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5화
제5편 균열의 잔재
일련의 사태는 초반의 심각성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안쪽에서 한성과 진희를 선두로 학생들이 멀쩡하게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나왔을 때, 건물은 붕괴했다.
이한나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생존자나 사망자가 있지는 않은지 조사를 지시했고 빠져나온 학생 중에서도 외상이나 정신적 문제가 있는지 철저하게 대처했다.
동시에, 가장 앞서 나오던 이한성과 안진희. 그리고 이민성을 불렀다.
이한나는 이민성을 보곤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려 했지만, 이민성이 제지했다. 삼송가의 막내와 삼송 소속 PMC의 일개 팀장.
당연히 신분적 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로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큰일을 당했는데 이렇게 불러서 죄송해요. 하지만 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앞으로 또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인지. 혹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것을 알고 다른 학생과 경비대원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큰 위기는 아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해결하고 나왔으니까.
그리고 이곳에 있는 학생들이 평범한 학생인가. 아마 앞에 이한나라는 희대의 천재. 이번에 도입될 랭킹 시스템 최상위에 랭크될 이 하얀 늑대의 ‘대장’이라 불리는 여자보다야 약하겠지만, 모두 한가락 했던 이들이다.
그 말은 판도라 안에서였지만,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고 이런 경험은 수도 없이 많다는 거다.
그렇기에 진희는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느라 바빴고 이민성은 하품이나 쩍쩍 해대고 있었다.
그중에 이한성만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이한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자가 왜 여기 있지?’
온리 원 축제에서 만났던 친구다.
토르의 진전을 이었고 콜로세움에서 한성과의 전투에서 온전한 신격에 닿았던 여자 아닌가. 그리고 함께 일주일을 보내며 여러 일을 겪었기에 꽤 친근한 느낌이었다.
“사실 저는 이게 뭔지 잘 모릅니다.”
한성이 입을 먼저 열었다.
그리고 진희를 바라봤다.
진희는 핸드폰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한성, 한나, 민성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진희는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 표정에 한성이 입을 열었다.
“뭔가 안다면. 그리고 앞으로 우리 말고 다른 이들이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는 걸 말해주는 게 좋아.”
강요는 아니지만, 암묵적인 강요.
진희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제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아니다. 저희 LGI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들은 건 한동안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한나는 입을 달싹였다.
그게 언제일지, 그사이에 똑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를 생각한 모양이다. 그 모습에 진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로 내일, 기자회견을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제야 이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알게 된 것은 우리 LGI 산하 PMC인 [검은 여명]이라는 곳에서 강원도에 흩어진 균열의 잔재를 추적할 때였습니다. 보랏빛 연기가 흐르는 던전이 있었습니다.”
“음, 진희 너도 그쪽 소속인가?”
한성의 물음에 진희가 당황한 듯 어버버 했다.
“……오빠, 제가 물어볼 게 많거든요? 나중에 따로 얘기하시죠!?”
“그, 그럽시다.”
“하여튼, 검은 여명은 그 던전 탐사를 시작했죠. 클리어가 가능한 곳인지, 혹은 한반도에 위협이 될 곳인지. 여러 정황상 반드시 무엇인지는 알아야 했습니다.”
“오, 한반도의 수호까지?”
“…….”
“그만할게…….”
한성은 너무 딱딱한 분위기를 눌러보려 했지만, 괜한 눈총만 받았다.
“하여튼, 그 균열에서 발견한 건데, 이능 사용 불가. 아예 통하지도 않죠. 하지만 멀리서 이능으로 자동차를 던지는 등 간접적인 공격은 통했죠.”
“그 균열 던전은 끝까지 가 봤어?”
“아니요. 도전 세 번 동안 서른의 희생자가 생겼고 더는 진입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자리에 벙커를 세우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놨어요.”
“희생자 수준은?”
“포션으로 순간적으로 판도라에서의 신격을 되찾은 ‘비천한 신격’ 1명, 비천한 신격이지만, 이곳에선 A등급 정도인 5명. 그리고 이하 B등급 24명.”
“거의 최정예네.”
이한나의 혼잣말이었다.
현 지구의 수준에서 보면 저 정도 질과 양이라면, 클리어하지 못할 던전이 없는 거고, 웬만한 작은 나라의 정권을 교체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이다.
그리고 판도라에서의 신격을 회복해주는 포션? 말이 포션이지, 거의 신격을 통째로 마시는 것과 같다. 그것의 가격은 10만 DP.
[신격 증폭의 환상(보물)]
지금 환율로 대입해보면 1,200억 원 정도 된다.
그들의 장비도 있었을 테고……, 저 정도 수준이면.
“끝에 있는 존재는 최소 온전한 신격 정도는 되겠군.”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한성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말하는데 바로 알아듣는 게 신기했다. 생각해보면, 한성처럼 한 번쯤은 ‘게임’으로는 후반부까지 갔던 이들이었을 테고, 판도라에서는 비천한 신격을 찍었던 이들이기에 가능한 상황인 거다.
재미있었다.
“아, 그것보다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죠?”
이한나의 물음에 진희와 민성이 한성을 바라봤다.
“…….”
한성의 침묵에도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검술로요.”
“에?”
“제 뛰어난 검술로 괴수를 베고, 괴수를 지나쳐 ‘핵’과 같은 에너지 집합체를 찾아서 갈랐죠. 그랬더니 재생력이 사라지고 괴수들이 주저앉았어요. 그 후에는 뭐, 그냥 걸어서 나온 거고.”
“…….”
“간단하죠?”
“그, 혹시 마력이 F등급 아니었습니까?”
“맞죠.”
“이능도 안 통하는데…….”
한성은 속으로 ‘영력’이라 명명한 ‘초끈’ 혹은 ‘신격’의 힘을 설명할까 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하는 게 더 복잡할 거 같았다.
“검술이 뛰어난 거죠.”
“그게 가능합니까?”
“저도 궁금했어요! 어떻게 그게 그냥 검술일 수가 있죠? 분명 이능 아니면 마법 같았는데!”
진희도 때를 놓치지 않고 물었고 이민성도 궁금하긴 했는지 고개를 불쑥 들어 한성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음, 보여드릴까요?”
한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르릉.
크게 좋은 검은 아니다. 하얀이가 대충 만든 검이었으니까. 아, 그래도 [보물] 등급 정도는 된다.
“명검이군요.”
이한나가 감탄하듯 읊조렸다.
날에서 공간마저 자를 듯한 예기가 흘렀고 검 면과 손잡이 등 어떤 곳에서도 작은 흠집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놓고 손을 뻗고 싶었다.
완벽한 명검이다.
진희도 그제야 그 검이 제대로 보인 것인지, 입을 쩍 벌리고 침을 흘리기까지 했다.
“에이, 더러워.”
“악! 아니, 이건 실수에요!”
“네네, 그러시겠죠.”
한성은 그렇게 말하곤 뒤로 살짝 무르고 검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그어 내렸다.
“보여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내려그었을 뿐.
진희와 민성은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다.
하지만 이한나는 무언가 본 것 같았다.
“이, 이게 뭐죠? 왜 마력이…….”
“볼 수 있는 모양이군.”
마력을 볼 수 있는 마력 재능의 소유자인 거다. 진희와 민성의 재능이 생각 이상으로 낮은 것 같았다. 하긴, 이한나의 재능이 수십만 명 중에 하나 있을 법한 재능이긴 하다.
“뭐, 이런 겁니다.”
이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알 것 같다는 표정.
하지만 진희와 민성은 답답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한성을 바라봤다.
“뭐야! 나도 알려줘!”
“……내가 재능이 없는 건가.”
진희는 그나마 낫다. 이민성은 자조 섞인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였다.
“제발, 한 번만 더 해주세요! 아저씨! 아니, 오빠!”
한성은 진희의 통곡에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보랏빛 괴수를 죽일 때보다 느리게, 방금 내려그었을 때보다 배는 느리게 천천히 검을 내렸다.
후우웅.
대기의 움직임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안의 마력의 대류(對流)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고요한 호수의 표면이 원래의 대류였다면, 지금은 작은 파동을 만들어냈고 그 파동은 저 끝에서 거대한 파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파도가 어딘가 닿기 전, 한성은 검을 거뒀다.
“느꼈어?”
한성이 웃으며 물었다.
털썩.
하지만 진희는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한나와 이민성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못 보고 또 보여달라고 하더니, 이번엔 무언가를 본 것인지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한성은 진희를 두고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도 이민성은 진희를 위해서 주변에 마법진 몇 개를 설치해줬다. 공간 격리와 알람, 그리고 접근 금지 표식 등을 남긴 거다.
자리를 옮긴 한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저게 어떻게 온 거지?”
그걸 알아야 하는데, 진희가 없다.
하긴, 진희라도 모를 것이다.
알면 진즉에 말해겠지.
민성과 한나. 그리고 한성이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흠, 분명 판도라와 연결되는 균열은 아니고…….”
“피터라면 알 수도 있을 텐데.”
한성은 순간 흠칫 놀랐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다들 아는 게 정상이다.
피터가 얼마나 유명한 빌런인데.
“피터라…….”
“피터가 얼마나 악명 높은 빌런인데. 분명, 이 일의 발단에도 피터가 관여되었을 거야.”
“맞아. 딱 봐도 이계의 괴물들이잖아.”
하지만 다들 피터에 관해서 자세히는 모른다.
간간이 소식은 접했을 거다.
판도라에서의 최후의 전쟁. 그곳에서 피터는 인류의 편에 섰다. 마신과 맞섰고 천외천과 맞섰으며 창조신과 맞섰다. 그런데, 그 조각난 장면들로 피터가 어떤 생각을 지녔기에 그런 상황에 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을 거다.
일시적인 동맹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말이다.
“피터라. 피터.”
한성의 혼잣말이었다.
한나와 민성은 자기들끼리 지금의 피터는 어떻고 어떻게 되었을 거라 망상을 떠들고 있었는데, 그리 신빙성 있는 말은 없었다.
지금 피터는 이계의 경계로 갔다.
아마 다른 이계로 넘어갔을 확률이 높다.
원래 이계의 신격이면서 그레이트 올드 원인 크툴루와 계약했으며 이번에 위대한 신격에 올라, 크툴루의 온전한 힘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힘을 끌어 쓰기 위해선 다른 차원에서도 자신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 또, 다른 이계에서 비집고 들어오는 차원을 막아야 한다.
그런 말들을 하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성이 판도라와 현실을 이었을 때 크툴루가 말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안다면, 그로 인한 비틀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알겠지.’
이런 말을 남겼다.
‘너의 신격을 담보로, 내 격을 소모해 도와줄 수 있다. 그에 따른 뒷감당은 모두 너의 신격. 그리고 너의 영혼이 지게 될 거다.’
또, 이런 말까지.
그게 걸렸다.
비틀림의 영향이 이런 것으로 오는 건 아닐지. 그 영향이 점점 거대해져 어느 순간, 한성과 한성의 소중한 사람을 덮쳐오는 것은 아닐지.
마음에 걸렸다.
“뭐, 대충 알았으니, 우리는 일어날까?”
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한나와 이민성까지 심각한 얼굴이었지만, 한성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속으론 이들보다 더 심각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가더라도 혼자 간다.
그리고 피터를 직접 찾아갈 거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일단 빠진다.
“……그래요. 저희는 어찌 되었든 학생이니까요.”
민성이 한성을 따라 일어났다.
아직은 심각하지 않다. 그리고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은 이곳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경비 책임자인 이한나 플레이어와 삼송. 혹은 LGI가 알아서 할 거다.
그게 맞는 거다.
그때, 한쪽에 앉아있던 진희도 눈을 떴다.
눈동자는 이전보다 훨씬 깊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