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삼켜지다-1
하지만 한편으로 진지하게 그렇게 해 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현재 피닉스 길드가 계속해서 하락세를 타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계속해서 부당한 취급을 받아 왔다는 점이 말이다.
‘S등급이라면…… 한번 걸어 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김진원에 대해서는 측정기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많아.’
이전의 S등급 판정을 받은 플레이어에게도 나타나지 않았던 측정기의 이상 현상.
그것 때문에 김진원은 재측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플레이어의 목소리가 많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협회의 측정기가 오류가 생겼다고는 믿기 힘들어.’
전 세계를 통틀어 5위의 성능을 자랑하는 측정기다.
그날, 그 한순간에 오류가 발생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거듭되는 고된 업무와 스트레스, 야근. 그리고 품어 왔던 불만과 미래의 불확실성.
이것들이 점점 쌓여가는 와중에 들어온 스카우트 제안. 그것도 S급 플레이어에게.
‘지금이 갈아탈 기회인가? 송진호 때문에 풍성한 머리카락까지 빠지기 시작했는데…….’
한동안 가만히 생각을 하던 이시현은,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천천히 들어 진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정말 작정하고 망하게 하면 6개월 안으로도 가능합니다만, 그럴 경우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씨익.
그는 이시현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때는 제가 책임지고 지켜 드리겠습니다. 어떤 수단을 써도 되니까. 완전히 묻어 버려 주세요.”
주도권은 처음부터 자신이 쥐고 있었다, 이 사진들이 있는 이상은.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답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여기 연락처입니다. 이리로 문자 주시면 됩니다. 답변은 3일 이내로.”
그는 이시현에게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 준 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
“응? 이거…… 타란툴라의 이빨 아닌가?”
그대로 나가려다가 발견한 것은 유리 장식장 안에 들어있는 화려한 아이템들. 송진호의 취미인 듯했다.
“뭐, 그래도 받을 건 받아야지. 그만큼 맞아 줬으니까. 이거 피해 보상금 대신 가져갈게요. 괜찮죠?”
“예? 아, 예…….”
그는 유리 장식장을 열고, 타란툴라의 이빨을 꺼내 밖으로 나갔다.
이시현은 그저 진원이 나간 문을 떨떠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타이거 길드의 길드장실.
그가 바로 다음으로 향한 장소는 타이거 길드였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니, 던전 공략을 준비하는지 길드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 길드장실에는 김진원과 최은식, 강은지, 그리고 신혜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다음 날 있을 던전 공략 준비를 마치고 왔는지 자신의 키보다 큰 창을 가져와 한쪽 구석에 세워 두었다.
“갑작스럽게 부른 건데 와 줘서 고맙다. 은지 씨도 고마워요. 제가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아, 네. 저도 요즘은 시간이 많이 남아서 괜찮아요. 지희가 너무 열심히라 그렇지.”
“야, 그것보다 그 전에 전화는 어떻게 됐어?”
“그래. 그건 잘 해결했어. 아니, 이게 잘 해결한 걸까…….”
그는 간략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해 설명해 주었다.
조용히 말을 듣던 셋은 충격적인 내용에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일반인을! 그것도 형의 여동생을 납치하다니! 미친 새끼들!”
최은식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분노했다.
“쯧, 갈 데까지 갔네. 재수 없게 생긴 놈이 나 번호 한번 따 보겠다고 별 X랄을 했었는데. 하아……. 그건 그렇고, 지원이 어떡해……. 충격 많이 받았을 텐데.”
그녀는 지원이 자신의 여동생인 양 걱정했다.
“그래서 문제가 그거야. 강은지 씨를 부른 것도 마찬가지고. 특정 날짜의 기억만 지우는 아이템이라든가, 정신적인 충격을 치료하는 프리스트 계열 직업의 스킬이라든가, 없을까?”
진원은 그런 아이템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이전부터 틈틈이 플레이어 거래소에서 아이템 목록을 훑어보았었다. 물론, 그런 아이템은 찾을 수 없었지만.
“저는 치유 계열 쪽 스킬만 있어서요. 이건 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레벨이 높은 프리스트 계열이나, 유니크 직업인 광휘의 사제라면 가능할지도 몰라요.”
“연금술을 다루는 직업 쪽에서 가능할 수도 있어. 내가 한번 알아볼게. 기대는 하지 말고.”
“그래, 고맙다. 그래서 따로 부탁이 있는데.”
그가 부탁한 것은 동생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경호원이었다. 이대로 붉은 늑대를 계속 붙여 둘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신이 동생 옆에 계속 붙어 있을 수도 없었다.
“그건 제가 할게요, 형! 이 부분은 저를 맡겨 주세요!”
소파에 앉아 있던 최은식이 열정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어어……. 그럼 그렇게 해 줘.”
그 엄청난 기세에 잠깐 움찔했다. 경호원 구하는 게 대체 뭐라고.
“그래. 그럼 경호원이 구해지면, 그 후에 바로 던전에 들어가자. 계약했는데 시간을 오래 끌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형! 당연히 가족이 먼저죠! 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너, 이거 공짜 아닌 거 알지? 다음 던전 공략에 너 무조건 호출할 거야.”
피식.
“그래. 다들 고맙다.”
친절함에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음엔 뷔페가 아닌 비싼 음식이라도 사 줘야겠네.
‘키긱! 키긱!’
갑자기 소환의 방에서 보채는 듯한 임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지. 맛있는 거 주기로 했었는데.
그는 소환의 방에서 임프를 꺼내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뜯어서 건네주었다.
“키긱! 키기긱!”
아그작. 아그작.
테이블에 올라가 과자부스러기를 튀기면서 게걸스럽게 먹는 꼬마 임프.
그리고 그 장면을 본 최은식과 강은지는 화들짝 놀라 문 쪽으로 떨어졌다.
“형, 피하세요! 던전 브레이크예요!”
“아, 그러고 보니 둘에게는 말을 안 했네. 얘, 내 소환수야.”
“네?”
“예……?”
“붉은 늑대.”
“예, 주군.”
스스스.
그리고 이어진 말에 진원이 앉아 있던 소파 바로 뒤에서 칼을 찬 사무라이가 나타났다.
꿀꺽.
신혜진은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반응이 없었지만, 최은식과 강은지는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형! 혹시 직업이…… 네크로맨서인가요?”
“아니? 계약 소환사야. 유니크 직업. 얼마 전에 전직했어.”
“헉! 유니크 직업!”
“와…… 대박이다. 진원 씨, 얘 좀 만져 봐도 될까요? 되게 귀엽게 생겨서요.”
“네? 귀여워요? 얘가요?”
“키긱! 키긱!”
게걸스럽게 과자를 먹고 있는 임프가 귀엽다니.
흠, 뭐, 그럴 수 있지. 사람이 취향이란 다양하니까.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임프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임프는 별 신경 쓰지 않고 과자를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여, 역시. 나의 감은 정확했어.’
한편, 최은식은 정말 상상도 못한 그의 직업에 입이 쩍 벌어졌다.
원거리 딜러이면서, 망치를 들고 전사 계열 직업에도 뒤처지지 않던 형이, 이제는 소환수를 부린다니.
앞으로도 형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진원 씨, 괜찮으시면 저도 던전에 같이 가도 될까요?”
10분 뒤,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할 때, 앉아있던 강은지가 입을 열었다.
“네? 당연히 은지 씨가 와 주면 편하긴 한데…… 제가 당분간 경험치를 독식하려고 하거든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는 힐러가 굳이 왜 좋은 파티를 놔두고 자신을 따라가려는지에 대해 의문을 느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극복하고 싶어.’
그녀는 이전에 진원과 함께 클리어했던 던전에서 발생한 일의 트라우마 때문에,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막상 파티를 짜서 들어가려 하면, 끔찍한 트롤의 기억이 떠올랐다.
‘진원 씨와 함께 던전에 간다면,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
***
그 후로 최은식이 동생의 경호원을 구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고작 하루였다.
“UDT, CCT, KNP868, SSU……. 도대체 최은식 이놈은 어디서 엄청난 사람들을 구해 온 거야?”
위에 나열된 이름들은 훈련이 혹독하기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특수부대 출신들. 얼마나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길래 이런 사람들을 데려왔는지…….
“거기다가 2명은 플레이어잖아. 도대체 얼마를 줘야 하는 거지?”
그 후에, 적당한 카페에서 면접을 진행했었는데, 고등학생의 경호원으로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스펙들이었다.
‘뭐, 그래도 이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으니, 대비해서 나쁘지는 않겠지만.’
최은식은 경호원들의 연봉은 자신이 부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던전에서 괜찮은 아이템이라도 건지면 줘야겠네. 너무 받기만 해도 좀 그렇지.”
진원은 그 후, 상태 창을 열었다.
<플레이어>
이름 : 김진원
레벨 : 30
직업 : 계약 소환사
등급 : 유니크
업적 : 끈질긴 놈
칭호 : 레드 플레이어 꿈나무
HP : 3,500
MP : 2,000
[스텟]
근력 : 50 민첩 : 40 체력 : 50 마력 : 50 지배력 : 40
미분배 포인트 : 10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상점 기능이 개방됩니다.
#모든 데미지 10퍼센트 감소 효과가 적용됩니다.
[스킬]
마구 Lv.10 (MaX)
불굴 Lv.1
순간 가속 Lv.10 (MaX)
미분배 포인트 : 3
[직업 스킬]
소환의 방 Lv.1
계약 소환 : 꼬마 임프 Lv.10 (MaX)
인핸스 본드 Lv.1
[상점]
Lv.4
지난번, 폐공장에서 올라간 2레벨. 그리고 30레벨 달성으로 상점 레벨이 4로 올라갔다.
플레이어를 죽여서 올린 레벨이라니 뭔가 찝찝한 느낌도 들었지만, 그것은 애초에 그놈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죽어도 싸다.
“새로 생긴 직업 스킬부터 확인해 보자.”
인핸스 본드 Lv.1
패시브 스킬.
소환수의 지배 능력을 향상시켜 자신의 일정 반경 안에 있는 자신의 소환수들을 강화합니다. 레벨이 올라갈수록 적용 반경이 넓어지고, 소환수의 레벨 증가량이 상승합니다.
소환수 레벨 증가 : +1
적용 반경: 50미터
30레벨이 되고 처음으로 생긴 패시브 스킬이었다.
따로 MP가 소모되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되는 스킬!
그는 망설이지 않고 남은 스킬 포인트를 인핸스 본드에 사용했다.
인핸스 본드 Lv.4
소환수 레벨 증가 : +4
적용 반경 : 90미터
스킬 포인트 1당 1레벨 증가와 10미터의 적용 반경이 늘어났다.
현재 적용 가능한 소환수는 꼬마 임프뿐이지만, 소환사 직업의 뼈대가 되는 스킬이라는 느낌이 들어 앞으로 얻는 포인트를 바로 인핸스 본드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어서 상점을 열어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우, 현실에서도 빚. 이제는 상점까지 빚이라. 망할.”
[보유 골드: -1,000 골드.]
상점 레벨이 4가 되면서, 랜덤 박스류의 수량이 채워졌고, ‘희석된 엘릭서’라는 아이템이 중급 HP 포션, MP 포션과 함께 추가되었다.
거기다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생필품이나, 잡다한 물품들까지 목록에 추가되었다.
하지만 현재 잔고가 마이너스라 장비의 수리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사지도 못할 그림인데, 당분간 쳐다보지도 말자.”
당분간 최대한 많은 던전을 돌며 골드를 긁어모으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
***
진원이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건물을 허문 듯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공터였다.
그 중앙에 던전 포탈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분명히 최은식이 C급 던전 입장권을 구입했다고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플레이어 1명이 최은식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샀으니 양보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도 어렵게 구했습니다. 이거 참 곤란하군요. 오늘 우리 신입 길드원 교육하는 날인데.”
“은식아, 무슨 문제라도 있냐?”
“아, 형! 오셨어요?”
최은식에게 설명을 듣자니, 협회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포탈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뒤에 온 다른 파티 역시 같은 입장권을 구매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협회 직원의 실수로 인해 하나의 던전에 2개의 입장권이 판매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