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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운은 만렙이다-176화 (176/200)

< 악마를 보았다. >

성시연은 한성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친구였다. 가문의 힘도 없고 무력도 약하며 돈도 없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던 걸까.

그는 당당했다.

카지노의 테러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위기에서 자신을 구했다. 누가 봐도 약했던 그가 흑연의 차녀인 자신을.

또한, 죽음 앞에서 담담했다.

정말 죽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걸까.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

분명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신기했다.

못생겼지만, 멋있었다.

분명 약한데, 강했다.

누군가 위험에 빠지면 항상 앞에 나섰다. 친구들을 구했고 사람들을 구했다. 그의 옆에 있으면 누구나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한성.”

성시연은 아무것도 없는 마계의 땅 위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성은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말이다.

옆으로 진훈, 한별, 이하얀, 길성현. 그리고 그의 흔적을 찾고 있는 피터까지. 모두의 표정엔 허탈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그가 없다.

한성이 없는 삶은. 그리고 전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계의 하늘은 회색빛이다.

첫날엔 슬픔에 빠져 있었다.

피터라는 이를 데려와 흔적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차원을 이동한 것도 아니고 공간을 접은 흔적도 없다.

하긴, 그 정도였다면 이곳에 있는 이들로도 알아차렸겠지.

성시연과 하얀이는 목 놓아 울었고 진훈과 한별도 텅 빈 눈동자로 한성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길성현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것인지 애꿎은 마계의 땅에 화풀이를 했다.

두 번째 날엔 수천의 마족과 수만의 마물이 기습했다.

잘 됐다 싶었다.

그냥 뭐든 화를 풀고 싶었다. 슬픔과 공허함에 눈물과 악을 지르며 그것들을 짓이겼다.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다.

전장에서 살았다.

영웅으로 컸다.

동료의 죽음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저 동료가 아니다. 친구였고 가족이었으며 은인이었고 스승이었으며 연인이었다. 모두가 끈끈한 인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세 번째 날이 됐을 때.

주변에 있는 마족과 마물은 씨가 말랐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아닌,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한성이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만약에 큰 부상을 입고 이곳에 나타난다면.

정신을 잃고 이곳에 떨어진다면.

누군가는 이곳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피터라는 놈도 한성을 무지하게 싫어하는 듯했지만, 찾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다른 차원을 넘나들고 자신의 신격인 크툴루에게 힘을 빌려 모든 것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육일 째.

며칠 째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마계의 땅이었다.

“뭔가 온다.”

한별이 임시로 지어진 아지트에서 나오며 말했다. 길게 뻗은 한별의 몸은 회색빛 하늘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뒤로 성시연, 이하얀, 진훈, 길성현, 피터가 걸어 나왔다.

“뭐지?”

강한 기운이다.

지금까지 막았던 마족이나 마물과는 전혀 다른 ‘격’의 파장. 그 파장은 점점 거대해지며 하나의 ‘향연’처럼 마계의 땅을 진동시켰다.

“악마다.”

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주 익숙한 기운이다. 72악마라 불리는 마계의 대공들. 하나하나가 드높은 신격에 닿아 음지의 천외천이라는 마계에서 수위를 다투는 이들. 말 그대로 천외천의 신들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셋, 다섯······, 열 둘.”

“열둘이네.”

드높은 신격이 열둘이다.

그런데 성시연은 웃었다. 진훈과 한별도 마찬가지였다. 피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랄까.

죽고 싶어 하는 모습이랄까.

아니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모습일까.

아니다.

한 명도 죽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이곳에 드높은 신격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피터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망설이지 않았다.

진훈이 황금빛 마력을 폭발시키고 성시연은 투신의 영혼을 덧씌웠다. 한별은 어둑시니를 불러들였고 길성현은 적들이 오는 평야 전체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터는 그 모습을 뒤에서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었나.’

피터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어렸을 때 혼자가 되었고.

이후엔 홀로 거리를 떠돌았다. 친구들이 몇 번 있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은 믿는 게 아니라고 몸소 배웠다.

그런데 저들은, 그저 한 명이 죽었을 뿐이다.

모두 그 한 명 때문에 목숨을 바친다.

이곳에 한성이 돌아올까?

돌아올 가능성이 0.00001% 라도 될까.

솔직히 미련한 희망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 모두는 저런 말도 안 되는 적과 싸우려고 한다.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이다.

‘······부럽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밖으로 꺼낼 순 없었지만 말이다.

투쾅.

옆으로 진훈이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은 수만의 마족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악마에게 쏘아졌다. 그 뒤로 성시연, 한별, 이하얀, 길성현까지 모두 따랐다.

피터는 머뭇거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수십억의 시청자는 사실 변명이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숨으면 된다. 굳이 그걸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민망하지만, 저런 친구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다.

누군가 믿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의 믿음을 받는다는 것.

그게 부러웠다.

피터는 차원의 틈을 개방했다.

틈틈이 모아온 신인류 서른, 이계의 소환수 수천, 이계의 괴수 수백, 이계의 신격 다섯.

이 모든 게 피터가 모아온 힘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부울 생각이었다.

콰과과과!

저 먼 곳에서 두 거대한 힘이 부딪쳤다.

*  *  *

LGI라는 기업 소속의 플레이어를 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쉬워서 재미가 없을 지경이었다. 솔직히 얻는 것도 많지는 않고 말이다.

“더 할 말은?”

한성이 아래 쓰러진 이종현 대표에게 물었다.

“후회할······, 커억!”

“뭐라고?”

“후, 후회할······, 끄어어억.”

이런 놈들은 항상 말이 많다.

그냥 조용히 하면 될 것을 이렇게 겪어도 되지 않을 고통을 굳이 사서 겪는다. 이런 놈들은 그냥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한성은 미래를 위해서 놔뒀다.

아주 악(惡)은 아니기에 어쨌든 인류를 위한 전력이지 않은가.

“내가 그냥 살려주려고 했는데, 계속 이러면 죽이고 싶어지잖아.”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살릴 필요는 없다.

어찌어찌 비천한 신격에 닿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엄청 약했다. 이 축제에 와서 업적을 억지로 산 느낌이다. 나머지는 장비로 커버했고.

“그, 그건······.”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 보면 공부 좀 한 거 같은데, 이게 뭔지는 알겠지?”

한성은 그렇게 말하며 [온전한 신격] 수준까지만 격을 개방했다.

화악.

한성은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이종현은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입술은 보랏빛이었고 손과 다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순간 지린내가 나더니 바닥에 누런 오줌이 흘러나왔다.

“쯧, 더럽게.”

놀란 것은 이종현 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있던 한나도 한성이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온전한 신격이었을 줄이야.’

강한 줄은 알았다. 하지만 비천한 신격 중에서 최상급에 다다른 것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센스 또한 천재 중에 천재라 불리던 사람이었으니까 같은 격이면서 강한 줄만 안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게다가 온전한 신격 중에서도 최상급.

한나는 쳐다보지도 못할 신격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일반 ‘격’을 지니고 있을 때, 신격을 보는 느낌이랄까. 저 앞에 있는 이종현은 아마 당장에라도 죽고 싶은 마음일 거다.

그 정도로 한성의 격은 대단했다.

“오빠.”

한나가 한성을 불렀다.

여기서 죽일 필요는 없다.

얻을 것만 얻고 가면 된다.

한성은 격을 거두고 한나를 바라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인 이종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짝!

“정신 차려. 아직 안 끝났어.”

오늘이 6일 째다.

내일은 7일 때, 축제가 끝나고 돌아가야 한다. 그 세계의 시간이 멈춰진 것인지,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멈춰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겠지.’

플레이 초기엔 거의 개복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잘 죽는 게 메인 캐릭터다. 강하고 생명력이 질기긴 하지만, 재앙 자체가 터무니없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다르다.

모두 온전한 신격에 올랐으며, 충분히 강한 신격과 계약했기 때문이다.

지금 커다란 위험은 오히려 기회가 될 거다.

초월 신화를 쓰고, 계약한 신격과 동화되며, 그들의 힘에 한 층 더 성장할 기회.

“지금부터는 제가 하겠습니다.”

이 이상은 한나가 알아서 할 거다.

예전의 팬이었던 비천한 신격이 되어 이곳에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게다가 한성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플레이어이지 않은가.

한성이 이곳을 턴 이유 중 하나는, 축제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악(惡)의 퇴치에 아주 효율적인 ‘축제용’ 지급 아이템 때문이다.

[악을 먹는 개(특수)]

설명 : ‘악의 대난투’ 축제용 지급 소환수. 1인당 1개씩 지급되며 한 번 소환하면 악마 하나를 삼킨 후에 사라지게 된다.

* 악은 3점으로 환산된다.

* 온전한 신격은 5점.

* 드높은 신격은 8점.

[신격의 탈(특수)]

설명 : ‘신격의 대난투’ 1회에 한해 특정 신격이 될 수 있다. 지속 시간은 한 경기 기준인 30분이며 신격의 수준은 변함이 없다.

가장 큰 건 이 두 개의 아이템.

설명만 보면 알 수 있듯이, 한성에게 아주 유용한 아이템이다. 격의 차이가 너무 심하면 사용할 수 없지만, 적의 전력을 깎는 데엔 아주 유용할 거다.

‘이것만 싹 쓸어 가면 클리어는 훨씬 빨라지는데.’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잘한 수십 개의 축제용 아이템이 있다.

문제는 1인당 지급 개수가 정해진 아이템이고 어디서 팔지도 않는다는 거다.

원래 축제 이외에 사용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악의 대난투’나 ‘신격 대난투’와 같은 축제에 참가하면 수십만 DP를 얻는다. 그걸로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격을 높이는 업적을 사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성은 그런 DP가 필요 없다.

오히려 이 아이템 자체가 그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성은 DP가 많고 이종현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플레이어가 많다. 그리고 이 축제 아이템은

“우리가 그냥 가져간다는 것도 아니고 DP는 지급한다고 하잖아.”

“그, 그거면 개인 당 40만 DP는 얻을 수······, 흐엑!”

또 말대꾸를 하다 한성의 시선 한 번에 벌벌 떤다.

“40만 DP는 무슨. LGI 소속 플레이어 한 명씩만 가져와도 10개씩은 받을 수 있겠네. 총 20개에 자잘한 아이템은 서비스로 주고, 총 10만 DP 줄게.”

“추, 축제에 참가하는 참가비만 15만 DP가······.”

“쓰읍. 그 정도는 당연히 챙겨 주지. 우리가 10만 DP 더 줄 테니까, 쓰고 남은 DP는 다 가져오고.”

한성은 그렇게 말하는 한나를 아주 뿌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나서지 않아도 아주 잘 하고 있다.

“예? 남는 게······.”

“확! 또 말대답이야? 안 할 거면, 그냥 여기서 죽고. 네 목숨 값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죽어도 죽는 건 아니지만, 이대로 현실로 돌아가는 건 절대로 싫다.

이종현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그는 그날 악마를 보았다.

< 악마를 보았다.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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