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그림자-4
진원과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은 학생들이 걸음을 멈췄다.
‘역시 보스 방이 맞았어.’
넓게 트인 장소.
그리고 몬스터들의 뼈를 모아 어설프게 만든 커다란 의자에는 화려한 목걸이를 걸친 보스가 앉아 있었다.
[보스 : 그림갈]
오우거 2마리를 억지로 붙여 놓으면 저런 느낌일까.
거대한 하나의 몸뚱아리에 두 개의 머리. 그리고 양쪽으로 팔이 두 개씩 붙어 있는 보스의 모습은 기괴했다.
거기다가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온 하이오우거들과, 보스의 주변에서 대열을 이루고 있는 다른 하이오우거들까지.
처음에 자신들을 공격했던 10마리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되는 숫자였다.
‘뒤에 놈들까지 합치면 60마리는 거뜬히 넘겠네.’
“…….”
“히익!”
“아무리 A급 던전이라도 이건 너무 많잖아!”
손하윤과 다른 학생들은 대열을 이루고 있는 몬스터들과, 거대한 덩치를 가진 보스를 보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크록타르.”
어느새 진원의 옆으로 다가온 크락카는 다시 뭐라 말하며 보스가 앉아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는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며 그림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환영한다, 인간들이여.”
놈은 한쪽 머리를 들썩이며 입을 열었다.
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알아듣기 어려운 몬스터의 언어가 아닌 한국어였다.
‘여기라면 충분하다. 손하윤, 튼튼이를 꺼내!’
진원은 손하윤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그녀를 포함한 학생들은 보스의 위압감에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 때문인가.’
자신은 멀쩡했지만, 아무래도 학생들에게는 상당한 공포감을 심어 주는 모양이었다.
“흐음, 뒤에 있는 인간들은 너무 떠는구나. 내가 그렇게 무서운가?”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그래? 굳이 이곳으로 우리를 데려온 이유. 뭐냐?”
진원은 한 발자국, 놈에게 다가가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런 진원의 태도에 학생들은 기겁했지만, 그림갈은 재밌다는 듯이 씩 웃었다.
“정찰용으로 보낸 나의 부하들이 너무나도 손쉽게 죽어 나가더군. 나름 강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래서 인간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놈의 팔이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움직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너, 너에게선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냄새가 나는군. 특히 너의 힘을 맛보고 싶구나.”
“그래?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 줄 수 있는데, 어때?”
“크하하하! 재밌는 인간이구나.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지.”
꿈틀.
대화 도중, 놈의 잠들어 있던 머리가 깨어나며 흥분한 듯 함성을 질렀다.
“크록타르!”
크워어어어!
그러자 하이오우거 전사들이 반응하며 더욱 큰 함성을 내질렀다.
“특별히 내가 이름을 부여한 전사가 있지. 일단 그놈을 이긴다면 나에게 도전할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애들은 건들지 마라.”
“크하하하, 네놈이 이긴다면 말이지.”
진원의 등 뒤로 숨어 있던 학생들은 다른 하이오우거들이 팔을 붙잡고 다른 장소로 끌고 갔다.
“오빠!”
“허어엉! 살려 주세요!”
“아악! 어디로 끌고 가는 건데! 놔줘! 놔 달라고!”
‘붉은 늑대. 따라붙어라. 그리고 애들 주위에 오우거 붐이 없으면, 그대로 놈들을 처리해.’
‘분부대로.’
실체화하지 않은 붉은 늑대가 학생들을 따라붙었고, 그사이 하이오우거들은 커다란 원을 이루며 경기장 같은 구도를 만들었다.
진원은 땅을 박차고 원 안으로 들어갔다.
“와라. 빨리 끝내 버리게.”
“크록타르!”
그러자 하이오우거 전사, 크락카가 포효하며 자신의 앞에 섰다.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한 손으로 들기 버거운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와, 철제 방패를 들고서.
놈이 포효하는 사이, 진원 또한 총잡이의 장갑을 착용하고 준비를 마쳤다.
“인간, 네놈이 네크로맨서 같은 소환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어디 한번 내 정예전사 크락카에게 모든 것을 부딪혀 보아라!”
“크로오오옥!”
별다른 신호도 없었는데, 크락카가 날렵한 몸짓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탓. 탓. 탓.
부웅!
놈은 단 세 걸음 만에 거리를 좁혔다.
묵직한 바스타드 소드가 진원의 어깨를 내려쳤지만, 그는 간단히 옆으로 피하고 놈의 안면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빠악!
“크로옥!”
‘역시 물리 공격은 별 효과가 없나.’
그러자 놈은 성난 듯한 소리를 내고, 다시 날렵하게 바스타드 소드를 휘둘렀다.
부웅! 부웅!
‘이 자식. 생각보다 엄청 빠르게 휘두르잖아.’
놈은 가벼운 한손검을 다루듯이 바스타드 소드를 변칙적으로 휘둘러 댔다.
“크, 크록!”
크락카의 기세에 오히려 원을 이루고 있던 하이오우거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크로오옥!”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던 크락카가 지친 듯 거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큰 검을 쉴 새 없이 휘둘러 대니 당연한 결과겠지.’
크락카는 그 뒤로 쉬지 않고 연속해서 검을 휘둘렀지만, 진원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여유롭게 놈의 공격을 회피했다.
“이제 내 차례네.”
진원은 와인드업을 하고 지쳐 있는 크락카를 향해 마구 : 칼날 폭풍을 사용했다.
“흐읍!”
휘익! 드드드드드.
“크아아악!”
놈은 진원의 공격에 빠르게 반응해 방패를 세웠지만, 뒤에 있던 하이오우거 전사들은 스킬에 휘말려 몸이 꿰뚫렸다.
띠링.
[하이오우거 전사를 처치하였습니다.]
[하이오우거 전사를 처치하였습니다.]
“이걸 맞고도 살아 있네.”
“크로옥…….”
크락카는 방패를 세워 진원의 스킬을 방어해 냈지만, 수많은 칼날을 막아 내지는 못했는지 곳곳에 꿰뚫린 상처들이 있었다.
“크락카, 나에게 이름을 받고도 고작 그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거냐?”
“크, 크록!”
그림갈은 처음에는 재밌는 표정으로 크락카와 진원의 전투를 지켜보았지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을 보고 실망한 듯이 호통을 쳤다.
“네놈이 진다면 이름을 거두겠다. 그리고 내 마나가 되어라.”
“크로옥!”
협박과도 같은 말. 그 말에 크락카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진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승부는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름을 받아 더욱 강력해진 하이오우거 전사라 해도, 진원에게는 경험치일 뿐이었으니까.
“흡!”
진원은 달려드는 크락카의 안면에 마구를 날렸다.
이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서려 있는 크락카는, 단순한 원거리 스킬에 피해를 입게 되었고, 그 뒤로 추가적으로 날아오는 마구에 뒤로 넘어지게 되었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얘가 이름을 받은 전사랬나? 이게 전사냐?”
간단하게 크락카를 쓰러트린 진원은 그림갈을 쳐다보며 도발했다.
“재밌는 인간이구나. 크락카! 지금부터 너의 이름을 거두겠다!”
쓰러져 있는 크락카에게 호통을 친 그림갈은 한쪽 팔을 내뻗었다.
스스스스-
“크로오옥!”
그러자 놈의 생기 있던 피부가 점점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놈의 몸은 미라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스킬인가. 저걸 맞으면 위험하겠는데.’
앞으로 놈을 어떤 식으로 쓰러트릴지 고민하는 도중, 붉은 늑대가 말을 걸어왔다.
‘주군, 오우거 붐이 있어서 이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놈들은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그대로 대기해라.’
‘분부대…… 주군, 근처에 갑자기 사람의 기척이 느껴집니다. 최소 1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다가옵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플레이어가 던전에 들어온 건가?
“인간, 표정이 어둡군. 내가 방금 보여 준 스킬 때문인가? 흐흐흐, 안심해도 좋다. 이것은 내가 이름을 부여한 전사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니.”
그러나 진원은 그림갈의 설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혹시 중간에 닫힌 포탈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아이템이 있다면?’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대학교에서 이 일을 가만히 넘길 리가 없으니.
학생을 어떻게든 구하려고 애를 쓸 것이 분명했다.
콰아앙!
그때, 거대한 폭발음이 동굴 안을 울렸다.
“흐음, 끌려간 다른 인간들이 뭔가 하려고 했나 보군.”
그림갈은 씩 웃으면서 진원을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에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네놈은 내가 꼭 죽인다.”
“분노에 이성을 잃은 건가? 흐음, 네놈을 죽이기엔 꽤나 아깝단 말이지. 어떠냐? 나는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힘이 있다. 나의 야망은…….”
그의 말이 끝가지 이어지기도 전에, 동굴 한쪽에서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진원! 살아 있어? 도와주러 왔어!”
보스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신혜진과 다른 플레이어들.
학생들이 그들의 옆에 붙어있는 것을 보니, 안전하게 구출해 낸 것 같았다.
“이성을 잃기는 개뿔. 안 그러면 경험치 뺏기잖아.”
“뭐…… 뭐라?”
진원은 고개를 돌려 신혜진에게 소리쳤다.
“신혜진, 여기 있는 하이오우거들은 건드려도 되는데 보스만큼은 건들지 마라! 내 거다!”
“뭐? 너 혼자 되겠어?”
“크록타르!”
짧은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하이오우거 전사들이 신혜진의 파티에 달려들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푸확! 퐈학! 티잉!
“프리스트분들! 버프랑 힐 배분 잘해 주세요! 탱커님들은 어그로 분담 잘 부탁드릴게요!”
“예!”
“알겠습니다!”
신혜진의 지시에 후방에 빠져있는 프리스트들이 탱커들에게 체력버프를 포함한 하급버프를 걸어주었다.
그사이, 신혜진은 창을 들고 다른 하이오우거 전사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압!”
어느새 붉게 물든 창끝은, 단단한 하이오우거 전사들의 피부를 쉽게 꿰뚫었다.
푸욱! 퐉!
“크로오옥!”
신혜진에게 10마리 이상의 몬스터들이 달려들었지만, 그녀는 당황하기 않고 자리에서 크게 도약했다.
“버스트 쓰로우!”
그대로 뒤로 돌며 몸을 크게 회전한 뒤, 하이오우거 전사들에게 창을 던졌다.
푸욱! 퍼어엉!
“크아아악!”
“크르륵!”
빠른 속도로 날아간 창은, 한 놈의 몸을 꿰뚫은 뒤 그대로 폭발했다.
그 폭발에 근처에 있던 다른 하이오우거 전사들도 휘말려 몸이 터져 나갔다.
“오, 꽤나 잘 싸우잖아. 역시 A급 플레이어쯤 되니 능숙하네.”
신혜진과 그녀의 파티원들은 상당한 숫자의 하이 오우거 전사들을 능숙하게 상대했다.
탱커들이 어그로를 끌어 시간을 끌며 안정적으로 처치해 가는 사이, 신혜진은 안쪽으로 들어가 한꺼번에 많은 하이오우거 전사들을 처치해 나갔다.
“인간들 주제에 감히! 내가 애써 모은 부하들을! 네놈들을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
순식간에 자신들의 부하가 쓸려 나가자 분노한 그림갈은 육중한 몸을 일으켜 주문을 시전했다.
“내가 그걸 그냥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얘들아!”
“분부대로!”
[맡겨 줘.]
“맡겨만 주십시오!”
“키기긱!”
자신의 신호에 모습을 드러낸 소환수들이 일제히 놈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두두두두. 화르륵! 서걱! 빠악!
“크아악! 내가 이대로 굴할 줄 아느냐!”
그림갈의 몸에서 녹색의 피가 흘러내렸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림갈은 네 개의 팔을 흐느적거리며 계속해서 검은 공을 점점 거대하게 만들었다.
“메시아, 붉은 늑대, 스킬을 써라!”
“분부대로.”
[알았어.]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말을 마치고 곧바로 놈을 향해 마구 : 칼날 폭풍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