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진 기억. >
마신을 데리고 갈 것인가.
이곳에서 버릴 것인가.
선택해야 했다.
몇 마디 나눠본 것은 아니지만, 한성은 마신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윤회를 끝내고 싶어 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한성은 모를 그 윤회. 마신은 그 윤회를 만든 창조신을 혐오했지만, 지금은 그 어떠한 노력도 할 생각은 보이지 않을 만큼 절망했다.
하지만 한성이 길을 알려줬다.
가능할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고.
그 방법은 이 세계를 완전하게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이 세계의 끝을 보는 것인데, 그 방법은 창조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 하면 된다.
한성은 마신의 눈빛을 바라봤다.
이 많은 생각과 고민이 말 없는 두 사람의 시선을 타고 흘렀다.
수 분이 흘렀다.
“증명해라.”
마신이 눈을 빛내며 한성에게 말했다.
“네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한성은 무슨 말인지 알기 위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마신은 말없이 손을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생성된 깊은 무저갱의 끝의 무언가가 한성을 잡아끌었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권능 중 하나였다.
한성은 머리가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작은 점으로 사라졌다.
그때, 성시연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 * *
성시연이 사라지는 한성을 보고서 일어날 수 없던 이유는 [역천의 마왕]의 영혼을 가진 성시연은 그 무저갱 아래 무엇이 있는 것인지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땅. 하늘의 태양.
붉게 빛나는 눈을 가진 검은 사내.
파란 눈을 지닌 여인.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의 시작. 모든 것의 태초. 마신과 창조신의 탄생이었으며 수백만 년 동안의 신화를 담고 있는 무저갱.
그 끝을 알 수 없는 진정한 무저갱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빠르게 시작되는 세상의 역사에서 수많은 신과 인간은 하나의 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시연의 머릿속에 찰나처럼 지나갔다.
모든 세상의 끝.
자신이 만든 세상을 스스로 멸망으로 몰고 가는 창조신. 그것을 막으려는 마신. 그 사이에서 발버둥 치는 인간들.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는 다른 태초의 신격들.
한 번.
두 번.
수십 번.
수백 번.
수만 번.
죽고 슬퍼하며 절규한다. 포기하고 절망하며 끊임없는 괴로움 속에 빠져 살기 위해 움직인다. 하지만 실패한다. 그게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한성은.
우리의 친구 이한성은 그곳으로 빠졌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잃어버린 신화 속에서 수백만 번의 멸망과 죽음을 경험할 거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신이 무너지고도 산산이 조각나는 경험을 영원토록 겪을 거다.
성시연은 끊임없이 눈물이 났다.
눈앞에 그 강대한 마신이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한성은 살아 돌아올 수 없다.
그리고 분노가 차올랐다.
이 눈앞의 마신이.
마계의 신이고 태초의 주인이라 불렸던 태초의 신격이기에 성시연 따위는 아무런 상처도 입힐 수 없는 상상 위의 존재이지만, 성시연은 마신에게 달려들었다.
세상이 느려졌다.
역천의 마왕은 세계를 멈출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른 신격 앞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마신에겐 안 된다.
마신은 아무것도 없는 표정으로 손을 저을 뿐이었다.
“가라, 가서 한번 해 보거라.”
성시연이 마지막으로 들은 이야기였다.
눈앞이 깜깜하게 변했다.
* * *
신호가 울려서 들어갔다.
아직 지원군은 없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싸워야 할 적이다.
금안의 외팔 싸움꾼, 무황 진강철은 하나의 신이 되어 있었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만들 때의 모습. 신들이 인간을 두려워하며 제약을 가해 현계라는 또 다른 감옥으로 보냈을 때의 모습은 사라졌다.
원래는 하얀 무복을 입은 근육 많은 아저씨였다.
조금 강하게 생긴 수염이 있긴 했지만, 특별하진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머리가 길게 돋아났고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전신 도복이 입혀졌다. 발뒤꿈치엔 두 쌍의 날개가 생성되었으며 등 뒤엔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검이 꽂혀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황금빛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게 진강철의 영혼에 새겨져 있던 태초의 모습이다.
옆에 있던 케루빔.
진강철의 아내 이혜정이 웃으며 말했다.
“스스로 치천사. 세라핌의 계급에 올랐네.”
진강철이 선(善)에 치우쳐 있으며 제약을 받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경지에 올랐기에 자격을 얻은 것이고, 그가 지금까지 이룩한 업적과 신격이 그를 ‘제1계급 치품천사’로 올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진강철은 웃지 못했다.
천사.
말이 좋아 천사지, 앞으로 싸워야 할 천외천에 있는 신격의 ‘따까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말을 해도 참.”
“따까리를 따까리라고 하지 뭐.”
“훗. 그럼 따까리들의 반란을 보여주자고.”
이혜정이 먼저 앞으로 쇄도했다.
뒤를 진강철이 따랐다.
두 개의 황금 빛줄기가 수많은 신격을 가리켰고 거대한 신격의 파장이 주변을 뒤덮었다.
뒤에 있던 세이건과 패연이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순혈. 순 사기였잖아.”
그들은 혼혈이다.
그렇기에 마룡족이며 용마족이라는 종족으로 분류되었고 천외천에서도 추방되었다. 다시 올라가고 싶어도 올라갈 수 없는 몸이었다.
순혈의 드래곤.
순혈의 용.
그들보다 훨씬 약하고 신격도 낮다.
그보다 순혈과 혼혈을 가르는 것은 중재자의 권능. 말 그대로 신이 부여한 권능에서 차이가 났다. 순혈은 현계의 존재에게 강제적인 규칙을 부여하며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고 혼혈은 그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용마족 세이건은 몸속에서 차오르는 힘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에 입장했을 때의 변화는 시작에 불과했다. 지금은 위대한 신격을 넘어 태초의 신격에 닿았다.
용혈이었으며, 천외천에 사는 순혈의 용보다 수많은 전장과 죽음을 경험했으며 한순간도 그들처럼 게으르지 않았다. 그렇게 세운 업적과 신격은 결코 거품이 아니었다.
패연도 마찬가지였다.
세이건보다 재능은 없었지만, 세이건을 따라잡기 위해서. 그리고 종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왔다.
둘은 ‘신’이라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뒤에 있던 투신, 포식자, 무희 등 무황의 동료와 패연과 세이건을 따르는 용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스스로 경계를 넘어섰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 업적, 신격, 죽음, 삶. 모든 게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이 모두는 깨달을 수 있었다.
‘두려웠던 거야.’
신은 인간을 두려워했다.
순혈은 혼혈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천외천이라는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고 다른 생명체들에게 제약을 가했다. 하지만 그 제약 아래 인간과 다른 생명체는 더욱 치열하게 살아남으려 애썼다.
그런 그들의 제약이 깨진 거다.
신격들은 당황했다.
겨우 인간 몇과 혼혈 용족 몇이 천외천에 들어와서 수백의 신들을 압도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다.
화악.
하지만 이곳의 신격들도 괜히 신격이 아니다.
모두 태초의 신격도 아니다.
오래전, 인간이 현계에 내려와 살았을 때부터 신화를 이룩하고 전설을 쓰며 역사를 세우며 신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다. 처음부터 신의 아들로 태어난 이들도 있었지만, 스스로 오른 이들도 있다.
그들은 강했다.
처음엔 무황과 케루빔이 압도하는 듯했지만, 그들이 진정한 신격을 꺼내 들었다. 그들도 천외천에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앞에 있는 인간과 혼혈처럼 처절하게 싸운 것은 아니지만, 다른 신들과의 싸움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오랜 기간 쌓아온 세월이 있다.
신들의 전쟁이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곳곳에서 천둥과 토네이도가 생겨나는 것은 아주 흔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파도가 생겨나는가 하면 그 파도 위에 지독한 화염이 뿜어지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재앙을 보는 느낌이다.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하늘을 쪼개듯 떨어졌고 누군가 그것을 가볍게 막는다. 세상을 덮어 버릴 듯 강력한 마법이 발생하면 또 누군가는 어렵지 않게 상쇄해 버린다.
이게 신들의 싸움이다.
어딘가 압도하지 않는 이상, 이런 싸움이 몇 날 며칠이고 계속되겠지.
“이대론 안 돼.”
무황이 신격 하나를 절명 시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천외천에서 전투가 길어져 봤자 좋을 게 없다.
아직 지원군은 없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그리고 왜 이놈들은 자꾸 현계로 나가려고 하는 것일까.
저 멀리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 보인다. 저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곳의 신들이 저 재앙을 피해 도망간다는 것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재앙이 아닌 반대쪽의 하늘 끝.
땅에서부터 솟아난 유일한 하나의 높은 탑.
아마 창조신이 있을 거라 생각되는 성역(聖域)에서 거대한 파장이 이곳까지 도달했다.
순간, 무황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곳의 신격도 충분히 강하다.
그런데 저곳에서 발생한 파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익숙했다.
“루시퍼······?”
그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맞서는 또 하나의 범접할 수 없는 힘은 창조신. 이 모든 세상의 주인인 신의 힘이다.
‘싸우기 시작했구나.’
루시퍼는 창조신에게 찾아가 끝없이 끝나는 이 세계의 멸망을 멈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자신이 직접 가서 설득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싸운다.
그렇다면 사실 결과는 정해져 있다.
루시퍼는 결코 창조신을 이기지 못한다.
“더 몰아쳐야 해!”
시간이 없다.
루시퍼는 한때 적이었지만, 지금은 아군이다.
무황이 이곳에 온 이유, 다른 이들이 모두 무황을 따라 천외천으로 들어온 이유는 하나다. 이곳의 신격이 인간을 없앨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 이 세계는 끊임없이 멸망한다. 내가 천외천으로 가야 하는 이유이며, 너희 인간들이 날 막아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루시퍼가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그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무황이 태초에 부여받은 신격을 회복했을 때, 그는 과거를 기억했다.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멸망으로 가는 기억. 소중한 사람이 죽고 또 죽는다. 스스로도 죽었으며 그 죽음으로 다른 이들이 슬퍼하는 것을 봤다.
머릿속에 끊임없이 재생된다.
별다른 충격은 없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황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그가 사라진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매번 이 신격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패연이나 세이건은 그런 기억이 거의 없는 듯 보였다.
얼핏 무언가는 있지만, 안개에 가려진 듯 선명하진 않아 보였다.
그것은 이혜정도 마찬가지일 거다.
‘많은 것이 달라졌군.’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엔 한 사람이 있었다.
이전 과거에도 없었고, 아주 오래전에도 없었던 한 명.
그것은 ‘이한성’이라는 진훈의 친구였다.
얼핏 알 것 같았다.
이번에 성공하기 위해선 그가 필요하다.
‘루시퍼가 위험해.’
루시퍼는 신격 중에서 몇 안 되게 인간을 지키고 싶어 하는 신격이다. 그게 인간을 위해서나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 없으면 이 세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조신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강자이기도 했다.
지금 허무하게 루시퍼를 잃을 순 없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천외천의 신격은 수도 없이 많다.
쿠우우우웅!
천외천의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진다.
점점 전투는 격해지고 전장인 천외천은 버틸 수 없게 된다.
그때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순간 섬뜩했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아주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 사라진 기억.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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