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브레이크-1
보스에게 물어뜯긴 파티원의 주머니는 비위가 상할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꺼낸 5만 원짜리와 1만 원짜리의 지폐. 5천 원짜리와 1천 원짜리도 놓치지 않았다.
종류별로 분류해 가며 세어 보니 대략적으로 124만 5천 원가량이 나왔다.
“와, 얘들 현금 많이도 가지고 다니네. 고맙다.”
비싸 보이는 지갑도 몇 개 챙겨서 팔려고 했지만, 생각을 지웠다. 너무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었기에.
“형, 최대한 알뜰하게 담았습니다!”
최은식이 멀리서 진원을 불렀다. 가방은 수많은 장비들로 터질 듯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그런 가방을 힘겹게 여러 개씩 메고 있었다.
‘진짜 알뜰하게 다 담아 왔네.’
진원은 그런 최은식을 보고 피식 웃은 후 가까이 다가가 배낭 하나를 들어 주었다.
“혀, 형, 제가 들 수 있는데…….”
“다리도 후들거리는 놈이 무슨. 됐고 하나 더 내놔 봐.”
“네? 네…….”
“알리바이는 어때. 잘 생각해 봤어?”
“네! 물론이죠, 형! 어떤 식으로 말할 거냐면요.”
그렇게 둘은 대화를 나누며 포탈로 향했다.
둘은 던전 밖으로 나오고 나서, 서로 어떤 식으로 말을 맞출지 의논을 했다.
그리고 최은식이 경찰서와 플레이어 협회에 신고를 했다.
20분 정도 지난 후, 경찰차와 흰색 계열의 승용차가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각각 차에서 경찰 2명과, 플레이어 협회 직원 1명이 내렸다.
“형, 협회 직원은 생각보다 깐깐할 수가 있어요. 저한테 맡겨 주세요.”
최은식은 깐깐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 직원을 보고 진원에게 귓속말을 했다.
“신고자 최은식 씨가 어느 분이죠?”
경찰이 먼저 다가와 조사를 했고, 최은식은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던전에서 1~2명씩 사망하는 사건이야 자주 발생하는 편이라 대충 조사만 하면 되는 편이었다.
하지만 많은 플레이어가 한꺼번에 죽은 사건의 경우는 경찰과 협회 직원까지 나와서 좀 더 자세하게 조사했다.
“C등급 던전에서 파티장 강동석을 포함한 플레이어들 전원 사망에, 클리어한 사람은 두 분. 맞으시죠?”
“네. 맞아요. 강동석 씨하고 다른 분들이 보스에게 상당한 대미지를 입혔죠. 저희는 무난하게 잡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놈이 갑자기 몸에서 독 안개 같은 것을 뿜어 대서 주위에 있던 파티원들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최은식의 말을 들으며 수첩을 꺼내 상황을 기록했다.
“보스가 갑작스럽게 독 안개를 내뿜어서 사망했다고 하셨는데, 두 분은 어떻게 무사하셨습니까?”
협회 직원은 뿔테 안경을 손으로 고치며 의문점을 물었다.
“저희는 그때, 다른 지역에 가서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었습니다. 강동석 파티장의 지시대로요. 상황은 살아남은 파티원 1명이 말해 줬습니다. 원딜러분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오래 버텼습니다만…….”
최은식은 안타깝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잘한다, 최은식! 이놈 말발이 좋네.’
진원은 속으로 최은식을 응원했다. 안타깝다는 표정 연기까지 수준급이었다.
“흠. 그 말씀대로면 던전의 보스가 생각보다 강력해 보입니다만, 파티원이 전멸한 상태에서 클리어는…… 응? 그거 진품입니까?”
여전히 의심스러운 말투로 조사하던 협회의 조사원은 최은식의 장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아, 네! 세트로 24억으로 샀죠. 좀 무리한 감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이놈들 덕분에 클리어한 것 같습니다.”
“발키리의 영광 세트라. 흠, 확실히 진품이면 C급 던전 정도는 클리어할 수 있겠네요. 그건 그렇고, 제가 적금까지 깨 가면서 드디어 살 수 있겠구나! 했는데 누가 타이밍 좋게 낚아채 가더군요. 23억이었는데 한 번에 1억이나 더 올려서요. 그게 최은식 씨였군요. 하하하!”
조사원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살짝 분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죠! 거기다가 강동석 씨와 다른 파티원분들이 보스에게 대미지를 입혀 놔서 다행히 클리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옆의 형이 도와준 것도 있었고요.”
최은식의 말에 경찰과 조사원의 시선이 진원에게로 향했다.
“아. 저는 뭐 별건 없고요. 그냥 원딜러로 지원했는데 운 좋게 됐습니다.”
“흠, 그러시군요. 그런데, 잠깐만요.”
협회 조사원은 진원에게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혹시 황제 투수 김진원 씨 아니신가요? 꽤나 모습이 많이 변하신 것 같긴 한데…….”
진원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이 그런 조사원을 쳐다봤다.
“아, 이거 부끄럽습니다만, 저의 유일한 낙이 야구를 보는 것이라서요. 프로 야구뿐만 아니라, 고교 야구도 자주 보러 갔었죠. 아들놈도 야구를 했었거든요. 거기서 김진원 씨를 보고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어떻게 고등학생이 저런 날카로운 공을 던질 수 있을까, 하고요.”
조사원은 본업도 잊은 기세로 열변을 토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진원은 그 기세에 얼떨떨하게 대답했지만, 자신을 아직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부상을 당해서 공식적으로 은퇴하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볼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네요. 뭔가 사정이 있으시겠죠. 경찰관분들, 저는 조사 다 끝났습니다.”
저벅저벅.
분명히 조사가 다 끝났다고 했는데, 조사원은 진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크흠, 그런데 사인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저 사인 잘 못하는데요.”
“역시! 본인 맞으시네요! 하하핫! 나중에라도 복귀하게 되면 꼭 경기 보러 가겠습니다!”
뭐가 그렇게 기쁜지, 조사원은 웃으면서 차에 올라타고, 이내 학교를 나갔다.
“김진원 씨와 최은식 씨.”
“네.”
“아, 네!”
그렇게 협회 조사원이 학교를 나간 뒤, 경찰관들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꼭 플레이어 카드를 만들어야 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만, 웬만하면 만드는 것이 좋아요. 딱히 수상하다 싶은 부분이 추가로 생기지 않으면, 아마 연락은 안 갈 겁니다. 어차피 증거가 없는 이상, 진술을 검토할 수밖에 없어서요.”
“알겠습니다.”
“네. 죄송해요.”
‘깐깐해 보였는데 의외로 쉽게 넘어가서 다행이네.’
진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경찰도 차를 타고 학교로 나간 뒤, 폐교된 학교에는 진원과 최은식만 남아 있게 되었다.
“형,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형 아니었으면 제 몸속에 폭탄이…….”
“그래. 수고했다. 그리고 네가 멘 가방은 그대로 네가 가져라.”
“네? 전 형한테 다 넘겨줄 생각이었는데요?”
최은식은 진원에게 넘겨주려고 이미 가방을 땅에다가 내려 두려 하고 있었다.
“야,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들고 가냐. 그리고 너도 나름 할 일 했으니까, 그거 들고 가라.”
“형,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최은식은 진원을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안 주면 또 귀찮게 하겠지. 그냥 주지 뭐.’
고작 연락처일 뿐인데 뭔 일이 있겠는가. 내가 연락을 안 받아 주면 되는데.
“감사합니다, 형! 나중에 꼭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최은식은 떠나갔고, 진원도 학교를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스마트폰을 꺼내 플레이어 거래소에 접속했다.
“그래도 얼마짜린지 확인은 해야겠지.”
가격에 대한 궁금함에 자신이 아까 전에 복용한 하급 스킬 ‘순간 가속’을 검색해 보았다.
“……그냥 인벤토리에 넣어서 묵혀 둘 걸 그랬나.”
[194억]
하급 스킬 중에서도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다. 게다가 매물도 그리 많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전사 직업류, 특히 탱커 같은 직업에게 상당히 좋은 스킬일 것이다.
“이미 먹어 버린 걸 어쩌겠냐. 그래도 꽤 많은 수확이 있었으니. 빚 정도는 괜찮겠지.”
진원은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내려놓고, 코코아 택시를 호출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플레이어 거래소.
“아오, 무거워 죽겠네.”
플레이어 거래소로 들어온 진원에게 많은 시선이 쏠렸다. 혼자서 엄청난 양의 아이템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
터엉!
묵직한 소리가 나고,
“어서 오세요! 플레이어님, 어머!”
그런 진원을 직원이 기뻐하며 환영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이 아이템들 전부 처분하고 싶은데요.”
“네! 물론이죠!”
직원의 손짓에 다른 직원들이 합세해 진원의 묵직한 가방 안에 든 아이템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아이템들이 어찌나 많은지 추가로 온 2명의 직원으로 모자라서 전화로 직원을 1명 더 호출했다.
그렇게 진원이 가져온 아이템들을 분류하기 시작한 지 20분,
“분류 다 끝냈습니다, 플레이어님! 중급 마정석이 열한 개에, 하급 마정석이 열두 개, 장비류 아이템이 열여덟 개에, 기타 아이템이 한 개입니다. 마정석은 즉시 판매가 가능합니다. 다른 아이템들도 거래소에 등록해 드릴까요?”
직원은 상세한 개수를 알려 주며 거래 안내를 도와주었다.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아니, 등록은 한 달 뒤로 해 주세요.”
‘아이템은 어느 정도 잠잠해진 뒤에 팔자. 혹시 모르니.’
“네. 가격은 어떻게 할까요?”
딱히 시세를 모르는 진원은 입찰식을 택했다.
“입찰식으로 해 주세요.”
“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레이어님!”
그렇게 아이템 예약 판매를 등록하고 나온 진원은, 몸을 풀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
진원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생이 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 나왔다.
“오빠, 맛있는 냄새나. 뭐 사 왔어?”
“얌마, 넌 어떻게 내 옷을 보고도 먹을 걸 먼저 찾냐.”
“응? 던전 갔다 온 거 아냐?”
진원의 옷에는 피가 여기저기 튀어 있었지만 지원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이젠 익숙해진 듯하다.
“그래. 빨리 빚 갚으려면 열심히 움직여야지. 여기 엽기떡볶이랑 허니치킨이다.”
식탁으로 다가가 그대로 포장된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우왕. 근데 나 진짜 이거 먹어도 돼? 오빠 무리하는 거 아니지?”
“플레이어가 벌이가 좋은 거 너도 알잖아. 난 씻고 와서 먹을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오빠, 그런데 직업이 뭔데? 사실 짐꾼 아니지?”
“……·비밀.”
“뭐야. 나한테는 알려 줘도 되잖아. 치사하게.”
지원은 그런 오빠의 팔에 떼를 쓰듯이 매달렸다.
“아, 무거워! 그만 매달리고 먹고 있어. 찝찝해 죽겠다.”
“뭐야! 나 되게 날씬한 편이거든요?”
진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샤워하러 들어가려고 했다.
“아, 오빠!”
“또 왜.”
“우리 야구 보러 가면 안 돼?”
“야구? 갑자기 야구는 왜?”
갑자기 야구를 보러 가자는 말에 의아했다. 돈이 드는 건 절대 하지 않는 녀석인데.
“영호 오빠가 경기 티켓 구했다면서 두 개 주고 갔는데? 앞자리로 두 개.”
지원은 눈앞에서 표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응? 뭐야, 이놈은 또 언제 왔다갔어?”
“잠깐 시간 나서 들렀다던데. 오빠는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다고 했지.”
“흠, 그래서 누구랑 붙는데?”
공짜표라니 안 갈 이유가 없지. 바로 지원에게 경기 일정을 물었다.
“투산이랑 붙는다던데. 근데 투산은 엄청 승률 높다던데. 이길 수 있을까?”
“오, 투산이라. 투산이면 영호라도 어려울 것 같은데. 좋아! 지는 모습을 눈에 새겨 둬야겠다.”
영호가 지는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것이 바로 우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