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신의 궁전. >
성시연은 한성에게 임무 하나를 받았다.
기한은 5개월.
그 전에 원래 릴리스가 지배하던 마계의 영지를 찾는 것이다. 단순히 점령이 아니라 릴리스의 후예로 인정받으라는 것. 그러면서 타락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을 유지해야 한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조건 해야 했다.
한성은 그래야만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확실히 모르겠지만, 성시연은 [역천의 마왕]이 되면서 루시퍼가 했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한성은 이 세계를 구하려 한다.
본래는 멸망을 향해 굴러가야 했던 이 세계를.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릴리스의 영지.
한 마리의 마족처럼, 영지에 스며들었다. 격을 죽이고 적당한 ‘비천한 신격’을 지닌 떠돌이 마족으로 말이다.
이 영지의 주인은 없었다.
이전에 이곳을 지배하던 릴리스는 죽었으며, 릴리스를 수호하던 투신 또한 사라졌다. 그 아래 7명으로 이루어진 귀족 마족이 겨우 운영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곳엔 당장 성시연이 이길 수 없는 강자도 많다.
하지만 성시연의 숨은 힘을 꿰뚫어볼 이는 없었다.
“여기 검은개불 팔아요. 맛도 좋고 마기도 잔뜩 담긴 개불이에요!”
“인간계에서 떨어진 구울 팝니다. ‘혼’만 집어넣으면 평생 집안일 걱정은 없어요. 단돈 50마석!”
“에이, 무슨 평생이야? 한 오십 년 쓰면 못 쓰겠구만.”
“50년이면 거의 평생이지!”
“40마석에 파쇼. 50년이면 눈 깜빡할 시간이구만.”
“에이, 40마석이면 남는 것도 없어! 47마석!”
이곳도 인간이 사는 곳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서로 죽이고 죽었던 마족이다. 마기를 풀풀 풍기며 악마같이 인간을 사냥했던 마족. 그런데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누군가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동정할 마음은 없었다.
이들에게 인간은 죽여야 할 존재에 불과하니까.
스스로가 마왕의 몸을 지녔고 악마 릴리스의 신격을 이었지만, 영혼만큼은 인간이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또 다짐한다.
“저기요.”
성시연이 입을 열었다.
유창한 마족의 언어였다.
“무슨 일이쇼.”
“집 하나 구할까 하는데, 괜찮은 중개소 있습니까? 떠돌이였는데, 이곳에 자리 잡을까 합니다.”
“떠돌이셨구만. 어디서 왔소?”
“······동쪽에서 왔습니다.”
“베리알이 있던 영지구만. 잘 왔소, 여기도 영주님이 안 계시지만, 거기보단 살만할 거요. 어차피 그쪽은 베리알이 살아있을 때도 혼돈인가 뭔가에 빠져서 아무것도 안 하던 곳 아니오.”
“잘 아시네요.”
“내가 여기 정보통이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셔!”
괜찮은 마족이었다.
성시연은 릴리스의 영지 안쪽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급할 필요는 없다.
한성이 준 시간은 5개월.
그 안에 충분히 파악하고 힘을 모은 다음, 한 번에 영지의 소유권을 차지한다. 하나씩 차근차근, 안쪽에서부터 갉아먹는다.
* * *
진훈은 눈앞에 선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봤다.
이렇게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활활 타오르는 검붉은 마기에 형체 자체가 흐릿하다. 두 눈은 텅 비어 있었고 깊게 눌러쓴 후드는 타오르는 마기에 흔들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녀가 서 있는 것만으로 주변의 기세가 변했다.
위대한 신격이다.
진훈은 아직 도달할 수 없는 격.
하지만 진솔은 다르다.
악(惡)이 정화되면서 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위대한 신격에 닿아 있었던 드높은 신격이다. 격의 차이는 확실하지만, 진훈과 함께라면 비벼볼 수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닌가?’
진훈은 점점 거대해지는 아스모데우스의 격에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정신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기세가 아니었다. 진훈보다 두 단계.
신격 안에서는 땅과 하늘의 차이다.
무서웠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성이 알고도 남겨두고 떠난 이유가 있을 거다.
“오늘 엄마를 되찾는다.”
진훈이 굳게 말했고 진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훈에게서 순수한 황금빛 마력이 피어올랐고, 진솔의 파란 마력엔 은은한 황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움직였다.
원래는 결코 뚫지 못해야 하는 아스모데우스의 격이었다. 하지만 두 형제의 마력은 검은 마기의 벽을 뚫어내고 아스모데우스에게 닿았다.
콰아아앙.
아스모데우스는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악마다. 72악마 중에서도 무력으로 수위를 다투는 대악마.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며 ‘이지’를 반쯤 상실한 상태지만, 그 강함은 웬만한 마계 군단 몇 개는 쉽게 터뜨릴 수 있는 무력.
그런데 진훈과 진솔의 공격이 먹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진훈과 진솔은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전신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스모데우스의 붉은 마기의 선들은 하나하나가 오러 블레이드를 뛰어넘었다. 그녀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았지만, 시선 하나로 목을 잘라낼 것 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그저 펄럭이는 흐릿한 망토 안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진훈과 진솔은 끊임없이 몸을 비틀어 피하고 마력을 끌어올려 버티고 살갗이 찢어지며 뼈가 부러졌다. 그것도 그나마 이 둘이었으니까 살아있는 것이었다.
바닥엔 이미 수백 개의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대론 안 돼.’
진훈은 진솔과 눈을 마주쳤다.
진솔이 폭풍과 같던 마력을 호수처럼 잔잔하게 다스렸다. 그러자 거대한 마력은 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육체 표면에 선명히 흐르기 시작했다.
진훈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아스모데우스에게 돌렸다.
한 손을 가슴에 붙였다가 앞으로 뻗었고 허리는 세웠지만, 자세는 낮췄다. 둘은 서로 등을 지고 같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웠던 [무투].
언젠가 형과 틀어지기 전에 맞췄던 [합격].
아버지가 이걸 알려주면서 말했다.
‘둘이 힘을 합해야 할 때가 올 거다. 오로지 악(惡)을 정화하기 위해 내 평생을 바쳐 만든 비기(祕器). 죽이는 게 아닌, 제압하고 정화하는 것. 그것에 모든 걸 걸어야 할 때.’
그때는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정화’가 죽이는 것과 다를 것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무황, 진강철은 평생 어머니 이혜정의 곁을 지켰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만 살았고 이 모든 것은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금 진훈과 진솔의 마력은 서로 합쳐졌다.
조용한 호수 같았던 두 사람의 마력이 합쳐지며 작은 바다가 되었고 둘의 주먹과 발이 움직임에 따라 바다 위의 폭풍이 되기 시작했다.
둘이 하나가 된 듯, 바다를 휩쓸었다.
* * *
마신의 궁전.
마계라는 거대한 대륙 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하나의 탑 같기도 하지만, 궁전과 성의 어느 중간 정도라 보면 된다.
마신이 사는 곳답게 그 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성은 그 궁전을 아주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가미긴과 열두 악마를 죽이고 5개월이 흘렀다.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했다.
“앞으로 한 시간.”
5개월 동안의 준비가 끝나고 모든 계획이 실행되기까지의 시간이다.
멀리 궁전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지켜보겠다는 시선. 확실한 적의보다는 궁금증이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한성은 5개월 전부터 이 마신의 궁전을 맴돌았다. 하지만 마신은 한성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마 마신은 한성이 이곳에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무슨 생각일까.”
이 마신은 루시퍼처럼 이 세상의 진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을까.
아예 모르진 않을 것 같다.
최소한 루시퍼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마신이 모를 리는 없겠지.
루시퍼는 위대한 신격.
마신은 위대한 신격 위에 있는 태초의 신격이니까.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한성은 방송을 켰다.
5개월 동안 준비했던 것 중에, 이계의 도시를 이용해 방송 송출을 가능하게 만든 것도 있었다. 굳이 이것까지 찍어 관심을 받는 것보다는 그 관심으로 인해 상승하는 능력치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와, 이한성이다.
- 한성느님!! 얼마 만이에요. 살아있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 ㅜㅜㅜ하, 보고 싶었어요.
- 여긴 또 어디야, 마계인가?
- 공지 못 봤음? 마계로 전파 연결한다고 곧 방송한다고 했음.
- 미친, 저건 뭐임? 겁나 큰데?
- 저거 마신의 궁전임. 마신의 탑이라고도 불리지.
- 미친놈, 네가 어떻게 알아?
- 나 얼마 전까지 마계에 있다가 왔음. 요즘 마계 상황이 안 좋아서 도망쳐 나왔지.
- 응, 다음 허언증.
“여기 마계 맞습니다. 그리고 저건 마신의 궁전이 맞고요.”
한성의 말에 채팅창이 뒤집혔다.
누군가 말했을 때, 설마 했다.
“그리고 오늘, 저 궁전을 털 겁니다.”
- 뭐라고?
- 이번 설정은 무리 아님?
-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 아직 한성이 그 정도 격은 안 되지 않나?
“아직은 안 되죠. 님들, 근데 저 관종의 신이었어요. 여러분의 관심만 있다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성은 시청자와 대화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청자를 모으고 기도해달라고 알린다.
그게 지금 한성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서 전 회차에서 마신을 마주했을 때를 상기했다.
* * *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태초의 신격 답지 않게 격이 실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투박하지만 생긴 잘생긴 중년의 남성. 위에 걸친 옷는 화려했지만, 얼굴은 인간처럼 생겼다.
그 흔한 뿔과 송곳니도 없었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마신은 죽여야 한다. 그래야 지구를 덮고 있는 마계화가 끝난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천외천으로 가야 한다.
이곳에서 몇 명이나 더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아가야 한다.
마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기세를 내비쳤다.
그리고 찰나.
콰직. 팟!
옆에 있던 세르게이의 머리가 날아갔다.
나디아가 급격히 창을 들어 왔지만, 이미 그녀의 머리도 사라진 후였다.
그 사이에 한성이 나서서 마신의 앞에 섰다.
시간과 공간을 뚫고 무언가 한성의 목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위대한 신격에 들었기 때문이며 마법의 끝에 다다른 덕분이다. 그리고 수많은 초월 신화가 육체와 영혼을 보호하고 있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막는 것은 또 다르다.
한성은 급격히 몸을 비틀어 공간을 뚫고 이동했다.
잠시의 방심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두 명의 메인 캐릭터가 죽었고 한성도 선공을 빼앗겼다.
한성은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신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 * *
게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수십, 수백 번을 죽었다.
마신 앞에서만 말이다.
마신 앞에 서기 위해서? 수천 번은 넘게 죽었을 거다. 제대로 셀 수도 없어서 기억할 수가 없다. 그것은 다른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이길 수 있을까?”
5개월 동안 철저하게 준비했다.
오로지 마신을 마주하기 위한 준비다.
마신을 마주했을 땐? 이길 자신이 없다. 한성은 아직 드높은 신격이다. 그런데 위대한 신격도 아닌 태초의 신격인 마신을 이기라고?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불가능하다.
앞으로 2년 정도 초월 신화 수집에 집중하면서 인류의 절반을 희생한다고 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위대한 신격에 들어 태초의 신격에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후우.”
한성은 방송 채팅을 보다가 호흡을 크게 내뱉었다.
‘성공해야 할텐데.’
무작정 싸우지 않아도 된다.
마신 공략법은 생각보다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다.
단 한 번이라는 게 무서울 뿐이었다.
그러자 저 먼 곳에서 시커먼 무리가 쏟아져 내리는 게 보였다. 곳곳에 거대한 격이 섞여 있는 마물과 마족의 군단. 덩치 큰 마계의 거인족도 보였고 투신이라 불리는 발록도 몇 마리 보였다.
마계 어딜 가도 꿀리지 않을 강한 군단이다.
쿠우우우.
그리고 그 가장 앞에 붉은 투신의 기운을 품은 역천의 마왕, 성시연이 있었다.
그녀의 군단이 도착했다.
< 마신의 궁전.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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