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불꽃남자 김진원-1
“이 정도면 됐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버, 벌써 가십니까?”
“이 뒤에 식사라도 같이 어떠십니까?”
그러자 손태욱과 문명호도 빠르게 몸을 일으키며 그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려고 했지만.
“이사 준비를 해야 되거든요. 제가 좀 바쁘네요.”
단호하게 거절하고 밖을 나서는 진원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약속했던 기한. 6개월이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송현성에게 귓속말을 건네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말을 들은 송현성은 몸을 흠칫 떨었다.
***
대학병원의 1인실 안.
김수환은 플레이어 이벤트에서 돌아오자마자, 너덜해진 옷을 갈아입고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후우, 제발 효과가 있었으면.’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딸이 잠에서 깨어나기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아빠아, 이거 쓴 약 아니야? 꼭 마셔야 돼? 색깔이 이상해…….”
날이 밝고, 잠에서 깬 딸은 그가 건넨 희석된 엘릭서를 보고 싫은 기색을 보이며 표정을 찡그렸다.
“이거 마시면, 아빠가 우리 수진이 가고 싶어 하는 에버랜드에 데려가 줄게.”
“어? 정말? 진짜로? 거짓말 아니지?”
“그럼! 아빠가 약속 안 지킨 적 있었니?”
“아니, 없었어!”
김수환은 그런 딸을 살살 달래며 포션의 뚜껑을 열고 마시도록 유도했다.
“자, 아빠가 수진이 좋아하는 도넛도 사 왔다! 그거 마시고 먹자.”
그리고 한 손에 초코도넛을 들고 가만히 기다렸다.
수진이는 그의 말에 눈을 꼭 감고 희석된 엘릭서를 단숨에 들이켰다.
“잘했어, 우리 딸! 장하다.”
김수환은 환하게 웃으며 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으으! 이상한 냄새나……·.”
“자, 여기 도넛. 천천히 씹어 먹으렴.”
“응. 어? 아빠?”
그가 건네준 도넛을 받아 들고 한입 베어 물려던 딸이 뭔가 이상한 듯이 물어왔다.
“응? 왜 그러니? 아파?”
김수환은 혹시라도 딸이 잘못되었을까 싶어 조마조마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나 여기 답답하던 게…… 사라졌어.”
“정말이야? 숨 쉬는 거 안 힘드니?”
“응!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아빠가 준 약 마시니까 안이 시원해!”
수진이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신나게 방방 뛰었다.
주륵.
그 장면을 보고 있던 김수환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원인 모를 발작이 시작되기 전에도, 항상 가슴의 답답함을 느껴 불편해했던 딸이었는데.
‘김진원……. 그가 준 포션이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이야.’
“어? 아빠? 왜 울어?”
“응? 아니.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내가 호, 해 줄까?”
김수환은 걱정스러운 듯이 다가오는 딸을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에버랜드 가자, 수진아.”
***
“흠, 여기는 괜찮은 것 같네요. 형은 어때요? 역세권이기도 하고, 동생분 학교랑 그렇게 멀지도 않네요.”
“그, 그렇죠. 지인분이 굉장히 잘 아시네요.”
진지한 표정으로 진원과 함께 아파트를 세심하게 살피는 남성은 최은식이었다.
진원이 플레이어 이벤트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자마자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해 댄 것.
“혀엉, 제가 아파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골라요! 저랑 같이 보러가요!”
이사 준비로 바쁘다는 말을 꺼내고 적당히 통화를 끊으려고 하니, 이놈이 오히려 같이 가자는 식으로 말을 꺼냈다.
‘뭐, 진짜 꼼꼼히 잘 보기는 한다만.’
최은식은 마치 자신이 살 집을 고르는 것처럼 시세를 꼼꼼히 따져 가며 진원에게 설명했다.
옆에 있던 부동산 중개인이 무안해할 정도로.
“그래서 여기가 얼마라고? 지금까지 본 곳 중에 제일 괜찮네.”
“그렇죠? 그리고 여기가 보안이 상당히 좋거든요. 신축 아파트기도 하고요. 이곳은 6층이니까 19억쯤 하겠네요.”
19억.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혼자서는 평생을 모아도 못 살 금액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희석된 엘릭서 한 개를 팔았는데, 46억에 팔려 버렸으니. 거기다 미리 모아 둔 17억도 있고.’
상점 레벨이 올라서 구매 가능 개수가 아홉 개로 늘어났기에 플레이어 거래소로 가서 한 개를 판매했다.
여직원이 조심스럽게 어디서 났는지 물어보았지만, 적당히 던전에서 주웠다고 대답했다.
‘굳이 알려 줄 필요는 없지.’
그건 그렇고, 이제야 그 낡고 좁은 집에서 나간다니. 깔끔하고 넓은 거실을 보자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좀 더 빨리 이사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지. 지원이에게는 깜짝 놀라게 나중에 말해야지.’
“그럼 여기로 하시겠습니까?”
자신이 혼자서 감상에 빠져 있자, 부동산 중개인이 옆으로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좋네요. 여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천천히 구경하다가 나오셔도 됩니다.”
미리 준비한 서류들을 넘기자, 중개인은 기쁜 듯이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은식아, 지금 바로 남은 던전 클리어해 주고는 싶은데…….”
길드 창설까지 앞으로 A급 던전 클리어 한 번.
현재 자신의 스펙으로는 혼자서도 충분히 공략할 수준이다.
그런데 대학교에서 오늘 꼭 강의를 해 달라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수락해 버렸다.
‘하긴. 언제 또 엿 같은 이벤트가 발생할지 모르니까. 거기다 강의료로 3천만 원을 준다고도 했고.’
그러나 최은식은 자신의 말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실실 웃었다.
“알아요, 형. 서울대학교에서 강의가 있는 거요. 저도 그거 들으러 가는데, 그냥 같이 가요.”
“……너도 들으러 오냐?”
“물론이죠! 그거 신청하느라 엄청 힘들었어요!”
강의라고 해 봤자, 그냥 자신이 이벤트에서 겪었던 일을 말하는 경험담일 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한동안 사이트가 마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야, 말이 강의지 그냥 내 경험담이랑 잡소리밖에 없어. 너 이거 듣는 거 시간 낭비야.”
“무슨 소리예요, 형! S급 플레이어의 경험담은 돈 주고도 못 사요!”
아는 사람이 강의를 들으러 온다니 괜히 찝찝해 안 좋게 말해 보았지만, 역시나 최은식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
서울대학교의 대강당 문화관.
강의가 시작되기까지 20분 이상이 남았지만, 1,600개가 넘는 좌석은 만석이 된 지 오래였다.
“와, 앞자리 잡는 데 유명 가수 콘서트 저리 가라였다 진심.”
“최초 공개이기도 하니까. 나는 플레이어학과라서 그냥 자리 배정받음.”
“서울대생 부럽네, 스벌.”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벤트에서 1등을 차지하고 돌아온 그의 경험담을 말해 준다는데, 돈을 주고서라도 본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뭐 저렇게 많이 왔어?’
대강당의 열기를 슬쩍 엿본 진원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30분짜리 경험담인데.
‘친절하게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 주긴 했는데.’
띠링. 띠링.
신혜진 : 야. 이벤트에서 1등 보상으로 뭐 받았어?
신혜진 : 아, 너 강의 들으려고 했는데 워낙 빡세서. 난 못 갈듯. 그래서 뭐야?
자신이 어떤 식으로 말을 풀어 나갈지 고민을 하던 와중,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김진원 : 기괴한 시계. 아는 거 있냐? 받자마자 그냥 몸속으로 들어감.
신혜진 : 그게 뭐야? 처음 듣는데. 일단 좀 알아볼게.
“김진원 씨, 이제 슬슬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죠.”
그녀와 간단히 문자를 주고받는 와중, 대학교 교수가 그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자리로 안내했다.
“어? 김진원이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 휘익!
그저 자리로 이동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본 듯 함성을 질렀다.
미리 직원들이 세팅이라도 한 듯, 빔 프로젝터에 PPT 자료가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진원입니다.”
그가 짧게 인사를 건넨 뒤, 마이크를 입에 대고 말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먼저, 이번 이벤트에는 200명의 플레이어가 강제로 끌려왔습니다.”
이어진 자신의 경험담. 플레이어들은 금화를 3개 소지하고 있지 않으면, 이벤트가 끝남과 동시에 사망했고, 서로 죽임을 강요하는 시스템이었다는 설명으로 강의를 시작했다.
“헉!”
“미쳤나 봐…….”
첫마디부터 충격적인 내용이 나오자 사람들은 불안함에 웅성거렸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결론적으로, 플랭크톤에게 금화를 가장 많이 바친 플레이어가 1등을 하기 좋은 이벤트였습니다.”
기억을 되짚어 가며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물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플레이어는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괜찮겠지. 애초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스템이었으니.’
“이것으로 끝입니다.”
웅성웅성. 짝짝짝짝.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인지 사람들의 분위기가 위축된 것이 느껴졌다.
“자, 그럼 짧게 질문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으신 분은 손을…….”
처억! 척!
플레이어 학과 교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손을 높게 들어올렸다.
“진원 씨가 지목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을 슥 훑어보았지만 누구나 할 것 없이 손을 빠르게 든 상태.
‘최은식, 손하윤. 너희들은 안 돼.’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이놈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까지 손을 높게 들고 있었다.
못 본 척 무시하고, 중간열 사람들 위주로 적당히 골랐다.
“저……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지만. 혹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지목받은 여학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질문해 왔다.
그러고 보니 어떤 식으로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길게 끌기는 싫어서 큰 줄기만 말하긴 했지.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보니, 직업이 밝혀지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해 그냥 대답해 주기로 했다.
“유니크 직업. 계약 소환사입니다.”
물론 자신이 원거리 스킬을 따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얘들아.”
진원의 말에 붉은 늑대와 메시아, 그리고 소환수들이 자신의 양옆으로 모습을 갖춰 나타났다.
“와…….”
“역시 S급은 무조건 유니크네.”
“저기 둘은 그냥 사람 같은데?”
“우와! 저기 금발 여자애. 되게 귀엽다. 인형 같아.”
사람들은 그의 소환수들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야, 카메라! 이거 무조건 1면에다가 실어!”
“빨리 움직여, 빨리!”
기자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분주하게 카메라 렌즈를 움직였다.
‘뭐지?’
잠시 뒤, 소환수들을 다시 돌려보내니 눈앞에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띠링.
[명예 포인트를 1 획득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얻을 수 있다고?’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동은 수많은 사람 앞에서 짧은 강의와 더불어 소환수들을 보여 준 것.
단지 그 행동으로 인해서 명예 포인트를 1 얻게 되었다.
‘명예라. 내가 유명해질수록 포인트를 모을 수 있는 건가?’
높은 등급의 던전을 클리어해야 획득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후. 혼자 고민해 봐야 끝도 없겠어. 나중에 애들한테도 물어봐야겠다.’
다른 학생들이 열정적으로 진원에게 질문을 하던 와중, 끝자리에 앉아 있던 남성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