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세상은 좁다-2
“사실은 제 누나의 딸, 조카가 현재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만······ 상당히 중요한 시기에 플레이어로 던전을 다니고 있어서요. 누나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뜯어 말렸는데도 도무지 말을 안 듣습니다.”
그는 상당히 골치가 아픈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서 진원 씨가 S급 플레이어기도 하셔서, 얘한테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면 듣지 않을까 하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고등학생이 벌써부터 던전이라……. 물론 법적으로 전혀 문제는 없다.
플레이어 판정만 된다면, 열다섯 살부터는 던전에 입장이 가능했으니.
“그런데, 던전에 다니고 있다고요?”
“네. 그 녀석이 학교 간다고 해 놓고 몰래 다니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아니, 이제는 하다못해 고등학교라도 졸업했으면 하는 것이 누나의 바람이거든요. 물론 그것은 저도 똑같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던전을 다니고 있다면…….
“그 학생은 등급이 어떻게 되나요?”
“그게 말이죠, 이번에 재측정을 해서 C등급입니다.”
C급이라.
‘나쁘지는 않은 등급인데.’
진원의 물음에 선생은 허탈한 듯이 웃음을 지었다.
“제가 듣기로는 C급만 해도 길드에서 서로 데려간다고 하더군요.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플레이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죠.”
딸을 둔 부모의 마음이야 다 똑같겠지. 던전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수가 존재했으니까.
거기다 딸내미가 끔찍하게 생긴 몬스터들을 처치하러 간다고 하면 누가 잘 다녀오라고 하겠는가.
“말 한마디야 해 줄 수는 있습니다만, 본인의 의지가 강하면 저도 그 이상은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솔직히 자신에게 있어서는 타인이기도 했고, 본인의 선택이었기에 강제적으로 그만두게 할 수도 없었다.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어서 선생의 입에서 뭔가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진원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혹시 그 사람 직업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마법을 쓴다나 뭐라나…….”
이거 봐라.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게 반말을 했어?’
세상이 좁다는 것을 체감한 순간이었다.
***
그날 저녁, 최은식의 자택의 화려한 건물 안, 오랜만에 가족들이 식탁에 모여 앉았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어요!”
그 이유란, 최은식의 아버지 최은호의 생일날이자, 공식적으로 그가 일자리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날이기도 했다.
“허허. 그래, 고맙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족들이 준비한 선물을 받았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때, 최은호는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은식아, 내가 걱정되는 마음에 하는 말이긴 하다만, 던전을 계속 다녀야겠냐?”
“물론이죠, 아버지. 제가 자주 얘기하잖아요? 형에 대해서.”
“물론 그거야 잘 안다마는, 굳이 길드를 만들어야겠냐는 말이야.”
“네. 여기 보세요! 오늘로 C급 던전 클리어 횟수 다 채웠어요. 형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속도라고요!”
그는 들뜬 기색으로 자신에게 종이를 들이미는 아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잘못이 없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어느 순간부터 괴상할 정도로 돈에 집착하는 아들. 그러나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과거, 자신은 믿었던 친구에게 보증을 서 주다가 고액의 빚을 지게 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잘나가던 사업까지 말아먹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빚은 수십억 원. 파산 신청 말고는 답이 없겠다고 생각한 암울한 상황을, 자신의 아들이 해결해 주었다.
‘대단한 녀석이지. 그건 당연하지, 누구 아들인데.’
아들은 주식으로 재산을 조금씩 불려 나가기 시작해 엄청나게 쌓여 있던 빚을 갚은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사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였을 텐데. 나는 항상 그게 미안하구나.’
하지만 아들은 한창 친구들과 어울리고, 공부하며 놀아야 하는 고등학생.
그 중요한 시기를 자신 때문에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친구 하나 없던 아들에게, 어느 날부터 집에 돌아올 때마다 환한 얼굴로 친하다는 형 이야기를 했으니.
“은식아, 이제는 재산도 제법 모였지 않느냐. 길드 만드는 것은 그만두고 적당히 나랑 여행이라도 다니는 것은 어떠냐?”
“안 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항상 차선책은 있어야 해요. 물론 아버지는 앞으로 편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아들의 대답은 칼 같았다.
최은호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마음속으로 아들이 크게 다치지 않게 바랄 뿐이었다.
***
피닉스 길드의 부사장 대리 이시현.
현재 그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자리 잡고 있었다.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테이블에는 피로 회복 음료나 커피가 가득하게 올려져 있었다.
“후우,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길드장님이 돌아오시다니.”
적당히 티 나지 않게 길드의 재정 시스템을 건드리려고 했지만, 송현성이 돌아오고 나서는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길드장답게 밀린 업무를 비롯해 썩어 가던 길드를 뿌리부터 치료해 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괴물이야, 그 인간은. 어떻게 일주일 동안 잠을 한숨도 안 자? 사람 맞나 진짜?”
꿀꺽. 꿀꺽.
그는 근처에 있던 캔 커피를 하나 집어 단숨에 들이켠 뒤, 근처에 있던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아. 곧 있으면 나갈 건데 나는 왜 이곳에서 개같이 일하고 있는지 원.”
모아 둔 돈도 꽤 있다.
그냥 사표를 내고 나가도 그를 말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열심히 일해 왔기 때문이다.
나름 경력도 있고, 차별화된 능력도 있고.
“송현성, 그 인간은 분명히 내가 다른 길드로 가려는 것을 막겠지.”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때에 사표를 내고 길드를 나가게 되면,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의 악명은 길드원들에게서 자주 들었으니.
“죄송합니다. 진원 씨, 아무래도 6개월로는 턱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눈을 감은 그는, 10초도 지나지 않아 코까지 골면서 잠에 빠졌다.
***
“되게 깔끔하네.”
진원은 현재 아파트 단지로 들어와 있었다.
얼마 전에 건축한 신축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려면 경비원들에게 이름과 연락처, 방문 목적을 기입해야 했다.
‘흠, 나중에 이사하면 나도 여기로 할까.’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입구부터의 철저한 보안, 단지 안을 거닐 때마다 보이는 감시 카메라. 상당히 괜찮게 조성된 조경.
“이 녀석 꽤나 잘사는가 본데?”
집 주소가 여기라면, 그녀석의 형편은 꽤나 넉넉하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굳이 플레이어의 길을 걷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시궁창 같은 인생을 역전하기 위해서 던전에 뛰어드는 플레이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상점 스킬과 운이 없었으면,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했을 거다.’
자신도 운이 좋아 죽을 위기를 넘겼다.
집안의 말도 안 되는 빚만 아니었어도 던전에 들어갈 생각은 절대 안 했을 것이다. 아니, 어깨만 멀쩡했어도.
물론 C급 플레이어는 어느 길드를 가더라도 충분히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많은 던전의 변수를 체험한 그는, 던전이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고 있었다.
‘담임의 부탁이니 한마디 정도는 해 줘야지.’
안면이야 있는 사이였지만, 자신이 그렇게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었다. 은지 씨였다면 모를까, 얘는 아니지.
주위를 둘러보며 기다리길 5분,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석이 걸어 나왔다. 까칠해 보이는 외모. 역시 네가 맞았구나.
“야, 은지희!”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녀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역시 너구나. S급 플레이어 김진원 씨?”
“너? 던전에서 반말은 잘도 하더라? 이제 보니 고등학생이더라?”
그가 짐짓 화난 기세로 말하자 그녀는 흠칫하며 빠르게 말을 바꿨다.
“아니, 그때는 짐꾼이기도 했고, 나이도 어려 보여서 그냥 좀…… 그랬죠, 뭐.”
현재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S급 플레이어. 당연히 자신의 까칠한 성격을 자제해야 했다.
“와, 진짜 제대로 속았네. 얘가 겉보기에는 은지 씨랑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그랬는데, 알고 보니 열아홉 살? 되게 삭았…….”
“뭐요?”
그녀는 진원의 마지막 말에 언성을 높였다.
“하아. 어쨌든 저는 던전 계속 다닐 거예요. 아무리 오빠라도 그만둘 생각은 없어요. 그때만 위험했지, 그 뒤로는 안정적으로 던전 클리어 잘하고 있다고요! 스펙 열심히 쌓아서 대형 길드에 가는 게 목표라고요!”
그래 뭐. 본인이 그렇다는데. 그래야지.
“그래라.”
“네?”
간단한 그의 대답에 오히려 당황한 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여기 아파트는 얼마면 사냐?”
“여기요? 신축이라서 18억은 줘야 할걸요? 근데 아파트는 왜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런 곳으로 이사나 오려고 그런다. 그럼 할 말은 했으니 이제 간다.”
그 말을 끝으로 진원은 적당히 손을 흔들고 등을 돌렸다.
“잠깐! 잠깐만요!”
그러자 그녀는 그를 급하게 멈춰 세웠다.
“뭐야?”
“그…… 오빠가 요즘에 클리어하는 던전이요.”
“그게 왜.”
“저도 데려가 주면 안 되나요?”
“뭐라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자니, 전부터 자신의 파티에 C급 던전의 인원수를 채워 주는 자리에 계속 지원을 했었는데, 경쟁률이 엄청나게 세져서 도무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니, 무슨. 오빠가 S급이 되자마자 경쟁률이 100 대 1이 기본이더라고요. 거기다가 자기소개서? 이건 도대체 왜 보는 건지 모르겠고요.”
“그거야 뭐, 던전 클리어 횟수도 경력으로 쳐준다고 하니까.”
클리어 횟수가 많을수록 길드에 입사하기 유리하기도 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C급은 횟수를 다 채워서 없어. 내일부터 바로 B급 공략할 거야. 그럼 이제 간다.”
“그러면 B급 던전에 데려가 줘요!”
“안 돼. 학교나 가라, 이 녀석아.”
“아, 제발요! 일당 같은 거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데려만 가 줘요!”
그녀는 급기야 진원의 팔을 붙잡고 매달리기까지 했다.
이전의 D급 던전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
“아, 더워! 그냥 좀 떨어져라!”
“데려가 준다고 말할 때까지 절대 안 놓을 거예요.”
독한 녀석. 30분이 넘도록 이러고 있다.
사실 힘으로라도 떼어 낼 수는 있겠지만, 저 불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면 별 소용없을 것 같았다.
“하……. 내가 졌다. 알았으니까 놔라.”
“진짜죠?”
한숨을 내쉬며 팔을 내리는 그를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였다.
“이번 한 번만이다. 그리고 너, 내가 데려가 주는 대신에 일당은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장비는 잘 챙겨 오고.”
“진짜죠?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을 붙잡은 팔을 놓고 기뻐했다.
툭.
“아, 잘 좀 보고 다녀요!”
‘와, 성격하고는.’
그녀는 지나가던 사람과 어깨가 살짝 부딪히자 앙칼지게 소리쳤다.
진원은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