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극이란. >
[과거의 잔상].
한성은 다시 한 번 깊은 기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의 이 세계관에서의 ‘과거’는 [플레이한 게임의 능력을 현실로 가져올 수 있는 능력자]가 키워드다. 아카데미 입학 이전에 수많은 게임을 섭렵하며 그것을 ‘현실’에서의 능력으로 만드는 것.
그렇게 정했다.
그리고 이번 [과거의 잔상]은 한성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플레이했던 [세상의 끝]이라는 게임. 그것이 이번에 한성이 받아들인 기억이다.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실기 시험에서 떨어지려다 겨우 붙었고, 진훈과 한별을 만나 친해지는 것은 너무나 평범한 루트였기에 주변 인물과 친해졌다.
다른 이들이 하지 않은 플레이를 위해 움직이다 보니 진도를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성은 마법사였으며 전투력보다는 재미에 집중했다.
어차피 게임이었다.
한성이 죽은 것만 따지면 수천 번이 넘었을 거고. 한성이 막지 못해서 이 세계가 멸망한 것도 수백 번은 넘었을 거다. 그러는 과정을 통해 한성은 강해졌다.
적의 하나하나의 공략을 꿰뚫고 마법의 이론을 공부하며 수많은 사람을 공략하고 또 공략했다.
그리곤 결국, 종장(終章)을 끝낼 수 있었다.
52년이라는 세월이다.
게임 속에서만 살았던 시간.
한성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과거의 잔상]이 87% 완료되었습니다!
- 나머지 과거는 아직 복구할 수 없습니다.
- ■■■ ■■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남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 당신은 드높은 신격에 다다랐습니다.
- 과거의 대부분을 복구했습니다.
- 당신의 이명이 재정립됩니다.
- 당신의 업적을 확인합니다.
- 악마 사냥꾼, 악의 처단자, 신격을 사냥하는 자, 신격을 먹는 자, 용살자, 용혈 학살자, 가면의 선(善)을 벗겨낸 자, 중립의 왕, 중재자, 세계의 종결자······.
수많은 업적이 떠올랐다.
이번 플레이에 만든 업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 회차에서 한성이 이뤘던 업적이었다. 그 모든 ‘힘’ 한성의 것이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름’만큼은 한성의 것이었다.
- 당신의 이명은······.
* * *
한성의 목소리가 혼돈 전체에 울려 퍼졌다.
천외천으로 올라가면서 이뤘던 드높은 신격은 원래 혼돈으로 나오면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성은 과거를 완성하며 새로운 이명을 받았다.
그 이명은 한성을 증명하는 이름이었다.
[드높은 신격]은 사라지지 않았고.
한성이 과거에 이룬 업적도 마찬가지로 그대로였다.
이제 더는 ‘역행 마법’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신격의 진언(眞言)으로 역행 마법의 힘을 낼 수 있었다.
「 태초의 드래곤, 케이플람 가드니스여. 」
한성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것은 마력이 깃든 것도, 이능이 깃든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성의 ‘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제는 케이플람이 한성보다 격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한성의 기세가 케이플람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난 수천의 용혈을 태웠다. 」
언제?
과거에. 아주 오래전 과거.
한성이 클리어했던 게임인 [세상의 끝]이라는 곳에서.
우우웅.
아직 완전한 힘을 지니지 못한 업적이다.
‘이름’은 있지만, ‘힘’은 없다.
하지만 일부 [초월 신화]는 이름만으로 힘이 되기도 한다.
「 나는 용살자였으며. 」
우우웅!
한성의 신격이 케이플람의 신격을 밀어낸다.
케이플람이 한성에게 도달하기 위해 날았다.
「 신의 목을 벤 자. 」
말도 안 되는 업적.
이름뿐인 업적이었지만, 그 이름의 힘은 한성에게 역천(逆天)의 힘을 부여했다.
케이플람은 마법과 오러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중재자의 권능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 수천 번의 세상이 멸망할 때. 」
케이플람의 권능은 한성에게 닿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강대한 무언가 그를 보호했다.
그것은 신의 목을 베고.
세계가 수천 번 멸망할 때.
홀로 세상을 지켜나간 자의 힘이다.
케이플람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주 익숙한 업적과 힘이다.
「 홀로 세상을 지켜온 자. 」
케이플람은 자신의 신격이 무너져가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한낱 인간이 뿜는 이 업적의 힘은 루시퍼의 그것과 같았다. 아니, 비슷했다. 이 앞의 인간이 뿜는 말도 안 되는 규격 외의 힘은 루시퍼보다 강력했다.
「 나, ‘종천(終天)의 구도자’ 」
이 세상의 끝이라는 뜻이며, ‘영원’이나 ‘영구’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성은 그 영원의 끝을 찾아가는 자이다.
쿠우우웅.
케이플람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한성의 진언(眞言)에 신격이 깨지고 권능을 잃었다.
그리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유일한······, 변수이자. 」
한성은 깊은 과거 속에서 얼핏 알 수 있었다.
베리알이 했던 말, 루시퍼가 원하는 것. 그리고 이 케이플람이 한성에게 하는 말까지.
「 하늘의 끝을 바로 잡는 자. 」
케이플람은 무너졌다.
그가 지닌 규격 외의 힘에.
그리고 그가 나아가야 할 미래에.
케이플람의 신념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신에 대항하고 루시퍼를 따르는 이유는 한성이 존재하는 이유와 같았다.
케이플람이 힘이 있더라도 한성에게 반하지 못한다.
“돌아가라.”
한성은 힘이 빠진 케이플람에게 말했다.
죽어 마땅한 놈이다.
하얀이를 데려가기 위해 한성과 이곳의 모든 이들을 죽이려 했으니까. 하지만 케이플람이 없으면 루시퍼는 힘들어진다.
지금은 몰라도 이들은 나중에 한성의 편에 서게 될 거다.
‘그리고 하얀이의 핏줄도 핏줄이니까.’
한성은 뒤에 눈을 감은 채 둥둥 떠 잇는 하얀이를 바라봤다.
「 난 이곳에서 죽어 마땅하다. 」
패배한 순혈의 드래곤이었으니까.
살 가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가 죽어선 안 되는 이유를 안다.
한성은 그에게 말했다.
“살아서, 이 세계의 끝이 올 때까지 직접 갚아라.”
케이플람은 한성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반박할 수가 없는 말이다.
죽음은 형벌이 아니라 축복이겠지.
* * *
진훈은 어느 순간부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진훈은 아버지와 힘을 합해 아스모데우스의 신격을 끌어내렸다. 이후, 진훈은 계약으로 연결된 아스모데우스의 악(惡)을 영혼을 담보로 태우기 시작했다.
그 태우면서 생기는 에너지는 케이플람에게 쏟았다.
계획은 좋았다.
하지만 진훈이 알지 못하는 게 있었다.
- 아들아.
진훈을 알아보지 못하던 아스모데우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진훈에게 너무나 멀쩡하게 말을 한다.
진훈은 타오르는 육체 안에서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끊어질 듯한 영혼에 정신이 희미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목소리에 응답했다.
‘엄마.’
- 날 잊어라.
진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잊으라고? 어떻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진훈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위해 살아가는 아버지에게 닿기 위함이며, 언젠간 따듯한 어머니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런데 왜?
화르륵!
진훈을 태우는 악(惡)이 더욱 커진다.
- 아무리 애를 써도 난 돌아갈 수 없다.
무슨 일이길래.
안 된다면 왜 안 되는지.
왜 갔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하지 않은가.
진훈은 이를 악 물었다.
전신이 타오른다.
아스모데우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은 진훈이 모든 것을 부담하는 중이었고, 그런데도 살아있는 것은 아버지가 지닌 정화의 힘이었으며 어머니의 자비이기도 했다.
- 내가 이곳에 있어야 너와 네 아비가 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
실패하면 다시 달려들고,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된다. 힘들면 잠시 앉아서 쉬면 되고, 홀로 안 되면 친구들이 있다. 모두 힘을 합한다면 세상이라도 못 구할까!
- 포기해라. 날 놔라.
진훈은 이를 악물었다.
포기? 안 된다.
당장 죽을 것 같아도 어떻게 어머니를 놓는단 말인가!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아스모데우스의 모든 악을 태울 기회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달려왔는데.
- 날 놔야 한······.
‘괜찮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끊기고 익숙한 목소리가 진훈의 귓가에 들렸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고 지켜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친구.
‘네가 억지로 붙잡지 않아도 돼.’
안 되는데······?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약속할게. 어머니는 직접 구하러 가자.’
그게 가능해?
어떻게 닿을 수가 있지?
‘날 믿어.’
진훈은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사라졌다.
영혼이 타오르는 고통 속에서 진훈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 *
어느 순간부터 생방송의 음성은 송출되지 않았다. 케이플람의 등장과 영웅들의 대항. 그리고 몇의 희생을 담보로 한 공격.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한성과 케이플람의 대화는 이곳에서 끝나야 했다.
- 무슨 일이야 ㄷㄷ
- 한성이 돌아왔는데!! 갑자기 끝났네.
- 역시 한성인가.
- 근데 왜 갑자기 아무 소리도 안 들림? 나만 그럼?
- 어? 나도 안 들려.
- 버퍼인가.
- 음성 끈 것 같은데, 무슨 말 하던데 그거 때문인가.
- 근데 한성은 왜 저렇게 강해진 거임?
한성과 케이플람이 서로 마주 서서 신격으로 대적하는 모습이 나오자 음성이 끊겼다. 중간에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더니 케이플람이 힘없이 쓰러졌다.
다른 이들이 보기에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거다.
하지만 한성이 하얀이에게 가면서 그 궁금증은 사라졌다.
한성은 케이플람을 꿇리고 하얀이를 지켰다.
- 아 딸아!!
- 하얀이 되찾았다ㅜㅜ
- 진짜 저 드래곤이 데리고 갔으면 구독 끊었다--
- 야, 드래곤이 가져가려면 한성이 졌어야 하거든!
- 그게 구독 끊는 게 문제냐.
- 미친놈.
- 우리 하얀이ㅠㅜ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진훈이었다.
어느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선 진훈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진훈의 몸을 감싸며 타오르고 있는 마기는 아직도 똑같다.
전혀 줄지도 않고 난폭한 기세를 사방에 휘두르고 있었다.
- 큰일 나는 거 아니야?
- 진훈 어떻게 된 거야.
- 왜 아직도 저래?
그때, 그에게 무황과 한성이 날아갔다.
그들도 진훈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무황이 진훈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한성이 무황을 멈췄다. 그리곤 직접 다가가 악몽을 꾸는 듯한 진훈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리곤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 몇 마디를 하자, 진훈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그를 감싸고 있던 검은 마기가 쭉 빠져나갔고 그의 모습은 악마가 아닌 순수한 진훈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 미친, 한성 각성함?
- ㅋㅋㅋㅋㅋㅋㅋ뭐야, 이젠 말로 드래곤도 잡고 사람도 살림.
- 예수가 나타났다.
- 신이다! 이번 이명이 뭐라고? 종천의 구도자?
- 뭔 뜻이지.
-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ㅋㅋㅋㅋㅋ
- 허경영임? 이게 뭔 상황이래.
- ㅋㅋㅋㅋㅋㅋ난 기적을 보았다.
- 미친놈들. 지금 다 웃을 때냐. 방금 한성이 세상을 구했는데.
- 세상을 구하긴, 하얀이랑 진훈을 구했지.
-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한성은 볼 때마다 스케일이 상상을 초월해.
- 이젠 구울 리그는 못 보겠음. 어벤져스? 그 영화도 시시하더라.
- 난 지구의 절반이 사라졌다가 한성이 구했다고 해도 믿을 듯ㅋㅋㅋㅋㅋ
- └미친놈아! 스포하지 마라!
- 아마 과거로 가서 한 번 구했을 수도 있어.
- 아니, 아마 회귀자일 듯. 한 번 이미 세상을 구하고 다시 온 거야. 살리지 못한 친구가 있어서.
- 그것도 아닐 듯. 그냥 여기가 클리어한 게임 속인 거야.
- └ 뭐래, 미친놈이.
조금만 틀어졌어도 세상이 멸망했을 작은 전쟁이 희극이 되는 순간이었다.
< 희극이란.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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