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이 필요할 때.(8권 시작.) >
“이한성!”
성시연이 한성을 불렀다.
방송을 다 봤다는 듯, 우리가 막아보겠다는 눈빛이다.
그녀의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등에 업은 발록왕의 영혼은 그 무엇보다 강대했다. 이미 그녀는 온전한 신격 끝에 다다라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발록왕’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격’은 아니었으니까.
서로 무언가를 묻고 싶은 눈빛이었지만, 지금 서로 대화할 여유는 없었다.
“우린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진훈의 외침이었다.
슬쩍 옆에 있던 아버지인 무황을 바라봤지만, 둘은 대화가 없었다. 전형적인 아들과 아버지의 모습이랄까. 그렇지만 둘 모두 기분은 좋은지 슬쩍 웃고 있다.
“나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얜 샤를이었다.
그저 조연으로 끝났어야 할 그녀는 한성이 데리고 키워줬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오딘’의 힘을 이어받아 ‘궁니르’를 사용하며 마법과 번개의 힘에 통달했다.
아직 오딘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어색했지만, 그녀의 힘은 케이플람의 공격을 막고 반격을 할 정도는 되어 있었다.
한별, 안혜림, 세르게이, 나디아.
다른 친구들도 한성에게 자신을 믿어 달라는 눈빛을 보였다.
한성은 케이플람을 바라봤다.
그는 모두를 홀로 상대하면서도 결코 힘든 내색이 없었다. 그저 한성을 직접 공격하지 못한다는 귀찮음과 답답함이 보일 뿐이었다.
“다녀와라.”
무황이 황금빛 오라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한성은 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한성을 믿어준다. 무엇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과 한성의 시선만 보고선 한성에게 자신들의 목숨을 맡긴 거다.
한성은 이래서 친구들이 좋았다.
그렇기에, 믿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다녀오겠습니다.”
한성은 공간을 뚫고 혼돈의 끝에 도달했다.
케이플람은 한성이 천외천으로 갈 줄 몰랐던 것인지 그를 다급하게 막으려 움직였지만, 무황과 친구들이 모두 달려들어 케이플람의 움직임을 막았다.
콰아아앙!
수많은 마법과 이능. 그리고 주먹과 검의 충돌.
그것은 혼돈을 다시 한 번 휩쓸었고, 한성은 그 폭발을 뒤로하고 혼돈의 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한성의 몸이 천외천으로 들어가는 순간 거대한 신격이 한성의 육체와 영혼을 휘감았다. 오래전 잃었던 인간의 신격을 되찾는 과정이다.
카가각.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영혼이 탈각(脫殼)하고 육체가 환골(換骨)한다. 업적과 권능으로 덕지덕지 붙였던 혼잡한 ‘신격’은 모두 벗겨지고 태초에 인간이 탄생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두두둑.
피부가 벗겨지고 뼈가 움직인다.
영혼이 바뀌면 육체도 바뀐다.
가장 순수하고 신(神)과 가까운 모습으로.
천외천(天外天).
이곳은 신들의 세상이다.
그 어떤 존재도 이곳에 오면 드높은 신격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한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곳에 오자마자 하나의 [드높은 신격]이 되었다.
“후.”
길게 숨을 내뱉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힘. 순수하고 깨끗한 신격.
이전에 억지로 끌어 올린 힘과는 전혀 달랐다. 스스로 쌓아 올린 ‘업적’에 ‘관종의 신’이라는 이명의 권능으로 ‘관심’을 ‘격’으로 다듬고 [초끈]을 이용해 억지로 붙잡아 올린 그의 드높은 신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한성은 고고했고 드높았다.
“오랜만이군.”
한성은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뱉어낸 다음 눈을 떴다.
이곳에 있는 동안만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완벽하게 [드높은 신격]이었지만, 영혼이 탈각하고 육체가 환골하는 것만으로도 한성은 한층 성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가한 제약을 한층 벗어낸 것이니까.
- 천외천(天外天)에 도달했습니다.
- 당신의 영혼이 탈각(脫殼)하고 육체가 환골(換骨)합니다!
- 당신은 [드높은 신격]에 도달했습니다.
- 당신의 이명을 재조정합니다.
- ······.
- ······.
- [과거의 잔상]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 당신의 과거가 완료되어야만 ‘이명’을 재조정할 수 있습니다.
한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다.
한성은 주변을 둘러봤다.
천외천은 하나의 대륙이었다. 산맥과 바다가 있는 사각형의 대륙. 끝으로 가면 바닷물이 아래로 떨어지고 산이 매끈하게 잘려있다.
아무것도 없는 파란 하늘에 떠 있는 대륙.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그대로 담고 있는 천국 그 자체.
그게 천외천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폐허.”
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혼돈의 끝과 연결된 천외천의 입구 주변은 이미 폐허가 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원래는 가파른 절벽을 뒤로하고 앞으론 우거진 숲과 기다란 강이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검게 타고, 구멍이 뚫리고, 지반이 갈라져 있다.
이곳은 신들의 땅이다.
당연히 웬만한 충격으로는 지형의 변형을 구경할 수도 없는 곳이다. 아마 이곳에서 일어났던 전쟁이 지구에서 일어났다면 지구는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그만큼 이곳에서 일어난 전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쿠우웅.
콰아아아아.
아주 먼 곳에서 강렬한 파장이 전달된다.
그것은 거신과 신격들의 싸움에서 나오는 격의 향연이었다.
“다행이군.”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과거의 잔상]을 진행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한성이 돌아가기도 전에 혼돈으로 향하는 입구가 파괴될 수 있으며, 거대한 ‘제약’이 혼돈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성의 인생에서 가장 크고 길었던 과거. 이 세계관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과거는 바로 [세상의 끝]을 플레이했던 52년이다.
“얼마나 큰 ‘제약’이 닥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곳의 신격들도 이것을 막을 수 있을까?
차라리 못 막으면 좋다.
손쉽게 ‘종장’에서의 만나야 할 ‘적’의 전력을 깎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한성이 ‘제약’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였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그게 중요했다.
이곳에 피해를 주는 것은 두 번째.
첫 번째는 과거의 잔상을 끝내고 [드높은 신격]에 가까운 모습으로 혼돈으로 돌아가 친구들을 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케이플람을 이기고 하얀이를 지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팟.
한성은 시간이 없기에 빠르게 움직였다.
무황이 30분은 버티겠다고 했지만, 누군가 조금만 실수하는 순간 그 누군가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 한성은 그 누구도 죽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쿠우우웅.
쿠우웅.
아직 소리는 멀다.
한성은 다시 한 번 공간을 뚫고 이동했다.
그리고 저만치 아주 먼 곳.
희미하게 거신들과 신들의 전장이 보였다. 하늘을 뒤덮는 섬광과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 강렬한 신격의 향연이 대기를 불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아주 높은 성이 보인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아스가르드의 성과 같은 모습.
“아니, 진짜 아스가르든데?”
거신의 수는 많지 않았다.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눠 각기 다른 신화의 신들을 공격하는 모양이었다. 그중 하나가 이곳.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인 오딘과 토르가 사는 아스가르드였다.
하늘 높이 푸른 번개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뒤덮어 달려드는 거신들을 막는 게 보였다. 아래엔 수만 명의 아스가르드 병사들이 죽음을 불사르고 달려들었다.
“이쪽은 아니야.”
큰 변수만 없다면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나중에 주인공의 편에 서게 된다. 오딘과 토르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성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적당한 곳을 찾아야 한다.
거신과 전쟁 중이면서 적이 될 신들. 한성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제약’을 막아낼 힘이 있으면서 완전히 막기 위해선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곳.
“인도의 신화.”
한성은 반대쪽 먼 곳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팟.
기이이잉.
한성의 시야에 차원의 틈이 보였다. 빠르게 지나치는 틈은 구멍으로 보였지만, 한성의 몸이 점점 빨라지면서 수십 개의 선으로 변했다.
천외천에서의 공간 이동은 조심해야 한다.
잘못 하다간 다른 차원으로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후욱.
한성은 인도 신들의 성역 허공 높은 곳에 도달했다.
* * *
- 미친 이게 뭐야. 왜 한성은 어디가고 친구들 밖에 없음?
- 한성 어디감? 죽었음?
- 아님. 저 혼돈의 끝으로 들어갔음.
- 왜? 왜 들어갔음? 가면 뭐 있어?
- 도망간 건가.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한성님이 친구들을 버리고 도망간다고? 분명 저긴 더 큰 위험이 있을 거야.
- 맞아. 한성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냐. 분명 이 사태를 해결할 열쇠를 들고 돌아올 거임.
시청자들은 한성을 믿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함은 점점 커졌다.
- 안 돼. 이건 못 버텨.
- 저건 뭐길래 저렇게 강함?
- 아아, 우리 한별 오빠ㅜㅜ
- 레드 오우거 절반이 죽었음. 원탁의 기사도 마찬가지야.
- 이제 겨우 5분 지난 거 아님?
한성을 돕는 모든 전력이 등장했다고 해도 드높은 신격 중에서도 순수한 태초의 신격인 케이플람을 상대로 쉽게 버티는 것은 힘들었다.
아무리 케이플람이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어도 말이다.
- 헐, 성시연 누님 날아감.
- 옆에 있던 저 발록 때문에 살았음ㅜ 근데 발록 악마 아님?
- 악마는 아니지, 마계에 있는 마물이긴 하지만.
- 헐, 얜 샤를 번개 창 가지고 놀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궁니르를 가지고 논다고?
- 꺅! 안혜림 언니 아서 왕의 검인가? 거의 드래곤 반으로 썰릴 거 같은데, 꼼짝도 안 하네.
무황과 진훈은 함께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둘은 말이 없었다.
케이플람의 공격을 뚫고 그의 머리에 닿았을 때, 드래곤 피어가 발동해 진훈의 영혼을 짓눌렀지만, 무황이 황금빛 오라를 터뜨려 구했다.
하지만 둘은 그곳에서 튕겨 나갔다.
수배 미터는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둘은 다시 날아올라 케이플람에게 향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공격은 제대로 통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공격하면 반발력에 데미지를 입고 피를 토한다. 하지만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케이플람의 제대로 된 공격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공격하고 방어한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케이플람은 모든 신격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대기가 진동하고 혼돈의 마력이 소멸되어 사라진다. 혼돈의 입구는 거대한 존재력에 부르르 떨리며 더욱 커진다.
그리고 케이플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튕겨 나간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무황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될지 알아요?”
처음으로 진훈이 자신의 아버지인 무황 진강철에게 물었다.
무황은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듯 대답했다.
“드래곤의 힘은 단순히 마법과 물리력에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신격?”
“그것도 그들 힘의 일부일 뿐이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신격인 이유는 신에게 창조되었지만, 신에게 대항하지 않고 신이 준 임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 임무는 균형의 중재자.
인간과 이외에 종족.
그리고 신격들까지 중재하는 존재다.
세상의 멸망을 막고 선(善)과 악(惡)의 균형을 유지하며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자들을 멸(滅)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신격.
한 마디로 이 세계의 관리자.
그게 용혈이다.
“지금은 그 권능이 많이 약화 되었다.”
무황은 간단히 말했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길다. 지금 현실에 드래곤이 없는 이유이며 이 태초의 드래곤이 루시퍼와 함께 신에게 대적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권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이제 7분 버텼다.
앞으로 최소 3분.
이한성에게 말해 놓은 것이 있으니, 못해도 10분은 더 버텨야 하는데. 케이플람이 관리자의 힘을 사용하려 한다.
“이건······ 막을 수 없다.”
무황이 그렇게 말했다.
진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훈은 평생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적을 만났을 때도 말이다. 죽음이 닥치고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라도 지면 또 싸우고 지면 또 싸우면서 이겨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빠.”
“······.”
“많이 약해졌네요.”
“훗.”
무황은 웃었다.
자신도 안다. 못 이기는 걸 못 이긴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나약한 것이라 가르쳤다. 바로 자신이 이 앞에 있는 아들에게 말이다.
“난 할 수 없지만, 넌 할 수 있지.”
무황은 건강하게 자란 진훈이 자랑스러웠다.
“계약한 신격의 권능을 사용해라.”
“네? 그게 무슨······.”
진훈이 놀라 되물었다.
“네 어머니의 힘. 다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내가 아닌 그녀와 계약했겠지.”
무황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났으며, 균형의 추에 적용되지 않은 자.”
그게 바로 악마였으며 마왕이다.
이젠 악(惡)이 필요할 때였다.
< 악이 필요할 때.(8권 시작.)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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