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이란. >
운명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한성은 이미 베리알의 화신체를 벤 적이 있었다. 그가 어떻게 그 타이밍에 검은 땅에 있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날 지켜보고 있었군.’
하긴, 알리스라는 귀족 마족의 영혼을 수집하기 위해 왔는데 겨우 귀족 마족의 영혼을 대가로 반쯤 현신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말 그대로 비정상적으로 높은 난이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때, 운명의 여신 ‘데크라’와 도박 게임을 했었고 한성이 완벽하게 이기며 받은 라파엘의 업적으로 베리알의 화신체와 그의 신격 일부를 베었다.
덕분에 한성은 [온전한 한 번의 기회]를 얻으며 아마존에서 성배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결국 한성의 손에서 죽지 않았는가.
참, 운명은 묘하다.
한성은 베리알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제 마룡족과 용마족이 상잔하여 멸종할 일은 없다.
“내가 ‘변수’라······.”
그게 걸린다.
그리고 끊임없이 멸망하는 세계라고?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다.
한성은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수많은 상상을 했다. 일주일간 울면서 지냈고 일주일을 살아남기 위해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 가정해 본 게 몇 개 있다.
1. 식물인간.
현실에서 육체가 죽어서 게임 속에 갇힌 것. 식물인간이 되어서 현실에서 부모님 혹은 병원에서 한성을 이 세계에 임시로 가둔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가장 현실성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 그런 기술력이 되는지는 모른다. 안 되겠지. 그래서 반쯤 성공한 기술이 한성에게 적용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2. 꿈.
어떤 소설에서 ‘앗 X발 꿈.’이라는 엔딩이 있지 않은가. 오랜 가상현실 게임 플레이로 인해 무지막지하게 긴 꿈을 꾸는 거다.
하긴, 이 게임만 52년을 했고 다른 게임 플레이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80년을 넘게 가상현실 속에 있었다.
충분히 미칠 만도 하다.
3. 원래 실존했던 세상인 거다.
처음 이 게임이 나왔을 때,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켰다.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세계관. 완벽하게 구성된 세계관. 수많은 인격과 오랜 역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사실, 이런 게 게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거긴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있다.
이 세계는 원래 있던 세계였으며, 어떤 신격에 의해 이 세계가 가상으로 복제되어 게임이 되었고, 한성은 그 실제 세계로······.
“젠장, 이거는 끼워 맞추는 것도 억지 같네.”
그래서 결론은.
“아, 모르겠다.”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1번이었을 경우에도 개발자들이 새로운 스토리를 집어넣은 것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2번은 더더욱 한성의 무의식이니 안 될 게 없을 거고 말이다.
3번이야······.
그게 가장 말이 안 되는 거다.
답을 알고 싶다.
언제까지 여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려고 발버둥치고 싶지는 않다. 최소한 한성의 몸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곳이 정말 게임 속인지 현실인지는 알고 싶었다.
한성은 성배를 꺼냈다.
아직 쓰지 않은 기능이 많다. [지저 세계의 왕]과 겨룰 수 있는 [가상 훈련장 입장권]과 최상급 신성력을 담는 기능 등등.
소원을 사용하면 이 성배는 사라진다.
‘가장 좋은 무기이기도 하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으니까.
만약, 이 성배의 소원권으로 이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나갈 수 있다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소원.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걸 사용할까?
대답은 ‘아니요’. 또 ‘아니오’다.
1번과 2번의 가정이라면 이곳은 어차피 게임이다. 게임의 시스템을 벗어나는 소원이 될 리가 없다.
그렇다면 3번일 경우에는?
이곳이 또 하나의 실존하는 세계일 경우에, 이 성배가 지닌 소원권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기본적으로 게임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아무리 ‘소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영향력의 한계가 있다.
가령 드높은 신격을 죽여 달라는 소원 같은 것.
한성이 어느 정도의 그릇을 감당하느냐가 그 소원이 이뤄질 것인지를 결정한다. 아마, 한성이 다리 한쪽을 바친다면 드높은 신격 하나는 죽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누군가를 세계 최고의 부자로 만들거나, 수명의 제한을 없앤다거나,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될 거다.
‘신격’이라고 하지만 신은 신이니까.
그렇다면 한성을 이 세계에서 구원해 줄 수 있을까?
만약 된다고 했을 때······.
“훗.”
약간 ‘중2병’같은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다.
한성은 이곳에 남을 거다.
혼자 살기 위해 이곳을 벗어나려 이것을 사용하지 않을 거다. 정말 몇 년 안 됐지만, 현실처럼 강렬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한성이 없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까.
없어질까?
아니면 원래의 스토리대로 멸망을 향해 움직일까.
무엇이 되었든. 한성은 이곳에 남아야 한다.
그리고 멸망을 막기 위해 달려야 한다.
“별것도 아닌 것으로 고민하고 있었네.”
정말 별거 아니었다.
한성은 성배를 한 손에 쥐고 [소원권]을 사용했다.
- 소원의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거 때문에 성배를 지니고만 있었다.
어떻게 사용할지.
무엇을 위해 사용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이제는 다르다.
정석적인 공략 루트로 진행한다.
“‘혼돈의 파편’이라는 것을 갖길 원한다.”
[혼돈의 파편]
태초의 신 ‘카오스’.
그것은 바로 이 천외천으로 가는 이 땅이기도 하며 모든 신격이 두려워하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전 회차에서의 한성조차 이것은 겨우 하나의 파편을 구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한성은 마법으로 종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우 ‘성배’로 이것을 얻을 수 있을까?
당연히 안 될 거다.
어디까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 [혼돈의 파편]을 검색합니다.
- [혼돈의 파편]은 [성배]의 영향력을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 [성배]의 사용하지 않은 옵션이 [소원권]을 강화합니다.
- [혼돈의 파편]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 대단한 행운이 발현됩니다!
- [혼돈의 파편]이 있는 위치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 [소원권]을 사용하여 [혼돈이 파편]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한성은 들어왔던 공간의 틈을 바라봤다.
밖에 패연과 세이건이 기다린다.
하지만 베리알은 죽었고 그의 성역이었던 혼돈의 지옥은 무너질 거다. 그의 종속들과 함께 말이다. 이곳은 더 이상 한성이 필요하지 않다.
한성은 [소원권]을 사용했다.
* * *
세이건은 무너지기 시작한 성역에서 동요하지 않고 한성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미세한 공간의 틈이 느껴진다. 어딘지는 찾을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한다.
“안 올 모양인데.”
“죽지는 않았겠지?”
세이건은 예상하지 못한 패연의 말에 흘깃 바라봤다.
“······그 인간 말하는 건가?”
“······뭐, 둘 다.”
패연의 눈동자에 항상 이글거리던 분노는 사라져 있었다. 아마 베리알이 죽으면서 그의 마력도 함께 사라진 것이겠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네.”
복수는 끝냈다.
패연의 가슴은 허무함이 가득 찼지만, 오래전 죽은 아내와 딸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래도 둘에게 할만큼은 했다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복수가 허무하다고 했다.
허무한 건 맞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그것은 복수에서 나온 허무라기보단 복수 이후의 목적이 사라진 것에 대한 허무가 맞을 거다.
“이제 앞으로 우리의 후손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
세이건이 그렇게 말했다.
패연은 아직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세이건의 눈을 마주했다.
복수를 끝냈다.
지난 30년간 혼돈 속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독하게 살아남아왔다. 강해지고 세이건과 모든 용마족을 죽이기 위해서.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게 필요가 없어졌다.
“쉬고 싶어.”
패연의 대답이었다.
세이건은 그 대답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신격과 악마들은 언제나 용혈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으니까. 그것은 저 천외천에 있는 순수한 용혈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혼혈을 눈엣가시로 여긴다.
굳이 나서서 토벌하진 않지만, 보이면 죽여 없앤다는 마음이다.
특히, 이 세상은 절대로 평화로울 수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세이건의 입에선 생각과 다른 말이 나왔다.
“그래, 조금은 쉬어야지.”
콰르르르르.
성역은 무너진다.
이곳으로 몰려들던 혼돈의 악마와 각종 괴수는 흩어지고 용마족과 마룡족들만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놀라게 했던 순혈의 ‘용’ 또한 차원의 틈새로 돌아갔다.
“순혈의 용을 다룰 수 있을 줄은 몰랐네.”
세이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러모로 참 대단한 인간이다.
그때였다.
콰으으응.
아주 먼 곳에서 희미한 격의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오소소.
소름이 쫙 돋아났다.
화륵.
동시에 패연의 손과 꼬리에서 검은 불꽃이 일었다.
“······방금 느꼈지?”
“비늘도 소름이 돋는 걸 누가 믿을까.”
세이건이 그것도 그렇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분명 느꼈다.
이것은 인간으로 드높은 신격에 오른 인간 [금안의 외팔 무투가]이며 [무황]이라고 불리는 이의 황금빛 마력이었으며, 절반은 사탄. 즉, 루시퍼의 기운이었다.
“내가 언젠가 그러지 않았냐”
“뭐?”
“넌 전장에 살아야 한다고.”
패연은 피식 웃었다.
둘의 사이가 갈라지기 전이었으며, 로드가 되기도 전이었다. 어렸을 때 같이 훈련하며 사냥을 다닐 때의 이야기. 마룡족과 용마족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다.”
패연은 검붉은 마기를 뽑아내며 몸을 띄웠다. 그리곤 한 줄기 빛으로 화해 파동의 근원지로 출발했다.
“하여간.”
둘 다 몸이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혼돈이 끝에서 일어나는 이 거대한 전투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루시퍼는 혼돈을 뚫고 하늘에 닿으려는 자.
무황은 그 루시퍼를 막으려는 자.
패연과 세이건은 무황과 같은 생각이다.
루시퍼가 하늘에 닿는 것을 막아야 한다. 루시퍼가 혼돈의 끝에 도달해 천외천으로의 길을 뚫는 순간, 도달한 존재는 드높은 신격을 얻으며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될 거다.
하지만 아래에 있는 혼돈과 지상의 모든 존재는 그 신격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만다.
[혼돈]은 일반 존재에겐 천외천에 닿아 드높은 신격이 되는 방법이었지만, 천외천에 ‘갇혀’있는 신격이 아무런 제약 없이 아래로 내려올 방법이기도 했다.
세이건은 멀어지는 패연을 따라갔다.
* * *
한성이 할 일은 다 했다.
루시퍼는 천외천에 닿으려 할 거고 혼돈의 끝에 도달해본 몇몇은 그것을 뚫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 거다. 누가 맞는지는 모른다.
1년에서 2년 정도를 벌고 싶으면 무황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거고. 지금이라도 혼돈의 끝에 있는 [혼돈의 파편]을 얻어 천외천의 존재에게 대항하고 싶으면 루시퍼처럼 뚫으면 된다.
나중에 가서는 [혼돈의 파편]을 저 위에 존재들이 먹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뭐, 지금 나랑은 상관없지.”
패연과 세이건도 그쪽으로 갔을 거다. 그리고 그들은 무황과 함께 루시퍼를 막아내겠지.
루시퍼가 절대로 죽으면 안 되는 존재지만, 사탄인 그가 그 정도로 죽을 일은 없다. 그저 실패하고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게 전부다.
“룰루.”
한성은 루시퍼가 가지려 하는 [혼돈의 파편]이 아닌 다른 파편을 얻으러 왔다.
운이 좋았다.
한성의 행운이 작용하면서 이곳까지 이동시켜 주다니, 원래였으며 이곳까지 도달하는데 최소 수개월은 걸렸을 텐데 말이다.
아마 이 파편이 도착만 한다면 가장 얻기 쉬운 파편일 거다.
물론, 한성 한정이다.
[그대는 도전자인가?]
웅장한 목소리가 사원 내부에 울려 퍼졌다.
찌릿하다.
깊은 곳에서부터 [혼돈]의 힘이 퍼진다.
“맞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걸겠는가.]
모든 걸 걸 수 있다.
현실의 재산, 팔과 다리, 어느 감정. 혹은 생명까지.
“제 생명입니다.”
[모든 걸 건다는 것이군.]
“맞습니다.”
이곳은 던전이다.
[행운의 여신]이라는 이명을 지닌 포르투나. 한성과 내기 게임을 했던 ‘데크라’를 이겼음에도 그녀의 꾀에 넘어가 한쪽 팔을 잃기도 했던 여신의 의식이 잠들어 있는 던전.
그렇다.
이곳은 [운]을 겨루는 던전이었다.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하지.]
꽤 섬뜩한 대사였다.
한성은 자신이 없었다.
질 자신이.
< 운명이란.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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