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0화
제10편 진짜 끝
눈을 질끈 감았다.
절대 쉽게 포기한 건 아니었다.
그저 저 거대한 신격 앞에 한없이 작아진 자신을 인정했기 때문이랄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끊어낸 마력은 다시 연결되었고 괴수는 진희를 인지했다.
그럼 끝이다.
저것은 진희를 머리를 물어뜯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겠지.
하지만.
“……?”
예상하던 통증은 없었다.
“눈 떠, 멍청아.”
익숙한 목소리다.
이한성 아저씨.
이제는 오빠라고 불러줘야겠다.
“오빠!”
“잘하고 있었는데, 왜 멈췄어.”
“네?”
“마력 끊는 거.”
“…….”
“그렇게 해. 더 나아가서 그 마력으로 저것들을 베어낼 수 있을 거야.”
이한성은 그렇게 말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수십 마리의 괴수 목이 한 번에 떨어졌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그가 아무리 보랏빛 괴수를 베어내는 검술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이런 무위(武威)는 비천한 신격에서는 결코 보일 수 없는…….
“진희야.”
“……네?”
“우리 친구 맞지?”
“……갑자기 그게 무슨…….”
이한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진희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이한성은 말을 더 하지 않고는 검을 뽑았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검과는 다른 검이었다.
그는 한 발 걸으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앞에 존재한 수백의 괴수 목이 떨어졌다.
“……오빠.”
“아직 괴수는 많아. 너도 이걸 할 수 있고.”
“……못 해요. 그런 걸 어떻게 해요.”
“해야 해.”
이한성은 고개를 들었다.
아직 수만 마리에 이르는 괴수들이 떨어지는 중이다.
지면에 발을 디딘 것은 아직 얼마 되지도 않는 비중일 뿐이었다.
몇몇 영웅들이 그것들을 상대하고 있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판도라에서 온 이종족 몇, 영웅 누구누구, 극소수의 플레이어들만이 겨우 막아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조금씩 저것들을 상대하는 방법을 깨달아가며 이겨내고 있었다.
자신의 팔이 잘려도, 옆에 있던 동료가 죽어도.
언제나 그랬듯.
재앙을 막아오는 게 그렇듯.
그들은 맞서 싸우고 있었다.
“진희야.”
“네.”
“나, 네 친구 맞아?”
왜 그게 궁금한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물을 수 없었다.
“……당연하죠.”
“너 나 혹시 좋아하고 막 그런 건 아니지?”
“에라이!”
“흐흐. 장난이야. 장난. 심각해 하지 말라고. 아, 참고로 오늘 내 여자 친구도 소개해 줄게.”
“아주 감사하네요. 이런 상황에 그런 농담이 나와요!?”
“꼭 알려주고 싶었던 거니까.”
진희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검을 꺼내 들었다.
마력을 굳이 끊으려 하지 않고 역이용해 저것들을 베어낸다.
“팁을 주자면…….”
한성은 그 방법에 대해 설명했고 진희는 얌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곤 검을 들었다.
“베어 봐.”
“네!”
진희는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대기에 이렇게 많은 마력이 대류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들 하나하나에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은 그 누구도 쉽게 변화를 줄 수 없다.
거대한 폭포의 흐름을 검 하나로 바꾸는 게 쉬울 리가 없는 거니까.
하지만 댐에 작은 구멍 하나만 낸다면.
“흡.”
진희는 검을 그었다.
당연히 익숙하지는 않다. 검의 움직임이 하나하나 묵직하고 거칠었다.
마력의 흐름 속, 틈을 찾아 찔러 넣는 것. 그리고 그 흐름을 한쪽으로 정밀하게 조정하는 것.
결코, 쉬울 수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해냈다.
스걱.
투두둑.
“세 마리라. 처음 치고는 잘했어.”
“나이스!”
진희는 이를 악물며 좋아했다.
드디어 해냈다. 이제 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이한성이 검을 휘둘렀다.
훅.
화아아악!
작은 나비의 날갯짓은, 작은 돌풍이 되더니 하나의 태풍을 만들어냈고 그 태풍은…….
“세상에.”
지상에 떨어진 수천 마리의 괴수. 그리고 하늘에서 아직도 떨어져 내리고 있는 수만 마리의 괴수의 목을 단번에 잘라내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저 보랏빛 신격의 촉수 하나까지도 잘라냈다.
“오, 오빠?”
진희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이한성을 불렀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한성의 곁으로 날아왔다.
검고 붉은 날개를 지니고 검은 뿔이 달린 말도 안 되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
그것은 전 세계는 물론이고 판도라까지 아무도 모를 수 없는 마신 성시연이었다.
이한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했다.
“왔네.”
“마계 쪽 처리하느라 조금 늦었어.”
진희의 턱은 거의 목을 다 가리고 있었다.
입을 열고 다물지를 못하는 상황.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뒤로 날아오는 몇 명의 이들.
천사군 사령관 대천사 진훈, 정연의 주인이자 요괴들의 왕 한별, 갤러해드의 후예이자 아서왕의 유지를 받든 안혜림, 오딘의 길을 걷고 있는 얜 샤를, 창신의 이름을 이어받은 세르게이, 검의 신으로 천외천에 도전하는 나디아.
한 명, 한 명 판도라에서 나오는 이들은 한성 곁으로 모였다.
다들 이곳을 보며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은 전 세계의 연예인이다.
모두의 스타이며 모두의 영웅이다.
그것 외에도 권력이면 권력, 무력이면 무력, 금력이면 금력, 뭐 하나 존경받지 않을 수 없는 자리의 존재들.
그러니 옆에 있던 진희는 저 보랏빛 이계의 신격에도 기절하지 않았으면서 지금은 기절하기 직전일 수밖에 없었다.
“오, 오빠……?”
진희가 이한성을 불렀다.
그러자 성시연이 슬쩍 째려보더니 진희에게 말했다.
“네가 그 친구구나? 우리 한성하고 친하다는.”
“네? 아,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이한성은 그런 성시연을 잠시 뒤로 무르고 진희에게 말했다.
“나 아직 네 친구 맞지?”
“…….”
“아니야?”
“……오빠. 아니, 이한성. 당신 누구예요?”
진희의 말에 한성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정체를 속인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다.
너무 급했고 이렇게 큰 충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그리고.
강요하는 것 같기도 했다.
친구가 맞냐고 물어본다고,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그게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안 된다. 그건 한성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확답을 받고 싶었다.
[초보 ‘창조신’을 위한 수행 목록.]
1. 천외천을 습격하는 ‘멸망종’ 101마리 처치.
2. 마계의 하늘을 뒤덮는 재앙 20가지 해결하기.
3. 현계를 습격한 ‘이계의 신격’ 포획하기.
.
.
.
21. 대학에서 친구 만들기.
21번째.
이게 마지막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거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다.
판도라의 주 전력이 이곳을 온 것은, 성시연이 마신의 임무를 모두 수행하여 마계를 완전하게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녀도 완전한 힘을 낼 수 없다.
쿵.
멀리 있던 한별이 먼저 위로 날아갔다. 진훈, 안혜림, 세르게이, 나디아 순으로 한 명씩 위로 날아갔다.
한성 옆에는 성시연만 팔짱을 끼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들 모두가 저 이계의 신격에게 달려든다고 해서 이길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저건 한국 대학교 위에 등장했던 것보다 강하다.
그 말은 아직 창조신이 되지 못한 한성은 저걸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거다.
한성의 친구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서다.
쿠우웅.
쿠우우우웅.
하늘이 번쩍이며 이계의 신격과 한성의 친구들이 부딪혔다.
그 여파에 다행히도 지상에 떨어지는 괴수들은 하나도 없었다.
한성이 미리 없앴던 괴수들, 그리고 이후에 떨어지는 괴수는 모두 친구들이 없앴으니까.
“진희야.”
“오빠.”
“……?”
“오빠는 날 친구라고 생각해요?”
“……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긴 했는데.”
그것도 혼자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을까.
참, 이렇게 보니까 웃긴다.
친구가 뭐라고, 이렇게 짧은 시간에 친구를 어떻게 사귀라는 것인지, 서로의 신뢰는 어떻고 이 생각의 간극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한성은 실패를 직감했다.
이런다고 임무를 완료했다고는 해 줄까?
“친구가 뭐 있나! 그냥 친하고, 어? 그냥 이 정도면 친구인 거지! 거짓말쟁이 빵꾸똥꾸야!”
그래, 이게 친구는 맞다.
하지만 시스템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 수행 목록 21번째, [친구 만들기]를 완료하였습니다.
- [친구란 격의 없는 신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오랜 당신의 과거, 당신이 가진 트라우마를 극복하였습니다.
별로 한 건 없다.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도, 어렸을 때 완전히 망가진 인간관계였는데, 그런 것 따위는 판도라에서 친구들을 만나면서 회복되었다.
완전히 잊은 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처음이다.
- [초보 ‘창조신’을 위한 수행 목록]을 모두 완료하였습니다.
- 당신은 창조신으로서 모든 자격을 갖췄습니다.
- 당신의 이명은 [창조신]으로 변경되었습니다.
- 당신의 ‘격’이 대폭 상승하였습니다.
- 이 ‘세계’에서 당신은 완전한 하나의 신으로 군림합니다. 판도라든, 지구든. 모두 당신의 ‘세계’입니다.
한성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완전한 힘. 아니, 창조신으로서의 가장 강한 지배력을 느꼈다.
그리고 저 보랏빛 이계의 신격이라는 ‘이물감’을 강하게 감지했고, 한성은 자리에서 살짝 떠올랐다.
“고맙다, 진희.”
한성은 바꿨던 얼굴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러고 보니 내 감이 맞았던 거잖아!”
“내가 계속 말했잖아!”
“아니, 그거 말고! 전에 검 휘둘렀을 때부터 뭔가 비슷한 느낌이었다고!”
“오, 그걸 느꼈어? 형(形)은 최대한 다르게 한 건데.”
“훗, 제가 재능이 좀……, 아니, 이게 아니잖아!”
“하여튼, 좀 피해 있어. 학교에서 봅시다.”
“학교 계속 나오게요?”
“그럼, 나가야지. 꽤 재미있더라.”
이런 인간관계.
좋았다.
한성은 친구들이 버티고 있는 곳으로 날았다.
번쩍.
하늘은 하얀빛으로 물들었다.
* * *
“오빠!”
“왜.”
“우리 학교에 교수가 새로 온대요!”
한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중요할 게 있을까.
그런데 진희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었다.
“세 명이 들어오는데, 한 분은 ‘용혈’을 이은 판도라 분이라네요. 마력 무기 제작하고 마법의 기본을 알려주실 건데, 어려 보이는데 엄청 나이가 많대요.”
“아……, 그래?”
뭔가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또! 마기를 사용하는 분도 온다는데, 인간이긴 한데 마계에서 꽤 한다는 분이라네요. 게다가 근접 전투에 일가견이 있어서 암살이랑 마기에 관한 기본 이론. 그리고 마기 면역과 관련된 수업을 할 거래요.”
“……이 정도면 내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네가 눈치가 없는 거 같은데?”
한성이 그렇게 말했지만, 진희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성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또 누구 온대?”
“……창 쓰는 분도 오신다는데.”
“판도라 사람인데 신격도 높고, 그 안에서는 창으로 아주 유명하고……, 러시아 사람이겠지? 혹시 이름은 아니?”
“아니, 그걸 어떻게. 이름이요?”
“으흠. 이놈들이 갑자기 왜 오지?”
한성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강의실을 찾아가던 둘 시야에 롤스 로이스와 스포츠카가 도착했다.
롤스 로이스에서는 역시나 세르게이가 내렸고, 스포츠카에서는 성시연과 이하얀이 손을 잡고 내렸다.
“헉! 오빠! 호, 혹시 저분들 그때……!”
“응, 내 여자 친구랑 내 딸. 그리고 세르게이까지 왔네.”
한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아주 좋다.
친구와 여자 친구가 교수로 있으면 참 좋겠다.
“에휴.”
그래, 그거야 그렇다 친다.
어차피 평범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모이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을 거 같은 확고하고 분명한 감이 오는 것은 무엇일까.
한성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옆에선 진희가 연예인을 본 팬처럼 어쩔 줄 몰라 방방 뛰었고 하얀이는 한성에게 곧장 날아와 안겼으며, 성시연과 세르게이는 갑자기 달려드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앞으로 참 걱정이다.
이 학교생활.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