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전직 퀘스트-1
“어이, 해라.”
보급 상자를 건네받은 남성은, 옆의 플레이어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플레이어 하나의 모습이 사라졌고, 순식간에 진원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단검으로 진원의 목을 살짝 긋고, 다시 중년 남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띠링.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큭! 마비!”
그대로 앞으로 쓰러진 진원은 고개를 들어 남성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제자야! 큭! 김수환 네 이놈이!”
그 장면을 본 고재원은 분노에 발버둥 쳤지만, 김수환의 발밑에서 나온 그림자가 단단히 그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있었다.
“흠……. 원래 같았으면 그냥 죽였을 텐데, 내가 그래도 정이 좀 있는 사람이라서. 일단 한 번은 살려 주도록 하지.”
진원의 목을 그은 플레이어는 그대로 엎어져 있는 고재원에게도 똑같이 목을 살짝 그었다. 몸을 덜덜 떨던 고재원은, 기절했는지 몸이 축 늘어졌다.
“이 녀석을 되찾고 싶으면, 보급 상자를 더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라.”
그는 짧은 말을 남기고 그대로 밑으로 사라졌다. 마치,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그와 동시에 다른 플레이어들도 천천히 모습을 감추며 사라지고, 결국 사막에 홀로 남게 된 것은 자신뿐이었다.
“큭! 뭔 놈의 마비 시간이 이렇게 길어?”
그 뒤로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허무하게 보급 상자를 빼앗겨 버렸다.
거기다가 눈앞에서 고재원이 납치되었다. 상당한 체력 훈련과 회피 훈련을 통해 나름 성장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을 보고 움직임을 예측하는 훈련을 한 진원에게 은신 능력을 가진 플레이어들은 천적과도 같았다.
“X발!”
굴욕적인 기분을 느꼈다. 자신에게 위협조차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는지, 적당히 마비를 시키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가다니.
‘역시, 일단은 나도 직업이 있어야 한다. 레벨도 낮고. 이 상태론 도저히 안 돼.’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며 마비 효과가 완전히 풀리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
“이놈의 오빠는 왜 이렇게 안 와?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밤늦게까지 책상에서 공부하던 지원은 오빠가 한 달이 넘도록 문자 하나 보내지 않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번 던전은 조금 오래 걸릴 것 같다는 문자와 함께 입금된 200만 원.
오빠의 동료라는 사람이 자신의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형은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를 보냈다.
“한 달 후에도 안 들어오면, 생활비 왕창 써 버릴 거다.”
소심한 복수를 다짐한 지원은 다시 공부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 같은 필드.
[마비 효과가 해제됩니다.]
“후, 드디어 풀렸네.”
그 뒤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다 소진된 지 오래였고, 가져온 시계도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위치를 어떻게 알았지.’
스승이 심안 스킬로 로봇에게서 미리 보급 상자 투하 지점을 읽었지만, 김수환은 미리 알았다는 듯이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스킬인지, 아이템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스승을 구출하러 가기 이전에, 정보를 모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게 훈련만 시키지 말고 아일랜드 정보도 미리 좀 가르쳐 주지. 이래서 할아버지는 안 돼.’
진원은 한숨을 쉬며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김수환이 보급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간 것이었다.
덕분에 그의 인벤토리 안에는 미리 넣어 둔 경험치 알약이 있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인벤토리에서 알약을 꺼냈다.
노란빛을 띄는 캡슐 형태의 알약이었다.
‘3레벨이라도 올라갔으면 좋겠는데.’
현재 자신의 레벨은 20.
지옥 같은 훈련으로 스텟 10을 얻었지만, 여전히 아일랜드에서 하위권인 레벨이었다.
캡슐을 입안에 넣고 삼키자, 알림 음이 들려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정확히 네 번 더 반복되었다. 확인을 위해 바로 상태 창을 불러왔다.
“상태 창.”
<플레이어>
이름 : 김진원
레벨 : 25
직업 : 미정
등급 : 미정
업적 : 없음
칭호 : 없음
HP : 350
MP : 500
[스텟]
근력 : 30 민첩 : 35 체력 : 35 마력 : 50 ?? : 0
미분배 포인트 : 25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상점 기능이 개방됩니다.
#모든 데미지 10퍼센트 감소 효과가 적용됩니다.
[스킬]
마구 Lv.10 (MaX)
불굴 Lv.1
순간 가속 Lv.10 (MaX)
미분배 포인트 : 7
[상점]
Lv.3
[보유 골드 : 209]
한 번에 5레벨이나 오른 것은 좋았지만, 기척까지 완전히 지워 버리는 은신 스킬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사이 추가적으로 알림 음이 들려왔다.
띠링.
[25레벨 달성으로 전직이 가능합니다. 전직 가능한 직업은 인챈터, 폭탄마, 계약 소환사입니다. 폭탄마와 계약 소환사는 전직 퀘스트가 발생하며 특수 던전으로 이동됩니다. 전직하시겠습니까?]
Y/N
1. 인챈터
2. 폭탄마(유니크)
3. 계약 소환사(유니크)
내용을 읽던 진원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갑자기 무슨…….”
갑작스러운 전직 알림.
거기다가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3개나 나왔다.
3번을 제외하고, 전부 직업 체험권을 통해 임시로 전직해 본 직업들.
‘일단 인챈터는 아니지.’
유니크 직업들을 놔두고 굳이 일반 직업을 고를 필요가 있을까?
‘2번으로 하자.’
3번, 계약 소환사. 뒤에서 소환수를 부리고 하는 건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폭탄마의 위력은 미리 체험해 봤을 때 상당히 좋은 직업이라고 느껴져 2번을 선택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띠링.
[계약 소환사는 상점이 개방된 플레이어에 한해서 전직이 가능합니다. 또한, 레전더리로 등급 상승이 가능합니다.]
“뭐라고?”
알림을 듣고 서둘러 손가락을 내렸다.
같은 유니크 등급이었다면 폭탄마를 선택했을 것이지만, 계약 소환사는 레전더리로 승급이 가능하다는 추가 문구가 있었다.
일반 등급의 직업과 유니크 등급의 차이는 상당하다. 스킬 자체의 성능부터가 달랐다.
그렇다면 유니크와 레전더리의 격차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수준이겠지.
‘끄응, 끌리지는 않지만, 레전더리 직업이니 놓치기는 또 아쉽고.’
스스슥-
직업 선택에 고민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땅 밑에서 무엇인가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후,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겠네. 3번, 계약 소환사 수락!”
기척을 감지한 진원은 빠르게 3번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추가적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포탈이 생성됩니다. 특수 던전으로 이동합니다.]
우우웅-
잠시 후, 진원의 등 뒤로 검은 포탈이 나타나며 순식간에 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커헉! 무슨 압력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력을 느끼면서, 그대로 포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스슥-
진원이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땅 밑이 조금씩 흔들리며 무엇인가가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
[특수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투욱!
검은 포탈이 진원을 땅에 뱉어 냈고, 그대로 사라졌다.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몸을 일으켰지만,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그냥 동굴형 C급 던전이잖아?”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둘러보니, 평범한 동굴형 던전이었다.
특수 던전이라고 하길래 얼마나 위험한 몬스터들이 나올까 했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였다.
앞으로 다섯 걸음 정도 걸었을까, 진원의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떴다.
[특수 던전에서는 상점 이용 및 아이템 사용이 일시적으로 금지됩니다.]
‘무기까지 사용 못 하면 곤란해지는데.’
진원은 인벤토리를 열어 상태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글러브와 망치는 꺼낼 수 있었고, 물약류나 다른 기타 아이템은 빨간 X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후, 빨리 온 감이 있긴 하지만, 스승한테 훈련을 빡세게 받았던 것은 그나마 다행이네.’
진원의 스킬들은 강력한 편이지만, 마나 소비량이 큰 편이다.
MP 포션이 없으면 하급 스킬인 마구를 다섯 번만 사용해도 바로 0이 되어 버린다.
‘역시 편하게는 얻을 수 없는 직업인가.’
거기다가 현재 자신의 HP는 350. 포션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스텟은 체력이라고 판단했다.
진원은 상태 창을 열어 체력에 스텟을 15 사용하고, 나머지 스텟은 전부 근력에 사용했다.
[스텟]
근력 : 40 민첩 : 35 체력 : 50 마력 : 50 ?? : 0
미분배 포인트 : 0
‘이 정도면 그나마 안심이다.’
자신의 HP를 회복할 방법이 막힌 상황. 부상이라도 당해 버리면 그것으로 게임 오버.
따로 회복할 방법이 없다 보니 스텟을 신중하게 사용했다.
“후우, 전직을 하는 것부터가 플레이어의 첫걸음이라고 했지. 기다려라.”
고재원을 자신의 힘으로 되찾겠다는 결심을 하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동굴 안으로 나아간 지 10분, 안은 불 하나 없이 어두워 주의하며 들어갔지만 현재까지 몬스터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온 갈림길 두 개. 한쪽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고, 다른 한쪽은 어두운 그대로였다.
“그웨에엑!”
어두운 갈림길 너머에서 좀비 울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이제 나오는 건가.’
미리 손에 들고 있는 토르의 장난감 망치를 꾹 쥐고,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나아갔다.
‘MP는 최대한 아껴야 한다.’
MP 회복 포션을 사용할 수 없으니,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동굴 벽의 외곽으로 붙어 소리를 줄이며 서서히 울음소리의 근원지로 다가갔다.
“그웨엑!”
“크웨엑!”
밤에 들으면 소름끼치는 소리. 고개를 내밀어 어떤 몬스터인지 확인해 보았다.
‘뭐야, 진짜 좀비잖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나지 않았던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얼굴이 흉측하게 뭉개져 있는 좀비들.
일반적인 좀비와는 다르게, 몸을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덜그럭. 덜그럭.
중세 기사들이 입을 듯한 갑옷을 걸치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몬스터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몬스터의 강함의 색깔이 표시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다.
‘몸으로 부딪혀 보는 수밖에.’
멍하니 서 있는 좀비 하나를 향해 빠르게 달려간 진원은 망치로 놈의 머리를 강하게 후려쳤다.
푸확!
좀비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가며 몸이 허물어졌다.
“뭐야, 이놈 약하잖아?”
“그웨에엑!”
그에 다른 좀비들이 반응하여 자신에게 달려들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좀비들처럼 움직임이 상당히 느렸다.
스릉!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을 뽑은 좀비는 두 손으로 진원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안 그래도 느린 움직임이었는데, 이미 단련을 거듭한 진원에게는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여유롭게 공격을 회피한 후, 망치로 놈들의 머리를 내려쳤다.
푸확!
다른 좀비 역시 검을 들고 위에서 내려치려고 했다.
“뭐야! 이놈 안 죽었잖아!”
그때, 처음에 머리를 터트린 몬스터가 어느새 기어 와서 진원의 발을 강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생각보다 강한 악력이었다.
그는 망치를 들어 놈의 공격을 받아 내려고 자세를 취했다.
“그웨엑!”
챙!
“흡!”
근력 스텟을 40까지 올려 두었기 때문에, 그리 힘들지 않게 쳐낼 수 있었다.
망치의 충격 때문인지 좀비의 손에 잡혀 있던 검이 뒤로 날아갔다.
그는 바로 자신의 발을 잡고 있는 팔을 망치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쿵! 쿵! 쿵!
강하게 여러 번 내려치고 나서야, 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우, 놈들이 그리 세지는 않는데, 문제는…….’
좀비답게 머리를 터트려도 계속해서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건 3마리. 이 정도라면 시험해 볼 만하겠어.’
그것은,
“흐읍!”
그저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무식하게 패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