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야. >
한성은 피터를 바라봤다. 길장현의 당황한 눈빛과 신인류의 머뭇거림. 그 사이에서 창백하게 굳은 피터의 표정이 보였다.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피터가 한발 물러났다.
“이한성! 나와 거래하자!”
길장현이 외쳤다.
순간 모든 분위기를 파악한 거다. 한성을 잡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하지만 한성은 조용히 중지를 올려 보였다.
“응, 꺼져.”
어디 감히 정화도 안 될 악역이. 그것도 이제는 찌끄레기가 된 악역이 어디서 비비는 건가.
“이, 이이!”
희대의 싸이코패스라고 알려진 길장현이지만, 이럴 줄은 몰랐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피터.”
한성은 피터에게 볼일이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네가 필요하다.”
“뭐?”
당황스럽겠지.
지금까지 하는 모든 일을 방해하더니. 아니, 방해뿐인가. 거의 원수 괴롭히듯 괴롭히지 않았는가.
“거래를 하자는 거지, 너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걸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잖아.”
“······돈은 나 혼자 구해도 충분하다.”
“영국 은행 줄게.”
“······?”
“싫어?”
“······.”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이다. 하지만 거절하겠다는 의사가 먼저인 듯 보였다. 그래서 한성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가 하는 일 방해도 안 하고.”
“······.”
“괴롭히는 것도 멈출게.”
“······.”
화나겠지. 자기가 괴롭혀놓고 이제는 안 그러겠단다. 자존심도 상하고 짜증도 나고, 분은 풀 곳이 없고. 원수에게 동정을 받는 기분일까.
“시, 싫······,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냥 거절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거겠지.
한성은 가볍게 말했다.
“또 계속 쫓아다니면서 아무것도 못하게 해야지. 아, 죽이진 않으려고 노력중이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부르르.
한성의 착각일까.
피터는 마치 오줌을 싼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와중에 신인류 다섯이 피터와 한성을 동시에 공격했고 길장현은 탈출 장치를 발동한 것인지 어디론가 사라졌다.
피터는 길장현을 잡을 수 있었지만, 한성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고 한성은 길장현이 어딜 가던지 크게 상관없었기에 놔뒀다.
그리고 신인류는 한성의 손 한 번 젓는 것으로 모두 기절했다.
“아, 이 신인류는 내가 데려갈 거야.”
“뭐, 뭐!?”
피터는 화가 차오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한성에게 뭐라 말하지 못했다.
“너한테도 크게 손해는 없을 거야. 오히려 네가 해야 할 일하고 겹치겠지.”
채찍을 보여줬으니 이제 당근을 보여줄 차례다.
“난 인류를 구하고 싶은 거야. 이 ‘재앙’에게서. 그러기 위해선 너희 힘이 필요해. 너도 그건 같은 생각 아니야?”
“······.”
“돈과 권력을 주겠어. 그걸로 사람을 구해. 그리고 기회를 줘.”
피터는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넘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당했으니 무슨 말을 해도 한성을 돕기는 힘들 거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어떨까.
“난 정말 순수하게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는 거야. 난 이 세상을 지키고 싶거든. 그런데 만약 네가 나와 다른 생각이라면······, 난 너를 죽일 수밖에 없어.”
표정을 살짝 굳혀주고 살기를 일으키는 연기까지.
그러자 피터가 ‘어버버’하며 말했다.
“그, 그게······, 나도 당연히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 결코 네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야. 그, 그러니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됐다.
참 달래기 힘든 캐릭터다.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괴롭혔던 기억이 크게 박힌 모양이다.
* * *
한별은 이계의 도시가 생기고 ‘귀신’과 ‘요괴’를 사냥했다. 아니, 테이밍했다고 해야 할까. 요괴왕과 계약했기에 요괴를 사로잡기는 쉬웠다.
물론, 귀신은 그것과 달랐다.
하지만 아예 못 잡을 것도 없었다.
정연의 힘을 동원해 세상에 가장 강력한 요괴와 귀신을 찾아다녔으니까.
“그슨대. 강철이. 태자귀.”
한별의 부름에 용과 같이 생긴 강철이가 한별의 팔뚝에서 튀어나왔고 위엔 작은 아기의 모습을 한 태자귀가 올라타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마계의 바닥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슨대였다.
“가라.”
저것들로만 진솔을 막을 순 없다. 하지만 뒤에서 몰려오는 마족과 마물을 상대하는 것 정도는 쉽다. 특히 여의주가 있다면 저 대요괴 그슨대, 강철이. 대귀(大鬼) 태자귀는 한층 강해진다.
거의 신화급에 맞먹을 정도로 말이다.
팟.
콰아아아!
진훈은 봉마수주(封魔數珠)를 착용하고 진솔에게 달려들었다.
한별과 진훈의 합공이 시작되었다.
진훈이 진솔과 주먹을 나누고, 한별은 왕명으로 진솔의 움직임을 막는다. 한 번씩 퍼져나오는 진솔의 ‘격’에 진훈과 한별을 튕겨 나간다.
하지만 다시 달려든다.
진솔은 악하다.
악마 중에서도 대악마.
드높은 신격에서도 위대한 신격에 닿아 있는 강력한 악마. 게다가 무황의 아들이었기에 무투 자체도 상상 이상의 수준이었다.
끼야아아아!
멀리 강철이가 운다.
태자귀가 강철이의 귀를 잡아당기며 마족과 마물을 잡아먹고 있다. 강철이가 거대한 마물을 찢어 놓으면 태자귀가 그들의 영혼을 빨아들인다.
그슨대는 더욱 강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로 바닥에 붙어서 마족과 마물을 어둠으로 삼켜버린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무저갱에 빠져 미쳐버리던지 굶어 죽을 것이다.
모두 그슨대의 양분이 되겠지.
한별은 그 모습을 슬쩍 훑었다. 저게 마물과 마족을 모조리 죽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진훈과 한별은 진솔을 막아야 하고.
그러면 답이 있을······.
콰아아아앙!
하지만 진솔은 진훈의 황금빛 마력을 깨고 턱을 돌려 버렸다. 저건 크다. 지금까지 막고 빗겨내며 버티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
순간, 진솔이 한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별은 시공간을 접어 회피했다.
하지만 진솔은 이미 그것까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한별의 뒤에서 뒤틀린 시공간을 뚫고 주먹을 뻗었다.
“커헉!”
한별은 수백 미터나 튕겨 나갔다.
척추와 내장 전부가 뒤틀리는 격통이었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고 정신이 흐려진다. 진훈도 분명 이런 고통을 겪었겠지. 한별의 눈엔 진솔이 보였다.
그리고 진솔은 한별을 버려두고 진훈에게 가는 게 보였다.
“아, 안······, 쿨럭.”
겨우 한 번 맞았을 뿐이다. 막지 못하고 회피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한 번의 공격. 그것으로 끝났다. 진솔과 한별의 차이. 그리고 진훈까지.
그 정도로 수준 차이가 심했던 거다.
한별은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진솔의 말은 들렸다.
“넌 날 못 이긴다.”
진솔이 입을 열었다.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하지 못했지만, 설마 저런 말일 거라곤 죽어도 생각 못 했다.
피를 토하고 있는 진훈이 힘겹게 상체를 세워 앉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쿨럭······, 알아.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형보다 강했던 적이 없어.”
사실이다.
그런데도 형은 7살이나 차이 나는 동생에게 따라잡히고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진솔이 스스로 어렸을 때를 돌아봤을 때, 자신은 그 나이의 진훈만큼 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넌 인간이고······, 난 악마니까.”
이것도 형의 심경을 계속 자극했을 거다.
진훈은 아버지의 황금 마력을 사용했다. 아주 자연스럽고 편하게. 그런데 진솔은 마기를 뿜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순수한 마력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황금 마력으로 정화해야 겨우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진훈도 이해한다.
가족은 악(惡)을 정화하는 ‘영웅’인데, 자신은 모든 인간과 영웅에게 사냥당해야 하는 ‘악마’였으니까. 그러니, 더욱 싫었겠지.
“형.”
“난 네 형이 아니야.”
스스로 완전한 악마가 되어 마계에 자리를 잡고자 했을 때, 진솔은 진강철과 진훈의 연을 끊었다. 스스로 자기 위안을 위해서 말이다.
“형, 난 어머니를 다시 천사로 돌릴 거야.”
“그건 불가능해! 원래 악마였던 엄마야. 천사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물며 인간이 되는 것도······.”
진솔의 유일한 가족은 어머니였다.
케루빔이었으며 아스모데우스지만, 진강철과 결혼했을 때는 한 인간의 ‘아내’로서 ‘인간’인 ‘이혜정’이었다.
진솔은 가족이 필요했다.
자신이 악마인 이상 천사인 어머니와 인간인 아버지, 진훈은 자신의 가족이 아닌 것 같았겠지. 그러다 어머니가 악마가 되어 마계로 갔다.
그때였을 거다.
아버지인 무황이 반쯤 미쳐 있었고 진솔은 그간 지니고 있던 갈등이 폭발했다. 둘은 한없이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솔은 그때 마계로 오게 되었고 말이다.
“형도 마찬가지야.”
“뭐?”
“형도 악(惡)을 제거하고 인간이 될 수 있어.”
“하, 하하하하. 인간. 인간이라.”
“우리는 가족······.”
“됐어. 난 이대로가 좋다. 인간이나 천사가 될 생각은 없어.”
“형.”
“난 네 형이 아니야.”
진솔은 차갑게 말했다.
진훈은 고개를 떨궜다. 더는 정신을 유지할 힘이 없었다. 속은 다 뒤집혔고 뼈도 성한 곳이 없었다. 앉아서 얘기한다는 것도 진훈의 말도 안 되는 특성 덕분이었다.
진솔은 마기로 이뤄진 손톱을 길게 뽑았다.
‘안 돼.’
멀리서 보던 한별이 속으로 외쳤다.
정신을 흐려져 가지만, 모든 말을 들었다.
진솔은 진훈을 죽이려 하는 것이다.
- 다시 한 번 계약을 갱신하지.
어둑시니가 한별에게 말을 걸었다.
전에도 진훈을 구하기 위해 계약했었다.
어둑시니의 힘을 빌리며 [죽음 이후의 영혼]을 걸었다. 그리고 힘을 얻었다. 그 어떤 적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힘을.
이번에도 그 힘이 필요했다.
어둑시니는 한별이 힘이 필요할 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힘을 빌려야 할 때. 말도 안 되는 계약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때를 말이다.
- 이번엔 [남은 수명의 절반을 가지겠다.]
수명의 반.
한별은 고민하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 진훈이 한별을 지켜줬을 때. 그때부터 곁을 지켜보던 어둑시니다. 어둑시니는 한별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한별 영혼을 얻기 위해 한별을 돕는 거다.
‘그래,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진훈을 구한다.
그리고 어둑시니가 원하는 것을 이뤄준다.
그거면 된 거다.
한별이 입을 열었다.
“그······?”
피이이이잉.
하늘이었다.
그곳에서 얇고 긴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빨랐기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콰아아아앙.
뒤늦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동반한 바람이 한별을 훑고 지나갔다.
눈이 감겼다.
한별은 바람이 지나가고 눈을 떴다.
“아······.”
한별은 벌려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곳엔 입에서 피를 흘리는 진솔을 가볍게 밟고 미간에 중지를 올린 이한성. 옆으론 허공에 떠서 한성과 같은 자세를 한 이하얀. 반대쪽으론 붉게 타오르는 투신의 오라를 뒤집어쓴 성시연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등장은 여전히 병맛 같아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자, 내가 왔다······, 아니. 적은 어디로 갔지?”
“아빠! 아빠가 밟고 있잖아!”
“앗, 미안. 그게 아니지. 네가 진솔이구나.”
“이한성! 나보고 등장 똑바로 하라고 하더니, 이렇게 밟으면 어떻게 해!”
“아, 몰라. 괜찮아. 괜찮은 인트로 하나 뽑았으니까 됐어. 하얀아 카메라 회수해!”
“쳇, 라이브 하고 싶었는데.”
“안 터지는 걸 어떻게 하니. 녹화했다가 써먹어야지.”
“야, 조용히 좀 해! 지금 그게 문제야? 이 악마 일어나는데?”
한성은 옆으로 슬쩍 보더니 발을 들어 머리를 밟았다.
콰직.
“됐다. 다시 기절했어. 우리 등장 씬 다시 찍을까? 안 밟고 제대로 서 있고 싶은데.”
“맞아요. 먼지를 딱! 일으키고 먼지가 걷히면서 이 악마와 마주하는 게 더 멋있지 않을까요?”
“안 돼! 못 해!”
성시연이 한성과 하얀이의 말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한별은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다.
<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야.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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