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두 살린다. >
한성이 [태초로 향하는 길]을 벗어나기 직전.
창조신을 몇 번 팬 이후에, 이 세계를 담보로 질문했다.
“난 이 세계를 없앨 거야. 다시는 윤회하지 못하도록.”
“······넌 할 수 없다.”
그렇게 배짱을 부렸다.
그래서 정말 없애려고 작업했다.
천외천의 중심인 ‘하늘’을 제물로 삼아 뜻을 함께한 어둠과 함께 마계와 충돌시키려 했다. 이곳의 모두는 무조건 죽는다. 창조신이 형성한 [윤회 시스템] 자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정말로 끝이 되는 거다.
한성이 그 짓을 시작했을 때.
“넌 못 해. 너의 소중한 사람을 모두 죽이겠다고?”
30% 정도 진행되었을 때.
“윤회는 끝나는 거야! 인간은, 다른 인간이 필요하잖아!”
60% 정도였을 때.
“너가 태어났던 그 세상도 끝나.”
90%가 되어 천외천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을 때.
“하······, 이제 되돌릴 수 없어. 도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이 세상을 지킬 유일한 방법이니까.”
창조신은 침묵했다.
91%.
92%.
93%.
“방법이 한 가지 있다.”
한성은 눈을 빛냈다.
94%.
95%.
“알아서 어쩌려고. 어차피 이건 되돌리지 못한다. 이 세상, 너희 세상. 모든 게 무너진단 말이다.”
“되돌릴 수 있어. 대답이나 해.”
96%.
97%.
창조신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99%가 되었을 때.
한성은 자살을 했다.
그 세상은, 모든 게 사라질 뻔한 폭발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게 한성이 [태초로 향하는 길]에서 가진 가장 강한 힘이었다.
언제든 죽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 말이다.
물론, 오직 허상뿐인 이 세상에서 버틸 수만 있다는 가정이 필요하겠지만.
* * *
한성은 [태초로 향하는 길]에서 마법, 검, 체술, 이능력, 초끈 등등. 수많은 힘을 기르는 것에 집중했다. 어차피 현실로 가지고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경험하고 머릿속에 넣었다는 게 컸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둠을 마주하고, 빛을 마주했을 때.
그들에게 죽으면서, 다시 도전하고 깨지면서 깨달았다.
빛과 어둠.
둘 다 그저 한낱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에너지원에 불과하다.
[태초로 향하는 길]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둠이 한성을 맞이했다.
“살아 돌아왔군.”
한성은 그곳에서 수많은 세월을 보냈지만, 이곳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고맙다.”
한성은 어둠에게 감사했다.
그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고통에 괴로웠지만, 그만큼 커다란 힘을 구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세상을 삼킬 힘을 줘서.”
“······?”
어둠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한성의 말 때문이 아니라, 한성의 영혼에 각인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둠이 뒷걸음질 쳤다.
“넌······, 무엇이지?”
어둠이 물었다.
한성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둠이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이 세계 안에서 적용되는 하나의 경계이자 존재의 가치를 나누는 ‘격’. 그것은 이 시스템 안에서 절대적인 힘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신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온전한 신격은 드높은 신격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드높은 신격은 위대한 신격에게 대항하지 못하며.
위대한 신격은 태초의 신격.
태초의 신격에서도 계급이 나뉜다.
처음엔 이게 그저 ‘힘’의 크기로 나뉘는 차이이며, 위에서 아래를 누르기 위한 ‘제약’에 불과한 줄만 알았다. 초끈이 그 경계에 있으며, 기초가 된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 격은 하나의 에너지라는 것도.
그런데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태초로 향하는 길]의 마지막.
창조신과의 대화에서 깨달았다.
“나는 외부인이야.”
빛과 어둠. 그리고 이 세계가 형성하는 시스템에 발을 걸치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외부인인 거다.
‘초끈’이라는 이 시스템의 근원에 닿아 있는 한성은 특히나 외부인이면서, 시스템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니기도 했다는 뜻이다.
그 말은 이런 격이라는 제약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너희가 말하는 유일한 변수.”
“······.”
“그리고 이 허상뿐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실제하는 존재.”
“······!”
마신. 즉, 어둠도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마신은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이 세계를 완전하게 없애는 것이라고 했다. 한성이 한 말과 다르지 않다.
이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멸망했다.
아무리 창조신이라고 해도 이 세계에 얽매인 존재.
그라도 멸망한 세상을 되돌릴 순 없는 거다.
“일단은.”
한성인 어둠에게 손을 뻗었다.
어둠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미 어둠은 한낱 ‘어둠’으로 화한 후였다.
* * *
한성은 단순히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다.
‘빛’은 당연히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뒤로 피했다. 그런데 한성은 어느 순간, 그의 앞에 있었고 격렬한 통증이 명치를 통해 전신으로 퍼졌다.
“끄억.”
한성은 별말 없이 그에게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퍼억.
도저히 신들의 싸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 단순한 싸움이다. 그런데 그런 싸움에 빛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왜 그러는지 누구도 몰랐다.
“뭐, 뭐야! 끄윽.”
한성은 말없이 계속 팼다.
이럴 땐 매가 필요한 거다.
그러자 빛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도 않고 계속 두들기니 무서운 거다.
차라리 뭔가를 원하면 건네준다고 하면서 시간이라도 끌어 볼텐데.
게다가 자존심도 한몫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지도 알 수 없는데, 무엇을 원하냐고 제발 그만해 달라고 빌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제, 젠장!”
빛은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태초의 신격을 끌어올려 공간을 비틀어 한성을 튕겨내고 도망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되지 않았다.
콰직.
한성이 빛의 다리를 밟아 부러뜨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퍼억.
다시 구타가 시작되었다.
‘왜?’
빛의 머릿속에는 공포가 가득 찼고 의문 또한 들어섰다.
‘어떻게?’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만. 제발 그만.’
“궁금하지?”
빛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고통은 겪어 본 적이 없다. 항상 이 세계의 꼭대기에 있었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격 위에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버티기 힘들었다.
“아직인가 보네.”
한성은 말없이 구타를 시작했다.
아직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아직도 자기가 정말 창조신인 줄 안다. 오래전 사라져 버린 세계가 아직도 자기 것인줄 아는 거다.
이럴 땐, 바닥까지 떨어뜨려 줘야 한다.
그렇게.
한성은 빛을 쓰러뜨렸다.
겨우 숨만 쉬며 살아있을 정도로 말이다.
한성이 마신을 하나의 에너지로 흡수한 덕분이다. 이것들도 거대할 뿐이지, 한낱 에너지에 불과했다. 그것은 빛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성은 그 에너지 위에 선 유일한 ‘실제’이다.
이 세계가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윤회 시스템]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걸 수많은 과거 속에서 깨달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게······.”
무릎을 꿇었다.
이 세계의 주인. 이 세계의 정상.
모든 이들의 왕인 빛이.
“미련한 놈.”
한성이 빛에게 말했다.
사실 넘볼 수 없는 벽이었다. 한성은. 아무리 이곳에서 ‘실제’하는 단 하나의 존재이고. 빛이든 어둠이든 이 ‘윤회’라는 이름의 허상이었지만.
강했다.
이 거대한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이제 다르다.
한성은 이미 이 허상 세계의 ‘외부인’이었으니까.
“하.”
뒤에서 그 광경을 모조리 보고 있던 루시퍼. 그리고 진훈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마신의 힘이 느껴졌다.
태초의 존재들만 가질 수 있는 압도적인 격.
하지만 그것만이었다면, 창조신을 저렇게 만들 수 없었을 거다.
“유일한 변수.”
모든 것은 하나의 상수.
변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변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한성.”
루시퍼의 말에 한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무표정이었다.
웃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관망하듯 이 세계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이 세계를 없앨 것인가.”
루시퍼도 오랜 시간 고민했다.
마신과 같은 생각이었다.
이 세계를 완전히 없애는 것.
그것만이 이 윤회를 끝내는 방법이다.
이 세계는 상수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한성이 이 세계를 없앤다고 해도 루시퍼는 만족할 수 있었다. 이 옆의 진훈이라는 친구도 전 회차의 기억이 남아 있는 모양인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다 아는 거다.
이 끊임없는 멸망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한성의 입에서는 예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아니. 모두 살린다.”
* * *
“저기 옆에 보이시죠? 저게 ‘균열’이라는 겁니다. 전 세계에 단 다섯 곳만 있는데, 우리 서울 중앙에 하나가 있죠.”
부드럽게 달리는 버스 안이다.
한강 다리 위에서 선생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20여 명의 중학생에게 ‘균열’을 설명한다.
“저곳을 중심으로 몬스터. 괴물들이 나오는 던전이 생겨나고 필드가 생기지만, 사람들은 또 저곳에 들어가서 ‘이능’이라는 것을 얻어오곤 합니다.”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저 거대한 균열을 보면서 듣는 것은 또 다르다. 저곳에서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오고 죽던 사람을 살리는 기적의 물건을 꺼내 온다.
바닥부터 하늘 높은 곳까지 솟은 검고 푸른 하나의 ‘벽’이다. 참 신기한 게 어디서 보나 평평한 그림처럼 보이지만, 위에서 보면 하나의 기둥으로 보인다.
가끔 일렁거리면서 겁을 줄 때도 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들어왔다가 나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초기엔 많은 아픔을 준 재앙이기도 했죠.”
저 균열이라는 생겼을 땐, 엄청난 혼란이 서울 전체를 뒤덮었다. 몬스터라는 괴물이 득실거리며 거리를 파괴하고 하늘엔 이상한 것들이 날아다녔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걸 잃었지만, 잘 버텨냈다.
그리고 서울에 이 균열이 있기에 지금의 한국은 강하다.
“이곳에 있는 누구나 균열을 한 번쯤은 갈 겁니다. 성인이 되고 자기의 의사를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말이죠. 혹은 이번에 신설된 영웅 사관학교를 가던지.”
이 세상에도 많은 게 변했다.
겨우 몇 개월 지나지 않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였다.
균열이 크게 꿀렁거렸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뭐, 뭐야!”
“선생님! 저거 이상해요!”
“꺄악! 무서워!”
평소와는 다른 흔들림이었다.
무엇인지 모를 급격한 변화에 모든 사람이 공포에 빠지기 시작했다. 선생이라는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내, 그 공포는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균열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고, 그 균열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버스 안의 학생들은 언제 무서워했냐는 듯 창문에 바짝 다가가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팟.
밝은 빛이 터지고 난 후.
그 자리엔 이미 균열이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그곳엔 웅장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 모두 살린다.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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