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1화
제1편 미션 임파서블
“으흠. 상쾌해. 이게 바로 서울의 공기인가.”
한성은 수많은 차량이 지나다니는 도로에서 변태처럼 매연의 향을 음미했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서울의 공기는 그렇게 탁할 수가 없었다.
한성은 청바지에 흰 티를 입고 등엔 백팩까지 맸다.
그의 눈앞에는 큼지막한 대학 정문이 보였다. 한성은 지금 대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평범하게 옷을 입고 버스까지 탔다.
아주 평범하게.
이쯤에 궁금할 것이다.
갑자기 대학교는 왜 가냐고?
미션이었다.
창조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행 중 하나.
[초보 ‘창조신’을 위한 수행 목록.]
1. 천외천을 습격하는 ‘멸망종’ 101마리 처치.
2. 마계의 하늘을 뒤덮는 재앙 20가지 해결하기.
3. 현계를 습격한 ‘이계의 신격’ 포획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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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대학에서 친구 만들기.
뭐 이딴 ‘수행’이 있을까 싶을 거다.
한성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한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한성은 지구에서 친구라는 게 없었으니까.
이곳에선 이룬 게 하나도 없었다.
판도라에서야 친구도 많고 업적도 셀 수 없이 세웠으며, 이제는 창조신의 자리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한성은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뉴스에 이름이 알려지긴 했다.
- 이한성이라는 영웅은 [판도라]에서 최종 장까지 클리어한 영웅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 판도라에서 ‘혼돈’과 ‘마계’에서 활약했다는 판도라 속 튜브의 증거 영상을 통해…….
- [종천의 구도자]였던 그는 [창조신의 수행자]라는 이명으로 활동 중이며, 현재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으며…….
한성은 지금 얼굴을 바꾼 상태다.
당연하게도 이한성이 살던 판도라가 이곳으로 연결되었기에 이한성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분명 원래 얼굴로 활동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하고 기자들에게 둘러싸일 것이다.
그래서 바꿨다.
하지만 이미 99에 달하는 매력을 가진 한성이었기에 바꿔도 그 얼굴은 어디 가지 않았다.
‘뭐야. 연예인이야? 배우인가?’
‘와, 콧대 봐. 속눈썹은 뭐 저리 길어.’
‘대박. 우리 학교에 실기 시험 보러 온 건가?’
‘미쳤다. 사진 한 번만 찍자고 할까?’
‘야, 번호를 달라고 해!’
‘저 얼굴인데 주겠냐? 이럴 땐, 사진 찍어달라고 하고 사진 받는다고 번호를 받아야…….’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왔다.
아무리 한성이 얼굴을 바꿨다고 해도 신격이나 능력치가 어디 가는 게 아니다. 물론, 지금 한성은 ‘수행’을 위해 많은 신격을 제한했다고 해도 지구 자체에 한성보다 높은 신격을 지닌 사람은 없다.
이계의 신격이 미쳤다고 지구를 쳐들어오지 않는 한 말이다.
- 실기 시험을 보기 위해 모인 수험생 여러분은 이곳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명단을 확인하시고 알맞은 시험장으로…….
한성은 수많은 시선을 즐기며 시험장으로 향했다.
‘친구를 만들어라. 이거 참 쉬운 게 아닌데.’
친구의 기준은 무엇이며, 어떻게 얼마나 만들어야 하는지 나온 게 없다.
이 수행은 이렇게 애매한 미션들이 많다.
일례로, 멸망종 101마리를 죽이기 위해서 한성은 총 560마리가 넘어가는 멸망종을 죽였었다. 같은 종류면 안 되고, 하루에 열 마리 이상은 안 되며, 전에 잡았던 것과 같은 속성이면 안 되고.
참 어이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설명 한 줄 없다.
“뭐, 하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한성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실기 시험 방법을 숙지했다.
“첫 번째는 마력 측정, 두 번째는 블랙 키리윰에 흠집 내기, 세 번째는 가상현실에서 D등급 이상의 몬스터 사냥하기.”
모두 완료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각 분야에서 성공하든 실패하든 점수를 매겨 위에서부터 자르는 거다.
“참 간단명료하군.”
“쳇, 뭐가 간단하다는 거예요? 좀 하시나 봐요?”
옆에서 들린 소리의 주인공은 작은 키의 소녀였다. 한성은 그녀를 슥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못하지는 않죠?”
“와, 자신감 쩔어!”
“보니까. 그쪽도 못 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한성의 눈을 속일 순 없다.
이곳에 모인 수험생의 수준이 전부 보였는데, 이 소녀는 조금 특출난 편에 속했다.
“자, 다음 수험생. 이한성 씨 오세요.”
“이한성!?”
옆에 있던 소녀가 이름을 듣더니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작아지며 그럴 리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이런 학교에 올 리도 없었으며, 이렇게 생기지도 않았다.
잘 생겼다는 점은 똑같았지만, 또 다르기도 했다.
원래 이한성은 남자답다면 이 앞에 있는 이한성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
소녀는 괜히 기분이 나쁘다는 듯 이한성을 째려봤다.
“……왜 째려봅니까?”
“아,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좀 이상한 사람이네.”
한성은 그 말을 남기고 마력 측정을 위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소녀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다 이내 표정을 풀었다. 하긴, 초면에 잘못한 사람은 자기였으니까. 나중에 제대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토록 팬이었던 이한성이다.
예전부터 팬이었고 덕분에 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가 판도라를 구한 영웅이지 않은가.
‘흥, 조금 기분 나쁠 수도 있지.’
다 이름이 같기에 생긴 일이다.
* * *
한성은 마력 측정을 위한 시험장에 들어왔다.
어떻게 하면 적당한 수준의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밖에서 봤던 수험생의 수준이라면 비천한 신격도 높다.
다들 한 가닥 한다는 이들이 모이긴 했다.
방금 봤던 여자처럼…….
“자, 측정 끝났습니다.”
“에?”
한성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딴 생각하는 도중에 몸에 붉은 선이 훑고 지나간 건 봤는데…….
“마력이 거의 없으시네요.”
당연하다.
한성은 더 이상 마력을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세상에 넘쳐나는 마력을 사용하면 되고, 마력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초끈’을 이용하지 않는가.
“점수는 F입니다. 이거 잘못하시면 떨어지겠는데요? 다른 시험에서 잘 보셔야 할 겁니다.”
“아…….”
그래도 아예 탈락은 아닌 모양이다.
한성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시험장을 나왔다.
“아저씨. 잘 했어요? 몇 등급 나왔어요?”
아까 그 소녀다.
한성은 멍 때리며 그냥 말했다.
“F.”
“에? 거짓말. 그게 가능해요?”
한성은 말없이 성적 증명서를 보여줬다.
그곳엔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F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헐, 진짜네. 아저씨 마력 찐따였어요? 이능 특화인가.”
“딱히 이능 특화는 아닌데.”
“……죄송해요.”
“응? 뭐가?”
“아니, 아까 이상한 시선 보낸 것도 그렇고, 이번에 마력도 없는 찐따……가 아니라, 그냥…… 죄송해요!”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한성은 주변에 모이는 시선에 다급하게 말했다.
“고개 올려! 뭐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전 좀 잘생겼다고 나대는 사람인 줄…… 아니, 제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이름도 같고. 아니, 이것도 아닌가. 하여튼 죄송해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어나. 너 부른다! 시험 봐야지!”
“아! 시험! 이따 봐요, 그럼.”
소녀는 후다닥 뛰어갔다.
“……이상한 애네.”
한성은 다음 시험장을 향해 움직였다.
이러다가 떨어지면 큰일이다.
멸망종을 죽이고 재앙을 막는 것들을 다 했는데, 대학 하나 들어가지 못해서 친구도 못 만들고 창조신의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게 말이나 되는 가.
민망해서 다른 친구들한테 말도 못 꺼내겠다.
성시연은 또 얼마나 웃으며 놀려댈까.
“으으, 안 되겠어. 다음 시험은 좀 빡세게 해야지.”
* * *
이한나.
그녀는 한국 대학교 영웅 후보생을 뽑는 시험장에 와 있었다. 판도라가 그렇게 변한 이후로 그쪽 세상을 오갈 수 있었고, 그러면서 이룩한 신격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순 있었다.
그리고 삼송에 소속된 이한나는 [하얀 늑대]라는 이름의 삼송 소속 PMC에서 하나의 팀을 맡고 있었다.
“팀장님, 요즘 좀 이상하십니다.”
“뭐가.”
“매일 멍 때리고 있고, 딴생각하는 거 같은데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아무것도 없는데 뒤를 홱 돌아보기도 하고. 혹시 실연…….”
“확!”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혼난다. 집중해, 여기서 실력자들이 보일 거야.”
“쩝. 집중할 게 있습니까. 여기에 있는 애들은 모두 거기서 거기겠죠.”
“그렇게 생각하지 마. 모두가 우리처럼 돈이 필요하고 소속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한나의 말에 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맞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돈이 필요했기에 삼송의 후원 아래 판도라에 갔었고, 그곳에서 힘을 얻어 온 뒤에 삼송 아래 PMC인 [하얀 늑대]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콰직.
그때였다.
1m 두께의 블랙 키리윰에 최초로 구멍을 낸 사람이 보였다. 작은 소녀였는데, 자기 키만 한 대검을 들고 있었다.
“우워. 미쳤네. 저걸 뚫었다고? 신격도 없는데?”
이한나는 대원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머릿속을 뒤졌다. 저 정도의 실력자라면 리스트에 있어야 한다.
“LGI의 손녀네. 안진희. 이제 20살이 되었고 대변혁 이전에 [세상의 끝]이라는 게임에 푹 빠져 있었지. 운이 좋았던 케이스네.”
“접촉할 필요는 없겠죠?”
경쟁사인 LGI의 손녀다.
당연히 삼송 소속이 될 수 없는 사람.
“혹시 모르니까. 접촉은 꾸준히 해. 최소한 적은 만들지 말아야지.”
정보에 의하면 굉장히 독립적인 아이다.
LGI 회장이 굉장히 아끼기도 하고.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콰자자작!
그때였다.
반대쪽에서 블랙 키리윰이 통째로 찢겨 나갔다. 어떤 무식한 놈이 힘자랑하려고 했던 건지, 검을 휘두르자 블랙 키리윰이 수십 갈래로 썰린 것이다.
우오오오!
그 광경을 보던 수험생은 물론이고 관계자들 모두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었다.
“누구지?”
한나가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생긴 거로 봐서는 배우 뺨을 왕복으로 몇 대는 갈겨도 무죄가 될 것 같은 얼굴이다. 말도 안 되게 잘 생겼다.
마치 이한성처럼.
“이한성?”
“뭐!?”
명단을 보던 대원의 말에 이한나가 소리쳤다.
“아니, 동명이인 아니겠습니까. 얼굴이 전혀 다른데.”
“…….”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이한성이. 그 영웅 이한성이 이곳에 왜 오겠는가. 당연히 천외천이나 마계 어딘가에 있겠지. 아니면 다른 세상에 있을 수도 있고.
판도라를 나오면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를 오래 보지 못해서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우와 하여튼 대단하네. 저걸 저렇게 찢어 버렸다고? 게다가 완전 관종인데?”
대원의 말에 한나의 고개가 불쑥 올라왔다.
환호를 받아주며 손을 흔드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하는 짓도 완전히 이한성이다.
……하긴, 얼굴을 바꾸고 정체를 숨기고 싶었다면, 저렇게 행동하지도 않았을 거다. 블랙 키리윰을 찢어버리고 관중들에게 환호를 들으며 손을 흔들어?
설마 이한성이 관종이라도 그런 멍청한 짓을 할까.
그래, 이한나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한성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생긴 것도 마치 기생오라비처럼 생기지 않았는가. 뭔가 잘 생겼는데 재수 없게 생겼다. 차라리 이한성……, 아니. 이름까지 같아?
“기분 나쁘네. 저거…….”
“……제거합니까?”
“야! 뭔 소리야.”
“크흠. 장난이었습니다.”
“장난도 봐 가면서 해라. 죽고 싶지 않으면.”
“헤헤, 너무 심각한 표정이셨습니다.”
한나는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비슷하다.
아직도 헤벌쭉 웃으며 자신에게 환호를 보내는 이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비정상적이면서 괴상한 저 자태. 뭔가 굉장히 익숙하다.
“재미있겠네.”
저 남자와 LGI의 손녀.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몇의 시선까지.
뭔가 상당히 재미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