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심연의 마누스
“가자.”
“네!”
특수 던전인 연옥은 다른 파티원이 해당 포탈 안에 들어간 상태여도 조건 없이 난입할 수 있었다.
‘협회장의 부탁이 있으니 살아 있으면 도와야 주겠다만…….’
몇 명이나 생존했을지는 일단 들어가 봐야 아니까.
“조심히 다녀오세요, 손님! 끄엑!”
뒤로 한 발자국 떨어져서 손을 흔들던 관리자는 실체화한 붉은 늑대에게 목덜미를 붙잡혔고,
“크이이이!”
그의 발 근처에 있던 콩콩이가 어림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내 팔자야. 괜히 인간 하나를 잘못 건드려서.’
관리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보스 방으로 향하는 포탈에 몸을 맡겼다.
**
진원이 보스방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처참한 광경들.
“형, 여기 있는 분들…….”
최은식은 눈살을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예상은 했었는데, 다 죽었네.”
힐데의 길드원들 중 살아남은 플레이어는 없었다.
대다수가 처참하게 몸이 꿰뚫리거나, 날카로운 날붙이로 전신을 난자당한 상태.
“은식아, 관리자 데리고 뒤에 빠져 있어. 콩콩이 너도.”
“네.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말씀하세요!”
“크이이!”
“저놈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공격하지는 않을 겁니다.”
최은식은 혹시나 있을 상황을 대비해 방패를 치켜들고 서서히 뒤로 물러났고, 관리자는 불안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놈이 보스네.”
진원은 중앙에 앉아 있는 몬스터로 시선을 옮겼다.
[해머왕]
화려하게 빛나는 에메랄드 갑주로 전신을 무장한 녀석의 왕좌 옆에는 커다란 망치가 하나 세워져 있다.
망치라기보다는 장도리와 유사한 형태의 무기.
[해머왕]
설명: 연옥 1층의 보스 몬스터.
-공략 포인트: 녀석을 공격하려 하면, 사방에서 무기를 든 기사들이 생성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빠르게 나타나므로, 보스를 짧은 시간 안에 처리하는 것이 좋다.
- 레벨: 60
- 신뢰도: 80 퍼센트
‘그렇단 말이지.’
몬스터 백과사전으로 보스의 정보를 확인하고, 붉은 늑대와 메시아를 비롯한 소환수들을 배치했다.
가만히 앉아 진원을 바라보던 해머왕은 그의 표정을 읽었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옆에 세워 둔 망치를 잡았다.
“새로운 스킬을 시험해 보려고 하니까 일단 뒤에서 기다려.”
“분부대로.”
[알았어.]
진원은 바로 새롭게 획득한 스킬을 사용했다.
‘심연의 마누스.’
HP와 MP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며 지면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지면에서 검은 갑주로 온몸을 무장한 마누스가 지면 위로 서서히 올라왔고, 고개를 돌려 진원의 눈을 응시했다.
바닥까지 닿을 듯한 망토와 함께, 투구는 절반만 가려져 있어 코와 입만 보이는 상태.
‘인간형이네. 그런데 생긴 게…….’
여성형인가? 키도 나보다 작고. 덩치도 그렇고.
‘일단 녀석의 능력을 보자.’
진원은 가만히 서 있는 녀석을 향해, 해머왕을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홱.
그러자 마누스는 내키지 않는다는 기색을 풍기며 해머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후. 그래도 말은 듣네.’
지배력 스텟이 낮다는 알림이 있었지만, 다행히 우려할 만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기사들이여, 공격해라!”
보스가 망치를 들고, 마누스를 가리키자…….
스스스-
놈의 뒤에서 창이나 검을 든 기사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움찔. 움찔.
해머왕의 병사들은 마누스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공포에 질린 듯이 몸을 떨었다.
“병사들이여, 다시 한번 명령한다! 공격해라!”
해머왕이 병사들을 향해 일갈하자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녀석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고, 다시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 불어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뒤에 빠져 있던 관리자는, 순식간에 불어나는 기사들을 보고 경악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최은식이 허둥대는 관리자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걸 봐라, 인간!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기사들이 엄청난 속도로 모여들고 있다고! 원래는 저럴 리가 없는데!”
“괜찮아요. 전 형을 믿습니다.”
“아니, 인간! 눈앞의 보스를 처리하지 않으면, 병사는 계속해서 불어난단 말이다!”
최은식의 담담한 반응에, 관리자는 발을 동동 굴러 댔다.
“조용히 좀 있어 봐요. 지금 딱 촬영하기 좋은 구도거든요.”
‘이놈도 정상이 아니잖아!’
그는 방패를 내려놓고, 조용히 카메라를 들었다.
“왕을 지켜라!”
“우아아아아!”
엄청나게 불어난 병사들이 죽일 기세로 마누스를 향해 돌진했다.
놈들은 저마다 힘찬 고함을 내지르며 마누스를 향해 창을 힘껏 뻗었다.
스스슷.
그 순간 마누스의 전신에 검은 오라가 진하게 피어올랐고, 마누스는 오른팔을 들어 허공을 휘저었다.
쉬이익. 쉬익.
그러자 허공에서 연기의 형태를 갖춘 검은 기운들이 생성되었고, 그 기운들은 병사들의 몸을 순식간에 휘감고 으스러뜨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
“으아아아!”
마누스가 팔을 한 번씩 휘저을 때마다 필드를 가득 메운 병사들이 절반가량 휩쓸려 나갔다.
“……진짜 세네.”
진원은 일방적인 학살과도 같은 장면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명예 포인트를 150이나 요구하길래, 얼마나 대단한 스킬인가 싶었는데.
“이거 내가 따로 움직일 필요도 없겠는데.”
뒤에서 관리자가 몬스터들이 너무 빠르게 생성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마누스가 기사들을 처리해 나가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랐다.
‘녀석의 소환 시간은 2분 정도였나.’
1분 30초 만에 필드의 절반 가까이 채운 기사들을 정리한 마누스는 무기를 들고 달려드는 해머왕을 향해 발을 한 번 굴렀다.
“커억.”
그러자 지면에서 칼날 형태의 검은 기운이 솟아나 해머왕의 몸통을 꿰뚫었고, 마누스는 천천히 해머왕에게 다가가 놈의 투구를 잡고 서서히 우그러뜨렸다.
기기긱. 기긱.
다 마신 음료수 캔을 찌그러트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놈의 몸에서 머리를 떼어낸 마누스는 형체조차 남아나지 않은 투구를 들어 보이며 명령을 수행했다는 듯이 진원을 쳐다보았다.
“수고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환 시간이 끝났는지 지면에서 검은 쇠사슬이 나타나 마누스를 속박하고 밑으로 끌어들였다.
“저, 저 소름 끼치는 녀석은 도대체 뭐냐, 인간!”
“형의 새로운 스킬인 것 같은데…… 어, 엄청나다.”
그 광경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관리자는 공포에 질린 듯 몸을 덜덜 떨었고, 최은식 역시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띠링.
[보스: 해머왕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항마력이 영구적으로 20 상승합니다.]
[명예 포인트를 30 획득하였습니다.]
[차원의 조각을 발견하였습니다!]
[스킬 포인트 캡슐을 발견하였습니다!]
[상점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이 룸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연옥 1층을 클리어했습니다!]
랭크: A
추가 보상: 상급 마정석 1개
[귀환 포탈이 생성됩니다.]
‘차원의 조각이랑 스킬 포인트 캡슐을 한 번에 준다고?’
캡슐이야 그렇다 쳐도 연옥 1층을 클리어했을 뿐인데, 벌써?
관리자는 진원이 손에 들려 있는 차원의 조각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저 아이템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여기 있는 인간들이 알 리가 없지.’
진한 붉은 빛을 띄며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길이를 가진 차원의 조각은 강력한 장비나 무기들을 제작하는 것에 있어 필수적인 재료.
‘저것을 사용해 아이템들을 만들면, 보다 강력한 성능과 함께 항마력 상승 옵션이 붙는다.’
관리자조차 그동안 차원의 조각을 실제로 본 적은 꽤나 드물었다.
관리자가 뒤에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와중에 진원은 무표정으로 아이템들을 응시했다.
‘별 감흥이 들진 않네.’
이계 던전, 연옥 1층의 해머왕을 처치하긴 했지만.
소환수가 너무나도 쉽게 보스를 죽여서 그런 것일까, 만족스러운 느낌은 덜했다.
진원이 아이템의 정보를 읽고 있던 사이.
“크이이이!”
멀리 떨어져 있던 콩콩이가 그에게 뛰어가 차원의 조각을 원한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너 이거 필요해?”
“크이이!”
자신의 말에 콩콩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처음에는 붉은 늑대나 메시아에게 주려고 했는데.’
“크이이이!”
진원의 주위를 맴돌던 녀석은 꼭 자기가 필요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방방 뛰며 의사 표현을 했다.
‘전설종이니까. 분명히 뭔가 있지 않을까?’
진원이 차원의 조각을 콩콩이에게 건네자.
“크이!”
녀석은 그것을 덥석 받아 그대로 삼켰다.
“야,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인마!”
그는 콩콩이의 행동을 보고 뱉으라는 듯이 녀석의 얼굴 앞에 손을 내밀었지만.
화아아아.
그 순간, 녀석의 몸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이이이!”
“뭐야?”
가만히 쳐다보면 눈에서 눈물이 흐를 정도의 세기에 진원은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띠링.
[골드 캥거루가 차원의 조각을 흡수해 힘을 얻습니다.]
[골드 캥거루의 스테이더스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패스트 힐이 추가됩니다.]
[홀리 팡이 추가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낯익은 시스템 창이 하나 떠올랐다.
자신의 상태 창이 아닌 골드 캥거루.
콩콩이의 상태 창!
[골드 캥거루]
D- 랭크
[능력]
근력 - E
체력 - E
민첩 - D
신성력 - D
[스킬]
섬광 - D
패스트 힐 - D
홀리 팡 - D
#플레이어 김진원에게 완전히 귀속되어 있습니다.
“얘는 이런 식으로 정보가 나타나는구나.”
콩콩이의 상태 창은 자신의 상태 창과는 다르게, 좀 더 간략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녀석이 섬광을 쓰길래 혹시나 싶었는데.’
지난번에 콩콩이가 할파스에게 성기사 직업군이 가진 스킬을 사용하길래 혹시 신성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진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진원은 콩콩이의 몸에서 발하는 빛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자,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패스트 힐이야 아는 스킬인데. 홀리 팡은 뭐지?”
진원이 스킬에 대해 궁금해하자.
“크이이!”
콩콩이가 보여 주겠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골드 캥거루가 홀리 팡을 사용합니다.]
녀석이 조막만 한 손을 말아 쥐자, 손에서 백색의 기운이 맺혔다.
“크이이이!”
잠시 후, 자세를 잡은 녀석이 기합과 함께 그대로 정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팡!
작은 체구에서 나올 수 없는,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허공에 남아 맴돌았다.
“공격 스킬이구나?”
“크이이!”
자신의 말이 맞다는 듯 녀석이 고개를 까딱인다.
‘그동안 식비가 장난 아니었는데 역시 전설 종이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
“소, 손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하, 하하하!”
관리자와 최은식은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것을 확인하자 바로 자신에게 다가왔다.
“형, 방금 보스를 혼자서 때려잡은 소환수가 명예 포인트로 구입한 스킬이죠?”
“그래. 나도 저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는데.”
진원의 대답에 최은식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알았어, 짜식아. 네 덕분이다.”
“뭘요. 명예 포인트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진원은 그런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지면에 쓰러져 있는 플레이어들을 둘러보았다.
“후우, 자업자득이긴 한데…….”
협회장의 추측에 따르면, 이곳에서 사망한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빚에 허덕여 무단으로 던전에 들어온 사람들일 것이라고 했다.
“전부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일단 1층까지는 클리어했으니까 시신들은 따로 수습할 수 있겠지.”
진원이 귀환 포탈로 들어가려 하자 구석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