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
세상은 많은 게 변했다.
이지현은 갑작스럽게 아름다워진 풍경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어느 때보다 안전해진 서울, 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북적인다. 절반이 외국인이고 나머지 절반 중에 절반은 [판도라]라는 대륙에서 온 이계인이다.
그리고 남은 사람이 한국인이랄까.
또, 소수의 이종족이 있다.
그중에는 엘프, 수인, 마족, 이계인, 드래고니안······?
“하얀아!”
“이모? 이모다!”
“왜 혼자 있어. 한성은?”
“아빠? 아빠는 저기 데이트 하러 갔어요······, 나 빼놓고.”
“음. 그래? 한성이 나빴네. 또 마계로 놀러 간 거야?”
“웅······, 에이, 머리 검은 아빠 다 챙겨봤자 소용없어! 내가 엎고 전쟁터에 나가고! 이 한 몸 희생해서 신들하고 막 싸우고 응? 내가 얼마나 잘 해줬는데, 연애한다고 정신없고.”
이지현은 하얀이가 투덜거리는 것을 들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강남이라 시선이 쏠릴까봐 뿔과 꼬리는 넣어놓은 상태였다. 아무리 이종족이 돌아다니는 세상이라지만, 용혈은 아직 흔치 않으니까.
“훈이는?”
“진훈 삼촌은 북극에 악신(惡神) 하나 생겨서 토벌하러 갔어요. 한국 영웅 아카데미······, 라는 저기 판도라 안쪽 한국 아카데미요.”
이지현은 웃음이 나왔다.
[판도라]라는 대륙.
그리고 [판도라의 계단]이라는 ‘탑’.
그게 생기면서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방금 얘기가 나온 것처럼 나라 이름이 겹친다는 것. 판도라 대한민국, 이계 대한민국. 누군가는 가짜 한국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그런데 하얀이는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저 할머니 보러 가게요! 할아버지랑······, 물론 이모도 보고 싶었어요!”
이지현은 그런 하얀이가 너무나 귀여웠다.
앓아누웠던 어머니, 한성을 찾아 헤맸던 아버지. 두 분 모두 한성이 돌아오고 종일 울다가 쓰러졌다. 다행인지 한성이 품에서 꺼낸 [엘릭서]라는 말도 안 되는 기적적인 포션을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를 꺼내 하나씩 나눠줬다.
어머니야 아팠으니까.
아버지도 지쳐 늙었으니까.
근데 멀쩡한 이지현까지 준 거다.
이 세상에서 하나를 팔면 수천억 원은 쉽게 벌 수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물약을 말이다. 이제 세상이 연결되면서 전보다는 쉽게 구할 수 있다고 하지만, 못해도 수천억.
당연히 그런 걸 먹으라고 한다면 누가 쉽게 먹을 수 있겠는가.
다들 기겁하고 있을 때, 이한성은 품에서 다섯 게의 엘릭서를 더 꺼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런 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 꽤 부자에요.’
꽤.
이 부사의 뜻은 ‘보통보다 더 한 정도.’이지 않는가. 나중에 알고 보니, 판도라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으며 판도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계의 도시]가 자리 잡은 땅을 지닌 거부였다.
게다가 그냥 부자가 아니었다.
북극의 무슨 기지를 가지고 있고 세계 최대 기업의 최대 주주였으며, 유럽, 미국, 아마존 등의 수많은 금융권 및 던전 등의 부동산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그게 끝인가.
그 안에서는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튜브라고 했다. 구독자는 23억 정도 되고 생방송 한 번 틀면 40억까지도 들어온다고 한다. 요즘은 큼지막한 재앙이 없어서 확 줄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억 단위다.
“많이 변했지.”
좋았다.
예전에도 막 밝아지고 방안에만 있다가 밖을 나가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젠 더 밝아졌다. 조금은 과할 정도로······,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좋은 모습이다.
친구도 많이 생겼다.
“평범한 친구들은 아니지만······.”
한 명은 천사들의 군단을 이끄는 ‘대천사장’이자 [악의 심판자]라는 이명을 지닌 판도라 대륙 최고의 위대한 신격, 진훈.
전 세계 최고 마법 가문의 주인이 되었고 이번에 새롭게 연결된 [요계]를 다스리게 된 [요괴왕] 한별.
판도라 대륙이 최고, 최대 기업인 제현 그룹의 주인인 길이현, 남극의 주인이 마법의 아버지 길성현, 아마존에서 원탁의 기사를 이끄는 아서왕 안혜림, 천외천의 아스가르드에서 직접 오딘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얜 샤를, 게다가 그 안의 라엘 카네기라는 전 세계 최고 부자 가문의 주인.
별의별 친구가 다 있었다.
이젠 그것도 모자라서 여자친구가 [마왕]이다.
게다가 차기 [마신]이 되기 위해 업적을 쌓는 수행중이라는데,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여튼, 예전부터 평범한 놈은 아니었어.”
꾹.
하얀이가 이지현의 손을 잡고는 올려다봤다.
좋았다.
부모님도 처음엔 하얀이를 보고 놀랐다. 그럴 만하지.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었던 한성이 딸이라고 데려왔으니. 그것뿐이면 모르겠지만, 인간이 아닌 용의 피를 이은 드래고니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거의 기절하시는 줄 알았다.
엘릭서의 효능이었는지, 부모님은 웬만한 30대보다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게 되어서 기절은 하지 않았다.
그때, 멈췄어야 했다.
그런데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하얀이가 이번 천외천에 새로 만들어질 천외천 [치안국]의 국장이 된다는 말까지 꺼냈다. 당연히 부모님은 그걸 알아듣지 못했다.
한성은 그걸 또 설명한다고.
‘잘못을 저지른 신을 때려잡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하얀이는.
‘저 신 아주 잘 죽여요!’
라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부모님은 웃어 넘겼다.
장난인 줄 알았던 거다.
혹은 게임에서 하는 일이거나.
요즘 10대는 이런저런 게임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게임 너무 많이 하면 안 좋아. 공부도 하고 뛰어 놀기도 해야 해.’
‘네! 저 공부도 하고 뛰어 놀기도 할게요!’
라고 사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부모님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하여튼, 요즘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가 생겼다며 알뜰살뜰 챙긴다. 한성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매일 같이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가고, 또 언제는 업적 쌓느라 바쁘다면서······.
아, 맞다.
이한성은 이제 비어버린 창조신 자리에 앉는다며 수행중이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 성공하여 그 세계를 구할 수 있을 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바쁘다는데······.
“맨날 보면 여자 친구만 만나는 것 같단 말이지.”
며칠 후엔 여자 친구를 소개해준다고 했는데, 말만 들어도 무섭다.
마왕이라니······.
가끔 뉴스에서나 보던 괴물들. 마물, 마족들의 왕이라는 것 아닌가. 지금은 그런 일이 없는데, 예전엔 사람도 많이 죽이고 그랬던 것들인데 말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지현은 시누이 히스테리 같은 걸 부렸다가는······, 그런 것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모! 저거, 저거 사가요!”
“닭강정?”
“네! 할머니가 좋아했어요!”
이지현은 하얀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러니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지현은 정말 오랜만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 * *
이한성은 마계의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성시연이 완전한 하나의 ‘게헨나 투신’이 되어 [멸망종]으로 분류되는 이 세계의 ‘바이러스’를 잡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부터, 설정을 통해 성장하고 있어 왔던 게 아니라, 한성이 이 세계. 그러니까 이제는 판도라라고 불리는 이곳과 지구를 연결했기에 생겨난 [재앙]이다.
서로 다른 두 세계.
그리고 하나의 허상.
두 세계를 통합하면서 허상이었던 세계를 실제하게 했다.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한성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마신과 창조신을 제물로, 한성이 판도라의 중심이 되면서 아주 희미한 확률을 뚫어내 성공해야 했으니까. 별의별 사건들이 있었지만,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이렇게 평화를 찾았으니까.
한성이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시연이 옆으로 날아왔다. 이미 마왕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고 저 먼 곳에는 거대한 검은 무언가가 쓰러져 있었다.
이미 존재력을 다 한 바이러스 [멸망종]이었다.
“후, 어렵지는 않았네.”
“고생했어.”
성시연은 이미 위대한 신격에 다다라 태초의 신격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 [멸망종]을 꾸준히 잡으며 서사를 완성하고 마계 전체를 발아래 둔다면 마신이 될 수 있다.
어렵지만, 성시연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훈은?”
“뭐, 심판자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성시연은 악(惡)의 화신이 되었고 진훈은 선의 화신이 되었으니,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물론, 서로 대화를 통해 잘 해결하긴 했다.
선과 악.
이제는 그저 진영의 차이일 뿐이었다.
이것도 그리 오래가진 않을 거다. 원래 진영 간의 전쟁이 없다고 언제나 평화가 지속되진 않으니까. 오히려 가끔은 싸우고 밀고 당겨야 균형이 유지되는 법이다.
“아, 그것보다 다음은 어디로 가?”
“이계의 ‘경계’로 갈 거 같아. 지금 ‘경계’는 지금 피터가 맡고 있지?”
“응. 다른 세계까지 먹으려고 마음먹는 중인 거 같아서 조금 불안하긴 해.”
피터는 이계의 신격과 계약했다.
그레이트 올드 원.
사실, 이번에 두 세계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피터와 계약한 크툴루의 힘이 컸다. 일단 수많은 차원에 걸쳐진 존재이기에, ‘허상’이라는 세상 판도라와 이곳을 연결할 구멍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줬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안다면, 그로 인한 비틀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도 알겠지.’
한성이 크툴루를 만나 했던 대화의 일부였다.
‘너의 신격을 담보로, 내 격을 소모해 도와줄 수 있다. 그에 따른 뒷감당은 모두 너의 신격. 그리고 너의 영혼이 지게 될 거다.’
만약, 둘 중에 하나의 세계가 무너진다면.
혹은 두 세계의 연결에 큰 문제가 생긴다면, 모든 것은 한성이 져야 한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한성의 친구들은 세계 곳곳에 퍼져 이렇게 균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한성은 직접 창조신의 자리를 위해 수련을 시작했다.
그래야만 이 세계가 오래오래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으니까.
한성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잘 하고 와.”
한성은 성시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참 신기했다.
처음에 성시연을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카지노에서 만났다. 그녀의 살기에 죽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렸고, 밤의 존재인 벤토가 등장했고 그곳에서 성시연을 구했다.
그 인연이 지금까지 지어져, 이제는 연인이 되었다.
“아, 루시퍼는 잘 하고 있나?”
그렇게 날뛰던 루시퍼.
이제는 세계가 더 이상 멸망하지 않아도 되자, 다시 천사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은 진훈과 함께 움직이며 아까 성시연이 죽였던 [바이러스]와 같은 천외천의 [멸망종]을 잡으러 다닌다.
가끔 마계에서 올라오는 마물을 잡기도 하고.
그리고 케이플람 가드니스는 성역을 지키는 수호룡이 되었고 말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태초의 신격은 달랐다.
금방 회복하더니 전성기의 힘을 되찾았다.
“다들 잘 살고 있네.”
“그러게. 평화······, 많이 평화로워졌지.”
“그래, 최소한 멸망이 예정되어 있진 안잖아.”
그거면 된 거다.
사는 게 언제까지나 행복할 수는 없는 법.
그저 지금 행복하고 평화롭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앞으로의 미래는 서로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면 된다.
“감사한 거지.”
“정말, 감사하지.”
성시연은 회색빛 하늘 위에 붉게 퍼지는 핏빛을 바라보며 한성의 어깨에 기댔다.
서로 하나씩 만들어 나가면 된다.
차근차근. 행복하게.
< 에필로그. > 끝
ⓒ [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