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처 맞기 전까지는(9권 시작.) >
천지를 진동케하는 전투였다.
진훈은 그 광경을 보면서 침음을 삼켰다.
한성도 상대가 안 된다. 붉은 투신의 오라를 뿜는 ‘역천의 마왕’ 성시연,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간 용혈 이하얀, 요괴왕의 후예 한별.
그 모두가 가미긴이라는 악마를 막아서고 있다.
단순히 진훈을 지키기 위해서.
튕겨 나가고, 쓰러지며,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다시 일어나 달려든다. 어떤 수를 쓰던 파훼 당하고 격에 밀리지만, 친구들은 다시 일어난다.
진훈이 진솔과 얽힌 갈등을 끝내길 기다리면서.
“형, 저걸 보면서 뭐 느끼는 거 없어?”
진훈은 한 손에 [봉마수주]를 쥔 채 물었다. 진솔은 가슴이 뚫린 채 힘없이 쓰러져 그 광경을 보며 텅 빈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 피를 뱉으며 대답했다.
“······미련해 보이는 거. 크흡.”
입으로 피가 다시 흐른다.
“나라도 저렇게 할 거야.”
이렇게 말했다면 무슨 뜻인지 알았겠지.
진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진솔을 바라볼 뿐.
마음 같아선 바로 목을 긋고 가미긴과의 전투에 참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악마라 해도 가족이었으니까. 한때는 존경하는 사람이었고 따듯한 형이었으니까.
“······난 악마야.”
“엄마도 악마지.”
“엄마는 원래 천사였잖아.”
진훈이 진솔을 바라봤다.
언제는 어머니가 태초부터 악마였다고 할 땐 언제고.
“그래, 형도 원래 인간이었지.”
“과거에.”
“아니, 지금도 인간 맞아. 형이 마음만 먹으면 돼.”
“······.”
진솔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훈을 올려다봤다. 그러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쪽팔리네.”
“그걸 이제 알았어?”
“미친놈.”
“나랑 같이 엄마 돌려놓으러 가자.”
“그게 악마 반쯤 죽여놓고 하는 말이냐?”
“반인 걸 다행으로 알아.”
“참나.”
“······그게 가능하긴 해?”
“가능해.”
진훈은 확신했다.
저 앞에서 대악마와 싸우고 있는 이한성이 말한 거니까. 아무런 증거도, 설명도 없었지만, 이한성이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한 거다.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같이 할래?”
“······같이 안 하면?”
“그냥 죽이지 뭐.”
“형한테 잘하는 소리다.”
“형이라면 형답게 멋있어야지. 지금 이게 뭐야?”
“······아, 쪽팔려.”
“그럼 가는 거지?”
“오케이.”
진훈이 내민 손을 진솔이 잡았다.
그러자 봉마수주가 빛을 뿜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둘은 이를 악물었다.
* * *
전 세계는 새롭게 일어나는 재앙에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미리 준비했다고 해도 우박, 메뚜기, 흑암이라는 것은 어떻게 막기가 힘들었다.
이한성이 가장 조심하라고 한 재앙도 이것들이었다.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진다.
가장 작은 게 주먹만 한 크기에서 큰 것은 건물 정도의 크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이것을 막기 위해 각 나라는 중심 도시 몇 개를 선정해 대규모 마법진으로 광역 실드를 형성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피해를 없앨 순 없었다.
그저 줄이는 것뿐.
몇몇 나라에서는 실드도 부서지는 일이 많았다.
워낙 재룟값이 많이 들기도 하고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일이라, 마법적 기술력이 떨어지는 나라는 피해를 많이 봤다.
그것만이었다면 괜찮았을 거다.
메뚜기 떼가 흑암과 같이 왔다.
하늘이 검게 변하며 태양을 막았고 빛이라고는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조명이 전부인데, 그 조명조차 코앞을 보는 게 전부가 되어 버렸다.
단순히 구름이 낀 게 아니라 대기가 검게 변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메뚜기 떼.
단순한 곤충이 아니었다. 몬스터화된. 아니, 마물의 메뚜기가 나와서 사람과 식물은 물론이고 건물, 차량 등의 모든 기반 시설을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피해를 야기했다.
몇 개의 도시를 실드로 막는다고 괜찮은 게 아니었다. 각 나라는 실드가 형성된 도시 이외에는 모든 게 폐허로 돌아간다는 거다.
도시 기반 시설, 식량, 동식물, 자연 등등 모든 게.
- 이한성 영웅은 답이 없는 건가요?
- 미국 동부 평원에 메뚜기 떼가 몰려옵니다!
- 유럽에도 마찬가지예요. 서유럽은 이미 반쯤 먹혔어요!
- 당장 뭐라도 해야 합니다.
- 핵을 사용합시다. 낙진은 없어요, 마력 핵을 사용하면 됩니다!
- 그 안에 있는 사람은요. 절대 안 될 말입니다.
- 도대체, 이한성 영웅은 이 재앙을 예견하고 어디로 간 겁니까!
전 세계의 정상들이 모인 온라인 회의장은 난리가 났다.
피해가 생기고 있는데, 이한성은 보이지 않고 대비책 또한 없다. 이 재앙엔 각 도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성 또한 그저 믿고 기다리라고 한 게 전부였다.
그때, 라엘 카네기가 입을 열었다.
- 혹시 그 피터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정적이 흘렀다.
모두 그를 믿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한성은 피터가 이 재앙을 막을 열쇠라고 했다.
- 영상 연결합니까?
헤일렌이 입을 열었다.
라엘 카네기를 다른 정상들을 한 번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헤일렌이 영상을 연결했다. 그곳엔 피터의 모습과 수십억의 시청자가 쓰는 채팅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래서 정상들이 이 화면을 굳이 찾지 않았다.
공영 방송에 얼굴 비치는 것은 괜찮았지만, 아직 이런 개인 방송을 보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수십억 명이 보는 개인 방송이 개인 방송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 여러분. 제가 무슨 나쁘 짓을 그렇게 했습니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나쁜 짓으로 돈 잔뜩 번 재벌들 털어다가 주인에게 돌려준 것뿐입니다. 법이요? 아니 제가 미국인인데 영웅가서 은행을 털었어요. 그게 누구 법을 어긴 겁니까!”
- 응, 국제법.
- 영국에 가면 영국의 법을 따르는 거지.
- 불법은 불법임.
- 그럼 내가 피터 네 돈 털어 볼까? 그건 범죄 아님?
“털 수 있으면 털어보세요. 강냉이 털리고 싶다면 말이죠. 아니, 그리고 법을 어기면 어때요. 좋은 일 하면 됐지.”
- 아니······, 그건 인정.
- 그건 맞지.
- 맞지.
- ㅇㅈ
- ??? : 그래도 불법이야! 빼에에엑!
- 응, 그래도 불법.
“자, 지금 불법이라고 채팅 치신 분, 다 캡처해서 개인정보 털고 있습니다. 진짜 불법이 뭔지 보여줘요? 한 번 찾으러 갑니까? 제가 고소할 거 같아요? 아니면 직접 찾아갈 거 같아요.”
- 피터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사랑합니다. 피터. 잘생겼어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 이사람들 태세전환보소. 난 원래부터 사랑했다. 피터야.
“크흠. 진작에 그럴 것이지. 슬슬 채팅창이 깨끗해졌으니 재앙 다음 지역으로 이동하겠습니다.”
- 미친ㅋㅋㅋㅋㅋㅋㅋㅋ재앙 없애면서 움직이는 거 실화냐.
- 우리 지역에도 빨리 와 주세요! 피리부는 사나이!
- 쥐가 아니라 메뚜기를 몰고 다니네.
- 왜 메뚜기가 피터를 좋아하는 거임?
- ㅋㅋㅋㅋㅋㅋㅋㅋ뒤에 쫓아오는 메뚜기 우리 시청자보다 많은 듯.
- 시청자가 수십억인데······, 그 정도는 될 듯ㅋㅋㅋㅋ
- 와, 우리 집 위에 지나갔다. 메뚜기가 흑암이라는 것까지 끌고 간 모양인데? 해가 들기 시작했어!
- 미친, 우리집 이미 다 먹혔는데 이제 옴?
- 님은 안 죽었음?
- 위에 데드립 개쩌네.
“저기요. 채팅 깨끗하게 좀 해 줄래요? 안 그래도 신경 쓰여서 메뚜기 모는 거 느려지잖아요. 그 한성 새끼가 알면 나 또 맞는다고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피터 노예임?
- 맞으면서 일하나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한성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 피터 처음엔 테러 리스트라 무서웠는데, 이젠 귀여움.
- 이한성 옆엔 드래곤하고 마왕도 있는데, 피터 정도는 뭐.
- 근데 피터는 어떤 신격이랑 계약했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거임?
“제가 계약한 신격은 크툴루입니다. 그레이트 올드 원 중 하나죠. 지금은 여러 차원의 틈에 누워계시지만, 곧 힘을 되찾을 겁니다.”
- 근데 크툴루가 뭐임?
- 나도 몰라.
- 무슨 듣보잡이지.
- ㅋㅋㅋㅋㅋㅋㅋ크툴루? 러브크레프트에? 그거라면 이런 짓도 할 수 있찌.
- 크툴루 능력은 이런거임, ‘모든 메뚜기가 날 사랑한다.’라고 자기 암시하면 그게 능력이 될걸?
- 크툴루는 그냥 만능이라고 보면 됨. 힘은 약해도 이것저것 잡것들은 잘하거든.
“잡것이라니! 내가 힘도 얼마나 좋은데!”
- 그래서 맨날 이한성한테 얻어 맞은 거임?ㅋㅋㅋ
- 개웃기네. 누가 크툴루는 동네 샌드백으로 만듦.
- 이한성이면 인정.
-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한성 뿐이지.
- 이한성 보고싶다.
- 사실 이거 피터가 한 게 아니라 이한성이 한 거나 마찬가진데?
- 그건 맞지.
- 이한성이 아니었으면 피터는 또 은행이나 털고 있었겠지.
- 그렇지, 원래 공은 주인이, 책임은 노예가 지는 거임.
- ㅇㅇ맞지. 맞고 말고.
“으아아아아! 아니거든! 누가 노예야. 그리고 내가 다 한 거거든? 이한성이 하지 말라고 했어도 난 했을 거야! 이계의 도시 소환한 것도 나라니까!”
- 응, 그것도 이한성의 큰그림.
- 모든 건 이한성이 했다.
- 이한성을 찬양해라!
- 이한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피터. 일해라.
- 일해라, 노예야!
밖에선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이길 수가 없다.
가미긴을 만나는 게 전 회차에 비해 터무니없이 빨랐다. 하긴, 천외천을 갔다가 이제는 마계다. 그것도 끝을 향해 나아가는 바로 전 단계다.
기승전결로 따지면 ‘전’.
이곳에서 보낸 시간만 4년이 조금 넘는다.
본래는 최소 10년. 한 번도 죽지 않고 안정적으로 클리어하기 위해선 20년은 지났어야 하는 진도라는 거다. 그런데 5년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여기까지 왔으니 균형이 맞지 않을 수밖에.
그나마 한성이 버티고 있는 건 전 회차에서의 50년이 넘는 경험이었으며 끝을 봤다는 것.
‘그리고 과거의 잔상.’
원래 알던 ‘과거의 잔상’이 아니다. 마치 한성이 게임 속 플레이어가 아닌, 실제 존재하는 사람처럼 진행됐다. 단순히 ‘과거의 잔상’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릴리스를 만났을 때부터.
뭔가 조금씩 이상했다.
이곳은 게임 세상이다. 한성이 분명 클리어했던 게임이었고 수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많은 유명한 게임이다.
‘뭔가 있어.’
계속 부정해왔다.
이제는 뭔가 이 세상이 실제로 ‘게임’이라고 생각하며 플레이했던 게 꿈 같다. 아니, 그게 게임인가? 모르겠다. 어떤 게 진짜 삶인지.
스슥.
분명 앞에 있던 가미긴이 사라졌다.
움찔.
한성은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했다. 마력으로 몸을 휘감고 격을 끌어올려 막을 형성하고 검을 들어 언제든 받아칠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공격이 가해진 곳은 이쪽이 아닌 성시연이었다.
그녀는 [게헨나의 홍염]을 흡수했다. 마신에 근접한 마왕이었으며 지옥의 화염을 지배하는 게헨나의 정수. 가미긴이라도 게헨나의 홍염을 쉽게 뚫을 순 없었다.
하지만 성시연은 아직 온전한 신격.
쾅! 콰과과과과!
성시연은 죽지만 않을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성은 가미긴의 뒤를 쫓았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였지만, 진솔과 싸우면서 사용했던 [지배영역]을 사용하면 찰나의 틈은 만들 수 있다.
후욱. 후욱.
한성의 사고가 빨라지고 세상이 느려진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을 접어 이동하고 마력과 격을 하나하나 움직인다. 그것은 단순한 가속(加速)을 주는 게 아닌, 한성을 이 공간의 ‘기준’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게 무엇이냐.
한성을 중심으로 다른 이들의 시간과 공간을 움직일 수 없게 한다는 뜻이다.
가미긴의 당황한 표정이 보인다.
진솔에게는 계속 먹힌 기술이었지만, 가미긴에겐 정말 찰나였다.
푸욱.
한 번 타격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두 번째 공격은 먹히지 않았고 가미긴은 한성의 기술을 탈출했다.
“허억. 허억.”
한성은 숨이 가득 차올랐다.
진솔을 상대로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부담이었다.
‘이대론 안 된다.’
가미긴도 한성에게 다가가면 이 기술이 발동된다는 것을 알고 이하얀과 성시연. 그리고 한별을 중심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래야 이 방어선이 무너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 진훈이 위험하다.
‘가미긴 관련 업적이 있나? 악마는 많은데, 또 괜찮은 건 없을까. 아니야, 진훈도 악마 사냥꾼 업적이 있지만, 격의 차이가 너무 커.’
결국 ‘격’이 부족하다.
그때였다.
시스템 문구가 띄워졌다.
<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처 맞기 전까지는(9권 시작.)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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