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잔상. >
[세상을 보는 일천 개의 눈]으로 불리는 ‘인드라’는 하늘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급히 고개를 올렸다. 그녀가 타고 있던 네 개의 상아를 지닌 코끼리 신수 ‘아이라바타’도 짓밟고 있던 거신을 치워버리고 길게 울기 시작했다.
지독한 불길함을 느낀 것이다.
“이게 무슨.”
파지직.
인드라가 금강저(金剛杵)를 굳게 쥐자 번개가 흘렀다.
올림푸스의 제우스.
아스가르드의 토르.
그와 비견되는 강력한 천둥의 ‘신’이다.
“마루트.”
인드라는 자신의 수행원인 폭풍우의 신 ‘마루트’를 불렀다.
“네, 인드라님.”
“재앙(災殃)이다.”
“예?”
마루트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다.
거신의 침공은 커다란 사건은 맞았지만, 재앙(災殃)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피해는 있겠지만, 오히려 오랜 평화에 나태해진 신격들에겐 좋은 자극이기도 했다.
그그극.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바닥이었다.
그리고 하늘이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성역의 땅. 그리고 천외천의 하늘. 그것이 갈라지고 부서지며 검고 더러운 기운을 뿜기 시작한다.
인드라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천 개의 눈으로 이 재앙의 시발점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세상을 본다. 천외천의 ‘신의 땅’을 제외하곤 모든 곳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곳.
“저기다.”
인드라는 마루트에게 눈빛을 주곤 날아올랐다.
하지만 거신 몇 마리가 인드라가 전장을 빠져나가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태초의 거신 헬리오스가 달려들었다.
“어딜 가느냐!”
“쳇.”
마루트는 앞을 막아섰지만, 역부족인 걸 아는 인드라는 그냥 갈 수 없었다. 아이라바타 위에서 금강저를 휘두르며 헬리오스의 ‘태양의 마차’를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금강저에서 뿜어진 번개와 불길이 만들어낸 마차 사이에 수증기로 이뤄진 하얀 막이 생성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플라즈마 형태의 파장.
치이이이익.
수만 도가 넘어가는 고열에 전자와 원자핵이 분리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들 정도 되면 이런 현상은 공격용으로도, 방어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찰나의 순간.
그들 사이엔 수백 번의 공방이 오고 갔다.
상대의 신격을 흔들고 플라즈마로 파고들며 불길과 번개가 부딪히며 유형화된 ‘격’으로 서로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둘은 이 정도로 쉽게 결판이 날 상대가 아니었다.
인드라는 마루트에게 시선을 줬다.
- 혼자라도 가!
마루트가 인드라의 시중을 들고 있지만, 그는 그 자체로도 강한 신격이다.
폭풍우의 신.
황금 갑옷을 입고 천둥과 번개의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황금 도끼로 구름을 가르고 폭풍우를 부른다. 그도 지구에 내려간다면 그 자체만으로 재앙(災殃)이 될 신격이다.
“어딜!”
헬리오스는 그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인드라의 방해로 그를 잡지 못했다.
* * *
허공으로 올라온 마루트는 재앙의 진원지를 찾았다. 인드라가 안내해주는 곳으로 향하면서 급격한 시공간의 비틀림을 발견했다.
“이곳이군.”
비틀린 시공간의 깊이를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천외천의 존재이니 완성된 ‘드높은 신격’이겠지. 하지만 이곳에도 등급과 수준이 있다. 그리고 이 정도 깊이의 세계 ‘개입력’이라면 결코 낮은 수준은 아닐 것이다.
마루트는 잔뜩 긴장한 채로 비틀린 시공간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하늘과 땅에서 솟은 재앙(災殃)은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젠장.”
도대체 뭐길래 이런 재앙을 부르고, 그 재앙 속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것일까.
마루트는 이놈을 놓쳐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황금 망치를 휘둘렀다.
콰아아아.
파지지직!
재앙을 밀어내고 시공간의 비틀림 안에 있는 재앙의 근원지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이 재앙을 피해 없이 막을 수 있다. 아니, 찾지 못하면 안 된다.
안 그래도 거신의 습격으로 전력을 쉽게 뺄 수가 없다.
그런데 이 정도의 재앙이 성역을 그대로 덮친다면? 거신들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이 성역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콰과과과!
번개가 치고 먹구름이 몰려들며 폭풍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재앙을 밀어냈다. 폭풍우 절반 이상이 재앙에 먹혀 사라졌지만, 나머지 절반은 재앙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무슨 재앙 따위가 이렇게······!”
마루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신’이 노하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성역에서 음모를 꾸민 것인가.
이 정도의 재앙은 주신급이 아니면 만들어내기 힘들다. 지금 딱 생각나는 것은 올림푸스가 아니면 아스가르드다. 하지만 두 세력은 거신 최고 전력의 기습을 막아내고 있는 상황.
그곳이 아니라면?
크투룰?
마루트는 기회를 봤다.
재앙이 꿈틀거리며 물러났고 강하게 비틀렸던 시공간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다!”
마루트는 그렇게 그 시공간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마루트를 툭 밀었다.
“어후, 죽을 뻔했는데······, 구해줘서 고마워.”
당황한 마루트는 몸의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졌다.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뻗었던 손이 시공간의 비틀림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뒤엔 ‘재앙’이 비틀린 시공간을 오염시키고 있었다.
마루트는 시선을 돌렸다.
누가 밀었으며, 이 말을 한 놈은 누구인지!
“······인간?”
그의 시선에 인간에게 도달했을 때는 이미 몸의 절반이 재앙으로 오염된 시공간에 담겨 있었다.
“앗, 미안. 근데 내가 안 밀었으면 나 죽였을 거잖아.”
이한성은 그렇게 말했지만, 마루트는 한성이 구축한 시공간의 틈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시공간의 틈 속에서 재앙과 싸워야 할 거다.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한성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운이 좋았다.
이번 과거의 잔상은 한성을 무조건 죽이겠다는 듯이 과거의 잔상이 끝나지도 않은 한성을 집어삼키려 했지만, 하필 적당하게 강한 마루트가 와서 한성을 구하고 스스로(?) 죽어 버렸다.
그리고 운이 더 좋은 건, 이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거다.
인성파탄자 한성은 그렇게 인도의 성역을 유유히 빠져나와, 친구들이 기다리는 혼돈으로 향했다.
* * *
성시연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본래 성시연은 화가 그리 많은 성격은 아니다. 게다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에는 더욱.
그냥 저 케이플람 가드니스라는 태초의 드래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아마 릴리스의 마음이겠지.
신의 충견.
중재자라는 이름의 독재자.
뭐, 이름을 붙일 건 많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 분노가 성시연의 힘이 된다는 것이다.
화악.
성시연은 다시 한 번 불타올랐다.
거대한 발록의 검은 형상 중앙에 성시연이 있다.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그 형상이 움직이며 케이플람을 공격한다.
콰과과과.
그녀의 주먹 하나가 나가면 발록왕의 주먹이 케이플람의 신격을 불태우며 나아간다.
케이플람은 단순히 눈빛 하나로 그것을 막아냈지만, 옆에서 돌진하는 진훈은 쉽게 막아낼 수 없어 보였다.
왜인지 안다.
진훈의 힘은 아스모데우스.
격노의 정욕의 마신이며.
72 악마 중에 32번째 악마.
마계의 일흔두 군단을 통솔하는 마왕이기도 하다.
그런 ‘악(惡)의 신격’이 ‘악(惡)’ 자체를 소모하면서 싸운다. 진훈은 아버지인 무황과 함께 아스모데우스를 진훈의 몸에 강림시켰고 진훈은 그녀의 악(惡)을 실시간으로 태워 부스터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의 악을 태워, 그녀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쉬운 게 아니다.
그 강력한 무황은 이미 쓰러져 있었으며, 진훈도 죽음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으니까.
콰아아아앙!
하지만 그만큼 강하다.
진훈이 케이플람에 충돌할 때마다 줄곧 제자리에 서 있던 케이플람이 블링크와 환영 마법을 쓰면서까지 진훈을 피한다.
거기에 성시연이 지닌 릴리스의 힘에 발록왕의 힘까지.
아무리 릴리스가 신격 중에서 ‘중위’에 이르는 강하지 않은 악마였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원래는 천사와 신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최전선의 영웅이었다.
성시연은 발록왕의 검을 들었고.
진훈은 검은 마기를 더욱 태웠다.
화이트 드래곤인 케이플람은 점점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가 지닌 중재자의 힘은 이미 힘을 잃었고, 성시연과 진훈은 점점 강하게 그를 몰아쳤다.
‘시간이 없어.’
성시연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렇게 몰아붙이는 건 잠깐이다.
진훈은 힘을 빠르게 소모하고 있었고 성시연도 마찬가지다. 1초, 1초 지날 때마다 육체가 삐걱거리고 영혼이 소모되는 느낌이다.
이대로면 몇 분이면 탈진한다.
그리고 케이플람은 멀쩡하겠지.
그래서 그는 적극적이지 않다. 방어하고 피하면서 기회를 본다.
시간은 케이플람의 편이었다.
“우리도 돕는다.”
한별과 얜 샤를. 그리고 안혜림이 달려들었다.
세르게이와 나디아도 마찬가지다.
이제 중재자의 힘을 사용하지 않으니, 시선 정도는 끌 수 있을 거다.
한별은 어둑시니를 뒤집어쓰고 [왕명]을 발현했다.
당연히 역부족이다.
하지만 어둑시니는 요괴왕.
- 도와줄까?
어둑시니가 한별에게 물었다.
한별은 이를 악물었다.
진훈은 반쯤 죽어간다. 악(惡) 자체를 태우면서 자신의 생명 또한 쏟아붓고 있다. 진훈이니까 버티는 것이었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죽었을 거다.
- 내가 도와줄 수 있다.
한별은 어둑시니의 힘을 빌려 사용한다.
그게 계약한 인간과 신격의 관계다.
하지만 어둑시니는 한별에게 ‘강림’이 가능하다. 마치, 지금의 진훈처럼.
‘내 힘으로 강해지고 싶다.’
그 때문에 어둑시니에게 의지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둑시니의 힘이지 한별 자신의 힘이 아니니까. 게다가 강한 힘을 사용하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는?”
- 너의 목숨.
“······장난할 시간 없다.”
- 크크. 장난이지. 처음이니까 아주 싸게······, ‘죽음 이후의 영혼’을 갖겠다.
이번엔 진심이었다.
한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진훈을 구할 수 있다면야.
게다가 죽기 전에 ‘계약’을 되돌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 크크크크. 좋아. 그럼 강림을 시작한다.
화륵.
한성은 검고 투명한 요기(妖氣)에 휩싸였다.
요괴도 이 세상에서 벗어난 이세계(異世界)의 힘이었다. 한별은 검은 동공으로 눈을 떴다. 그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왕명은 세계의 규칙을 조정하는 자.
중재자의 힘과 비슷하며, 한성이 신격을 조종하는 것과 비슷하다.
한별이 주먹을 쥐자 케이플람과의 거리가 극도로 좁아졌다. 그의 신격을 무시하고 비늘에 닿았으며, 한별이 손가락을 튕기자 비늘 몇 개가 깨져나갔다.
그 뒤로, 안혜림은 [갤러해드]의 힘을. 얜 샤를은 [오딘]의 힘을 불러왔다. 세르게이는 검을 들어 [검성]의 영혼을 받아들였다.
안혜림의 검이 케이플람의 옆구리에 박혀 들어갔고 얜 샤를의 번개가 케이플람의 머리 전체를 감싸 비명을 불러일으켰다.
세르게이는 멀리서 검을 그어 내렸다.
콰과과과!
하지만.
케이플람은 막아냈다.
그리고 이성을 잃었다.
더는 세계에 개입하는 후폭풍을 걱정하지 않겠다는 듯, 용혈의 힘을 일으켰다.
용혈은 용혈.
게다가 태초의 용이다.
아무리 신에게 대항하면서 힘을 잃었다고 해도, 아직 드높은 신격에도 들지 못한 이들이 위대한 신격인 케이플람 가드니스를 이길 순 없는 법이다.
지금까지는 정말 운이 좋았다.
케이플람은 신들의 전쟁에 다시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몸을 사렸기에 가능했던 상황.
키이잉.
케이플람이 가드니스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이제 더 버틸 수 없을 거다.
“20분이 지났다. 한성.”
뒤로 물러난 곳에서 겨우 의식을 차린 무황이 중얼거렸다. 지금까지는 정말 운이 좋았다. 성시연이라는 여자아이와 진훈의 ‘악마화’가 첫 번째 천운이었고 뒤로 다른 아이들의 신격이 ‘강림’한 게 두 번째 천운이었다.
이제 세 번째 천운.
한성만 오면 된다.
하지만······ 그가 온다고 달라질까?
무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이라도 더 싸우려 했다. 지금 케이플람이 쏟아내려는 권능 한 번 정도는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마룡, 무희, 투신.”
그들은 무황의 곁에 있었다. 진훈과 무황을 보호하다 무황이 쓰러지자 오로지 무황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거다.
“더는 안 됩니다.”
투신이 무황의 앞을 막았고 무희는 무황이 나가지 못하게 결계를 구축했다.
“무황. 당신이 죽으면 우리의 대의(大意)는 이어질 수 없습니다.”
“강철님 만큼은 절대로 죽어선 안 됩니다.”
무황은 그런 그들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들은 안다.
무황이 마음먹으면 행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이들이 아무리 말려도 마찬가지다.
“안 됩니다. 이번만큼은.”
이젠 마룡까지 무황을 막았다.
셋은 무황의 앞을 막아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무황의 눈동자가 먼 곳을 바라봤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왔네.”
번쩍!
무황의 말과 동시에 강렬한 빛이 터졌다.
천외천에서 혼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는 뜻이며, 그 신격이 드높은 신격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혼돈 전체에 울려 퍼졌다.
「 내가 왔다. 이 도마뱀 새끼야! 」
쩌렁쩌렁한 역행 마법이 혼돈을 울렸다.
동시에 케이플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 아, 이게 아니지. 」
그 목소리에 친구들 몇은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에 일부러 저런 장난을 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 수천의 용혈을 태우고, 수백의 신격을 베었으며, 수십의 신격을 삼킨 종장(終章)의 종결자. 」
그 한마디.
케이플람의 신격이 확연히 줄었다.
「 아, 이거 답답하네. 그냥 죽어라! 이 자식아. 」
< 과거의 잔상.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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