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역(惡役)이 필요할 때. >
진훈은 밀렸다.
초월, 금안, 금강불괴, 만독불침, 신력지체 등등. 수많은 특성과 이능이 진훈을 보조했지만, 결국 인간은 인간이다. 신격을 얻었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인 거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으며, 신이 인간에게 제약을 내렸다.
반면, 진솔은 그런 제약에서 벗어난 존재이며 신의 손에서도 벗어난 존재인 ‘악마’였다. 인간의 피를 이었지만, 완벽한 악마가 되었다.
그리고 뒤에서 몰려오는 수많은 마족과 마물들.
진훈은 패배를 직감했다.
어떻게든 이길 수 있겠지, 지지는 않을 거야.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전장에서 죽는다면 행복하겠는데.’라는 생각. 혹은 ‘어머니를 구하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생각들.
당연했다.
아무리 지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고 하지만, 어렸을 때와 지금은 다르다. 인간이었을 때는 죽음의 위기가 오면 각성하고 성장하면서 위기를 이겨왔다.
하지만 이젠 그런 인간들과의 싸움이 아니다.
성장하고 각성하며 기연을 얻어도 인간이다. 온전한 신격의 진훈은, 그것도 이제 막 온전한 격을 얻게 된 진훈은 오래전 드높은 신격에 든 형을 이길 수 없었다.
이건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진솔이 웃었다.
그 웃음에 환희가 엿보였다.
동생을 이긴 게 그렇게 좋은 것일까.
“형.”
“······?”
“안 쪽팔려?”
“이놈이!”
진훈은 곳곳이 부러졌다가 붙고 성한 곳이 없는 몸을 이끌고 진솔을 도발했다. 아니, 도발이라기보단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진솔은 마기를 더욱 뽑아냈다.
그의 살기와 기세가 거대한 악마의 형상을 만들어 하늘을 뒤덮었다. 그것은 악마의 모든 힘을 사용한다는 뜻이고, 진훈을 진정으로 죽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죽여.”
진훈은 뒤로 물렀다.
진솔은 악귀처럼 웃었다.
“죽어야지, 죽어야지.”
진훈은 진솔을 바라봤다.
이제 더는 싸울 힘이 없다.
그리고······, 그리고 어렸을 때 존경하며 따를 수 있었던 형이 그리웠다. 아버지처럼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지니고 절대 도달할 수 없었던 하늘처럼 보였던 형이다.
진훈은 아버지와 더불어 형을 존경했다.
그리고 라이벌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형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형이 변했다. 아버지와 다투고 진훈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진훈은 그저 사소한 갈등인 줄 알았다. 그러다 집을 나간 형은 수련을 위해 어디론가 간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러다 진훈은 아버지 밑에서 점점 강해졌고 영웅 훈련소에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어디론가 떠났다.
진훈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강해지는 것은 숙명이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더욱 강해져야 했으니까. 진훈도 아버지와 형이 없는 것에 익숙했다.
외로울 때면 더 힘들게 훈련하면 되니까.
또, 한별이라는 친구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형이 이렇게 변한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무황이 되어 혼돈을 지키고 있었던 아버지를 만났을 때, 그때야 들었다. 하지만 그때도 이렇게까지 변했을 줄은 몰랐다.
“날 죽여, 형.”
“넌 날 이길 수 없어.”
진솔이 검은 손톱을 길게 뽑았다.
진훈은 고개를 들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죽는다면, 그 누군가가 형인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형이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아니, 그렇게까지도 안 바란다. 그저 미안함을 알았다면······.
“어?”
그때 진훈의 입에서 헛바람이 나왔다.
다행인지, 당연한것인지 진솔은 진훈을 공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기에 볼 수 있는 장면.
쿠우우우.
하늘의 균열이 잔뜩 벌어졌고.
그곳에서 수많은 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그것은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죽어서 고깃덩이가 된 마물이었다.
그리고.
“별?”
진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악귀보다 더 악귀 같은 요괴왕의 형상을 등에 업은 한별.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수십 명의 영웅이었다.
진솔이 진훈의 반응에 뒤를 돌아봤다.
순간, 진훈은 황금빛 마력을 뿜었다.
화악!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황금빛은 진솔의 뒤통수를 강하게 때려 수백 미터를 날려 보냈다. 진훈은 틈을 놓치지 않고 한별에게 날았다.
오늘이 그 날이다.
서울 강남에서 생겨날 균열.
서울과 마계의 연결점.
한성은 이곳을 지켜야만 한별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도와야 하는데.”
도움을 받아버렸다.
콰아아아.
뒤로 진솔이 쫓아온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대기가 찢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진훈 혼자였으면 금방 잡혔겠지.
하지만 한별이 함께라면 다르다.
키이잉.
진훈의 뒤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생겼다. 요괴왕의 권능이었으며 한별의 왕명이었다. 한별은 그것으로 시공간을 조작하고 물리현상을 역류시킨다.
진솔 정도라면 금방 부술 수 있겠지만, 진훈을 잡는 건 힘들 거다.
“훈!”
한별이 진훈에게 다가왔다.
뒤로는 한별처럼 온전한 신격에 막 다다른 영웅들이 보였다. 정연에서 가장 강한 무력 집단인 [신격 사냥꾼]이다.
“늦었잖아.”
진훈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한별이 진훈의 어깨를 툭 쳤다.
“이런 게 완벽한 타이밍이지.”
“너도 한성 닮아간다?”
“이게 뭐!”
“등장씬에 신경 쓰는 거? 흐흐.”
“그런 거 아니거든!”
서로 같이 있어야 편하다.
진훈도, 한별도.
콰아아아앙!
한별의 장벽이 깨졌다.
거대한 악마의 형상을 등에 업은 진솔이 달려들었다. 한별이 그의 기세를 막아섰고, 진훈이 황금빛 마력으로 한별을 도왔다.
하지만 진솔의 기세만으로 뒤에 있던 신격 사냥꾼 몇 명은 피를 토했다.
온전한 신격이라고 다 같은 급은 아니다.
“너희 형 겁나 강하네.”
“흐흐, 그렇긴 해. 나도 항상 따라잡고 싶었지.”
“······우리가 이겨야 하는 거 맞지?”
“그럼. 당연하지. 무조건 이겨야 해.”
그래야 형과 어머니 모두를 구할 수 있다.
한별은 눈을 빛냈다.
요괴왕의 모든 권능을 끌어다 사용하기 위해, 한성이 선물한 [여의주]를 쥐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힘을 지닌 물건인데, 한성은 자신의 힘을 이곳에 담았고 그의 특기인 마법으로 강화까지 마쳤다.
“진훈, 이거 받아.”
한성이 진훈에게 전해달라던 물건이다.
한별에게 여의주를 준 것처럼, 한성은 진훈에게 꼭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다.
“······봉마수주(封魔數珠).”
모든 악(惡)의 성향을 지닌 마족, 악마 등을 봉인할 수 있는 [신화] 등급의 염주. 웬만한 악마와 마왕까지 마주 보는 것만으로 봉인할 수 있는 진귀한 물건이다.
진솔.
진훈의 형까지는 어떻게 제압만 한다면 악(惡)을 잡을 수 있는 물건이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
72 악마 중에서도 최상위 무력과 격을 지닌 어머니는 이 정도 물건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다.
‘한성이야.’
한성이 보낸 물건이다.
그럼 답이 있을 거다.
진훈은 일단 눈앞에 있는 형에게 집중했다.
* * *
피터는 영국 외곽의 작은 연구소에 있었다. 이곳이 그가 훔쳤던 신인류 복제인간이 만들어졌던 곳이며, 그 원형의 신인류가 있는 곳이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신인류.”
피터는 이곳까지 들어오면서 신인류 복제인간 50명을 쓰러뜨렸다. 이곳의 책임자이자 길성현의 형인 길장현은 그런 피터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강한 건 안다.
최근 떠오르는 인물인 건 아니까.
그런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길장현이 이곳에 대기시킨 복제인간 50명이면 온전한 신격 3명 정도는 쉽게 잡을 전력이었다. 그들에게 들어간 DP만 해도 수백만이었으니까.
“이곳에 신인류는 없다. 네가 죽인 게 전부지.”
“나도 이곳에서 너희들의 복제인간을 빌렸었지.”
“훔친 거겠지!”
“그거나그거나. 하여튼 나중에 알고 봤더니 납치한 거더라? 신인류에게 제약을 걸고 약물과 정신 이능으로 세뇌하고.”
피터의 표정은 차가웠다.
몰랐었다.
그랬기에 딱히 관여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길장현은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후였다. 아니, 처음에 50명의 복제인간을 쓰러뜨리고 들어왔을 때, 잠깐 놀란 게 전부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곳에 신인류는 없다.”
“아하, 지하에 있구나.”
피터는 길장현의 생각을 읽었다.
길장현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살짝 놀라더니 조용히 말했다.
“어쩔 수 없군.”
탁.
그가 무언가를 눌렀다.
그러자 아래서 강대한 기세가 뿜어졌다.
하지만 피터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넌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피터가 길장현에게 물었다.
“딱히.”
길장현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진정으로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느낌.
“참 특이한 인간이네.”
“내가 보기엔 너도 나랑 비슷한 인간이다.”
“뭐, 그럴 수도.”
피터는 손을 저었다.
콰아아앙!
동시에 아래서 다섯 명의 신인류가 바닥을 뚫고 올라왔다. 겨우 몇 개월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과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돌연변이.
아니, 초월종처럼 신격이 없는 인간에서 일부 신격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이다.
대격변이 시작되고, 혼돈이 뚫리고, 마계와 연결이 되면서 그들은 더욱 강해진다. 태초의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인간은 하나하나가 ‘신’이었던 것처럼.
신인류는 그 태초의 인간과 비슷하다.
그래서 피터는 그들이 필요했다.
일개 기업이 소유할 수 없는, 소유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다섯의 신인류는 피터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피터는 그들을 상대했다.
지금 이들이라면 온전한 신격에게도 지지 않을 수준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달랐다. 겨우 온전한 신격에 불과하지만, 피터는 다른 신격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이었으니까.
푸확.
콰아아앙!
소리는 컸다. 신인류의 공격도 매서웠다. 하지만 피터는 평온했다. 달려드는 신인류의 공격을 한 손으로 쳐내고 사각에서 들어오는 이능의 발현을 해체하고.
‘강하긴 하네.’
확실히 복제인간들보다 강하다.
문제는 이것들로 한성을 저지할 수 있느냐다.
‘아직은 약해.’
피터는 차원의 틈에서 훈련을 받는 복제인간을 떠올렸다. 그들도 강하다. 하지만 순수한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인간은 그것을 흉내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피터는 한성을 막기 위해 진정한 신인류가 필요했으니까.
‘그놈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꿨을 것이다.
전 세계는 이상한 재앙으로 시끄러웠다.
‘이때가 기회다.’
이계의 도시를 소환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이한성이 이계의 도시로 바빠지면서 피터를 쫓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미국의 할렘가와 멕시코 일대를 주름잡던 마피아이자, 최근엔 PMC까지 만들었던 엔사르코를 암살했다.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자유를 찾았고 치안을 회복했다.
피터는 그들에게 기회를 줬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DP를 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안전한 장벽, 기본적인 무기, 식량, 잘 곳. 모두 엔사르코의 세력에서 빼돌린 것이지만 말이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중동, 서유럽, 중국 등을 돌면서 평생 단 한 번도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도왔다.
돈과 권력 아래서 착취당하던 사람을 구했다. 그러면서 많은 이들이 피터를 알게 되었고, 이제는 빈민가를 가면 피터를 환영하는 이들까지 생기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피터는 그러면서도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이한성이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언제 또 이곳으로 와서 뒤통수를 칠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이번 재앙은 다르다.
한성은 인류를 대표해 재앙에 맞서고 있다.
한성은, 이곳에 올 여유가······.
“왓더······.”
이한성 저 자식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피터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고 사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 악역(惡役)이 필요할 때.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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