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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운은 만렙이다-185화 (185/200)

< 최후의 전쟁(1) >

성시연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무언가 큰 변화를 맞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체가 변하고 영혼이 달라진다.

누군가 ‘탈각’이라고 했던가. 성시연은 신들에게 제약받은 인간의 육체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영혼은 드높은 신격을 넘어 위대한 신격에 닿기 시작했다.

뿔이 길게 돋아났고 주변에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검은 띠가 주렁주렁 생성되었다. 날개는 총 여덟 쌍이 되었고 손과 발엔 보랏빛 연기가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저 허공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엄과 압도적인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명은 [역천의 마왕].

하늘을 거스르는 마왕이라는 뜻이며, 드높은 신격에 들지도 못했는데 사라진 기억을 어느 정도 되찾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탈각을 이루면서 사라진 과거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리 많지는 않다.

루시퍼나 무황처럼 항상 이곳까지 다다른 것은 아니었으니까. 천외천에 온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 전에 죽거나 훨씬 이전에 죽었다.

하지만 그 몇 번이면 충분했다.

그녀의 얼굴은 분노와 냉철함으로 가득했다.

“진훈!”

성시연이 진훈을 불렀다.

이미 진훈과 한별 또한 탈각을 이뤘다.

진훈은 저 앞에 신격과 싸우고 있는 무황 진강철처럼 천사의 날개와 무복을 입고 있었고 한별은 특이하게도 지금 계약한 요괴왕 어둑시니와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요괴왕은 덩치 큰 괴물이었고.

한별은 굉장한 미소년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짧게 돋아난 하얀 송곳니와 보랏빛으로 물든 눈매, 그리고 검고 투명한 기세로 이루어진 두 날개가 돋보였다. 그뿐이 아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역천의 마왕 성시연처럼 절로 왕의 기세를 머금고 있었다.

“가야 해.”

진훈이 성시연의 부름에 소리쳤다.

기억한다.

이곳은 뒤따라오는 안혜림, 얜 샤를, 피터, 세르게이, 나디아, 라엘 카네기, 길이현, 한구본, 소이현, 심우주면 충분하다. 게다가 앞에 무황, 케루빔, 패연과 세이건까지.

진훈은 이런 기억이 없다.

아니, 이렇게까지 많은 강자가 남았던 과거가 없었다.

그리고 이한성이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마지막 성시연이 봤던 광경에 이한성은 죽지 않을 거란 사실도 깨달았다.

모든 게 익숙하다.

조금 더 안정적인 상황이라는 게 조금 어색하긴 했다.

항상 이렇게 기억을 되찾으면 모두가 죽은 후의 상황이었으니까.

“한별, 가자.”

셋만 움직인다.

나머지는 동료는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없을 거다. 대부분 이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었었으니까.

셋이 빠졌다.

하지만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뒤쪽으로 합류했다.

황금빛을 줄줄이 뿜어내는 무황 진강철, 그에 비견되는 케루빔 이혜정. 그리고 용혈 중재자의 힘을 뽑아내 신격을 압도하고 있는 패연과 세이건.

하나같이 대단한 강자들이다.

그리고 그곳에 친구들이 합류했다. 인류 최후의 보루라는 이상한 전함까지 그들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드높은 이상의 신격이기에 과학의 산물은 소용이 없을 것 같았지만, 이 전함에 수백, 수천 명의 비천한 신격이 탑승해 있다.

그들이 지닌 이능과 특성으로 전함을 보조하고 그들이 지닌 마법과 마력으로 전함을 움직인다.

결코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다.

이곳은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나도 갈래요!”

이하얀이 성시연에게 날아왔다.

얜 샤를처럼 이하얀은 기억에 없다. 하지만 이한성과 연관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엔 이한성이 있었으니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당장은, 인류가 천외천을 공격한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한성이 계획했다는 것.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태초의 길’로 들어선 이한성은······, 반드시 살아올 거라는 것.

믿는다.

무조건 믿는다.

성시연은 그렇게 믿고 진훈, 한별, 이하얀과 함께 창조신의 성역으로 출발했다.

*  *  *

한성은 여행을 했다.

지난 52년간 [세상의 끝]을 플레이했던 것처럼,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성적을 내며 경매장에서 히든 아이템을 얻고 이것저것 일을 해결한다.

마치 직접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플레이어처럼 어느 한 명의 사람이 되어, 역사를 여행한다.

한 번은 괜찮았다.

충분히, 할만했고 그리 긴 시간이라고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두 번, 세 번, 다섯 번, 열 번이 되었을 때, 무언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고 울지도 않았다.

표정도 단단하게 변했다.

좋은 건가?

한성은 끝에 도달하지 못했다.

죽으면 다시 시작하고 죽으면 또 다시 시작한다.

답답했다.

제대로 이 몸을, 아니, 이 의식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한 번에 클리어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마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른 사람의 몸을 빌린 것처럼 답답하게 움직였다.

그래서 계속 죽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그게 백 번을 넘기고 오백 번 정도를 넘겼을 때.

한성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냥 죽고 싶었다.

친구들?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옆에서 성시연이 죽고 진훈이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 중간에 몇 번 쉬려고 주저앉아도 말을 잘 듣지 않는 이 몸은 계속 움직였다.

‘난 여기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끝내고 싶다.’

‘여기가 어디지?’

‘죽고 싶다.’

‘이게 뭐야. 캐릭터 하나 죽었네.’

그런 생각들의 연속.

밖이 생각났다.

그저 게임으로 이 세계를 경험하고 친구들을 만나다가 접속을 끊고 누나와 부모님을 만나 저녁을 먹는다. 심심하면 몇 없었던 친구 중 한 명을 만나 소주를 마시기도 한다.

참 아무것도 없었던 세상이었다.

제대로 된 친구도 거의 없었다.

어렸을 땐 더 했고, 튜버가 된 이후에나 생긴 같은 튜버 친구 몇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좋았다.

그 삶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 [세상의 끝]의 접속을 해지하시겠습니까?

아.

나갈 수 있는 건가?

이렇게 반복되는 ‘끝’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손이 절로 움직였다.

바로 나가려고, 친구들? 필요 없다.

가족이 먼저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푹 자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면 게임이나 하면서 튜브로 번 돈으로 맛있는 밥이나 사 먹고 미국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면서, 그냥 쉬고 싶었다.

한성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손을 뻗어 [YES]를 눌렀······.

미끄러졌다.

다시.

핏.

핏?

핏······?

왜 안 눌리는 거지?

잠깐, 아니. 난 왜 이걸 누르고 있는 거지?

‘아니야. 난 포기할 수 없어.’

운이 좋지 않아서······, 아니, 운이 좋아서 버튼을 누르는 손이 빗나갔다.

그제야 한성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온갖 역사의 격류 속에서 잃어버린 정신을 찾았다.

‘이게 아니야. 친구들을, 그들을 구해야 해.’

이 모든 것을 끝낼 사람은.

‘바로 나뿐이야.’

한성은 태초로의 걸음을 다시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어? 뭔가 이상하다.

전과는 크게 다른 길이다.

그곳에서 한성은 한 드래곤을 만났다. 수천 년 간 타고난 마법을 버리고 새로운 마법을 만들었다는 드래곤, 그를 만나 10년을 넘게 생활하며 [역행 마법]이라는 [드래곤을 사냥하는 마법] 또한 틀에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초월 영역의 마법.

한성은 새로운 마법의 경지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역사를 시작했다.

다섯 번, 열 번.

그때는 검성을 직접 만났다. 그러다 검성의 스승을 만났고 천마를 만났다. 그리고 그들 모두 우러러보는 [검의 신]을 만났다.

그래도 검을 잘 다룬다는 한성은 그의 검을 볼 수가 없었다. 한없이 수준 높은 그의 검무는 한성의 눈으로 담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검신]을 만난 첫 회차엔 그가 휘두르는 검의 발끝에도 머무를 수 없었다.

다음 회차에도 그를 다시 만났다.

세 번, 다섯 번, 열 번 정도 되었을 때.

한성은 검에 대해 깨달았다.

이게 검이구나.

[검신]을 따랐다. 그의 뒤를 따라 혼돈을 격파할 수 있었다. 아주 쉽게, 그는 위대한 신격에 불과했지만, 마계의 끝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였다.

아무리 검신이어도 마신에게는 안 되었다.

한성은 죽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한때는 무황의 밑에서 권(拳)을 배웠고 한때는 시간, 한때는 공간, 한때는 대장장이, 한때는 창을, 한때는 염력을. 이 세계관 곳곳에 숨어있는 기인들.

한성이 이곳에 52년을 지내면서, 그리고 다른 튜버들의 영상을 보면서도 알 수 없었던 고수를 찾아 헤맸다. 삼고초려는 기본이고 십 년을 기다린 적도 있었다.

재미있었다.

초기엔 죽을 것 같았고 포기하고 싶었다.

지루했고, 고통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어느 순간을 분기점으로 한성은 이런 삶이 즐거웠다.

경험은 누적되었고 그것은 한성 자체의 성장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태초에 닿는다.

마계를 넘어 천외천으로 도달한다.

그리고 창조신을 만난다.

*  *  *

무황은 뒤를 바라봤다.

수많은 인류의 용사들이 이곳에 있다. 천외천에서 신들을 향해 검을 내밀어 맞선다. 당연히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신.

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신들은 인간을 죽이고.

인간은 그런 신을 막는다.

하지만, 아무리 무황이 치천사인 세라핌이 되었고 아내 이혜정이 케루빔이라고 해도 저 무수한 신격을 이기기는 힘들다.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라엘 카네기가 운용하는 [인류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던 전함이 바닥에 처박혀 있었고 정현, 흑연의 병력. 마룡족, 용마족 등.

모든 병력이 하나씩 무너진다.

버티고 있는 것은 위대한 신격 이상의 몇 안 되는 인물들.

한구본, 소이현, 패연, 세이건, 무황, 케루빔, 피터, 길성현, 나디아, 세르게이 등등. 총 10명이 되지 않은 인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앞엔 아직 수백의 신격이 멀쩡히 살아있었다.

“여기 까진가.”

무황, 케루빔, 패연, 세이건.

이 넷이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해도 저들을 다 막을 순 없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게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다들 잘 도착했으려나.”

무황이 입을 열었다.

진훈, 한별, 성시연, 이하얀.

창조신의 성역으로 간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의 모두가 그 넷이 루시퍼와 창조신의 전장에 도달하길 간절하게 바라며 버티고 있다.

“조금만 더 버팁시다. 솔이 아빠.”

“조금, 그래 조금.”

둘 모두 기억이 돌아왔다.

어떤 것은 선명하고 어떤 것은 희미했지만, 어느 정도는 안다. 저 넷이 창조신을 만나러 가야 하는 이유. 그리고 이한성이라는 유일한 변수가 돌아와야만 이 전쟁이 끝난다는 것도.

그리고 만약 이 전쟁이 승리한다고 해도 모두가 살아남을 수는 없다는 것도.

모두 안다.

하지만 진강철과 이혜정은 이곳에서 최후까지 싸울 것이다.

수백의 신격.

위대한 신격부터 태초의 신격까지.

인도, 북유럽, 동유럽, 일본, 중국. 별의별 신격이 다 모인 천외천이다. 하나같이 대단하다는 어마어마한 신격들.

그들이 정비를 마치고 달려들었다.

“이번, 한 번만 버팁시다.”

이혜정이 그렇게 말하곤 황금빛 마력을 뿌렸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던 수백의 신격이 멈칫했다.

이혜정과 진강철은 뒤쪽을 바라봤다.

“죄송해요. 조금 늦었죠.”

이한성이었다.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수백의 신격을 앞에 두고 당당하게 선 이한성 말이다.

< 최후의 전쟁(1)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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