짜 안 봐준다.’
“호오. 뭔가 더 많이 는 것 같구나. 먼저 시작하거라. 스승이니 양보해주도록 하마.”
그의 소환수들을 둘러보던 고재원은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으며 스킬: 패왕의 투기를 사용했다.
스스스-
그의 몸에서 푸른 오라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사용해보는 스킬이군. 이 느낌, 그리웠다.’
그동안 봉인의 호리병에 스킬 대부분이 갇혀 있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그였다.
지속시간 10분에, 재사용 대기시간 10분.
거의 무제한으로 발동할 수 있는 패왕의 투기는, 사용자의 모든 스텟을 30퍼센트 상승시키며 엄청난 내구력을 지니게 된다.
“광개토대왕 후손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마.”
“됐고. 빨리 끝낸다.”
진원은 자리에서 와인드업하고, 마구: 칼날 폭풍을 사용했다.
“흡!”
드드드드.
형태를 갖춘 검은 단검들이 고재원을 향해 쇄도했고.
“오오.”
그는 재밌다는 얼굴을 하며 팔을 들고 얼굴을 방어했다.
드득. 드득.
단검들은 고재원의 전신을 향해 세차게 쏟아졌지만.
“음, 조금 아프긴 하구나.”
그의 볼과 손에 생채기가 생겼을 뿐이었다.
“얘들아!”
그 장면을 본 진원은, 곧바로 소환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면에서 그대로 받아냈다고?’
자신이 가진 스킬 중에서 강력한 공격력을 자랑하는 마구를?
쉬익! 드르르륵.
붉은 늑대와 메시아가 앞뒤로 고재원을 공격했으며, 잠시 틈이 생기면 진원과 꼬마 마도사가 마구와 마력탄을 연사했다.
“허어, 꽤나 귀찮긴 하구나. 내가 공격할 틈도 안 주는구만.”
서로 말없이 공방을 주고받길 20분가량.
민첩한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던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거, 내가 나이를 먹어서 오래 끌면 안 되겠다.’
“헛?”
“키긱!”
이리저리 소환수들의 공격을 피하던 고재원에게, 뒤로 빠져 기회를 노리고 있던 임프가 그의 몸을 휘감았고.
[붉은 늑대가 발도: 추격을 사용합니다. MP를 50 소모합니다.]
[메시아가 다크레이를 사용합니다. HP를 300 소모합니다.]
그사이 붉은 늑대와 메시아가 스킬을 사용했다.
‘이러다가 진짜 큰일 나겠구만.’
적당히 패왕의 투기만 사용해 제자를 놀리려고 했지만, 녀석이 너무 강해졌다.
‘거기다 뒤에서 쉬지도 않고 요상한 공을 던져 대다니.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
고재원은 흡족한 표정을 짓다가, 눈을 부릅뜨고 스킬: 패왕의 분노를 사용했다.
“갈!”
푸른 충격파가 그의 전신으로부터 퍼져나갔으며.
“크윽!”
[모, 몸이 안 움직여, 진원.]
소환수들은 그 자리에서 굳어졌다.
“허어, 이것들이 조금씩 움직이다니.”
고재원은 움찔대는 소환수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최대 10초 동안 범위 안의 모든 생명체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그의 스킬은 효과도 강력했지만 하루에 단 두 번 사용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자야. 너는 이제 나만큼 강해진 것 같구나.”
당연히 진원 역시, 그의 스킬을 피해갈 수 없었지만 단 3초 만에 몸을 다시 움직였다.
‘음. 내가 30년만 더 젊었어도,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
고재원이 아쉽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털자.
“너 이 새끼, 뭐 하는 놈이냐?”
진원은 심연의 마누스까지 사용할 생각을 하며, 고재원을 향해 말을 걸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제자야. 네놈 스승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