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듭은 하나가 되어. >
“오오. 신기하네.”
세이건이 한성 앞에 떠오른 홀로그램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용마족의 로드인 것치고는 위엄 따위는 없다. 오래된 친구인 패연과 말을 트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자, 이제 말도 들릴 겁니다.”
치직.
[용마족의 로드 세이건이 마룡족의 성역에 들어갔습니다. 전투 중입니다.]
그 말에 둘의 표정이 굳어졌다.
둘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베리알은 상당히 음흉한 놈이다. 주변 악마의 성역은 물론이고 세력이 강성한 곳에는 베리알이 마력으로 만들어진 [기생충]을 심어놨다.
누구에게 있는지, 어떻게 넣었는지는 베리알만 안다.
[더러운 종자들.]
그 말을 들은 패연이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베리알도 천사에서 타락한 놈 아니야?”
“그러게, 저게 쟤가 할 말인가.”
패연은 세이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언제부터 대화를 시작했는지 모르게 자연스럽다. 30년 동안 한마디 하지 않다가 살짝 풀어졌다고 이렇게 편한 거다.
패연은 그게 이상해 입을 다물었고 한성은 그렇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입을 열었다.
“크흠. 그렇긴 하죠. 역천사였으니.”
루시퍼의 반역에 도모한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베리알은 아직도 루시퍼를 증오한다. 박쥐처럼 이리붙다 저리붙다 자기가 루시퍼를 선택한 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성이 안 된 놈이다.
[조금만 더 하면 돼. 마룡족과 용마족을 상잔시키고 이후에 두 로드를 쓸어버리면 끝이야.]
[파이몬님과 마몬님이 참여하고 싶다고 전해왔습니다.]
[그놈들이? 크크. 비겁한 새끼들. 이제 용혈이 상잔하려 하니 고개를 디미는 게 보기 안쓰럽구나.]
“이 새끼들이!”
패연은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세이건은 참 대단한 놈이라는 듯 한성을 바라봤다.
세이건이 패연을 설득하기 위해서 지난 30년 동안 노력했었다. 수십의 용마족이 죽기도 했고 세이건이 직접 마룡족 수백을 죽이기도 했다.
전쟁 아닌 전쟁을 해왔던 거다.
이번엔 세이건이 죽기 직전에 빠지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인간은 절대 풀 수 없을 것 같은 매듭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풀어 버렸다. 그것도 완벽하게.
“······내가 너를 도와줬다고 했나?”
“기억 못 하실 겁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세이건님은 절 보지 못했었으니까요.”
많은 걸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군.”
하지만 세이건의 눈빛은 무언가 본 것 같았다.
한성은 잠시 눈을 마주치다 피했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직접 말해주기 전까지 참겠다는 느낌.
“이제 오해는 풀렸죠?”
한성이 패연에게 물었다.
“······그래.”
“마음 깊숙이 간직한 분노는 사실이었겠죠. 베리알은 그 분노를 증폭하고 자극했던 겁니다. 당신의 몸속엔 이미 베리알의 마력이 잠들어 있으니까요.”
“베리알의 마력?”
“네, 괜찮아요. 의심이 사라지고 진실을 안 이상, 그 마력이 패연 당신에게 해를 끼칠 만한 건 없으니까요.”
패연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의 시선은 한성을 벗어나 세이건에게 멈췄다.
30년이 지난 지금. 패연은 수많은 용마족을 죽였으며 세이건 또한 죽이려 했다. 전쟁을 일으켜 용마족을 쓸어버리기 위해 준비했다.
두 종족이 상잔해 멸종하더라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된다.
그저 패연과 세이건만 싸우면 됐다. 둘의 문제고 둘이 해결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패연은 이상하리만치 종족 전쟁에 목을 맺다.
‘내가 나의 아이들을 사지로 몰고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성은 그걸 베리알의 마력이라고 했다.
순간 분노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아아, 베리알의 마력은 ‘분노’를 ‘힘’으로 바꿔주는 효과도 있죠. 특히, 그 분노의 대상과 싸운다면 배는 강해질 겁니다.”
세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항상 세이건이 패연을 압도했다. 지난 30년 동안 혼돈에서 싸워왔다고 했지만, 세이건이 놀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수백 년을 살았는데 겨우 30년 만에 뒤집히는 건 말이 안 된다.
“저 개 같은 새끼를.”
한성의 설계가 그대로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지금 이 성역에 침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룡족의 성역에 들어왔던 것처럼?”
“맞습니다. 베리알에게 혼돈의 악마와 상급 악마는 많습니다. 아마 지금 우리 셋이 달려든다면 베리알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할 정도로요.”
세이건은 고개를 끄덕였고 패연은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너희 둘이 나머지를 맡는다면 베리알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물론, 패연님은 그렇겠죠. 하지만 저희가 지금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의 휘하들 혼돈의 악마 20과 악마 수천 마리를 한 번에 상대하기엔 벅찹니다.”
그를 자극한다.
당연히 우리 셋은 힘들다.
하지만 나머지 용마족과 마룡족이 힘을 합한다면, 베리알의 아무리 성역에 있더라도 버틸 수 있을까?
“지원이 필요합니다.”
“······너희가 정 그렇다면.”
한성은 씨익 웃었다.
그래, 이제 베리알이 심은 분노를 베리알에게 풀면 된다.
이번 회차에선 [용살자]라는 것은 못 얻을 것 같았지만, [악마 사냥꾼]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헤일렌은 검은 땅 31번 구역에서 한성에게 보낸 긴급 신호를 중간에서 확인했다. 한성이 연락이 안 될 경우를 대비해서 헤일렌에게 일을 맡겨 놓은 것이다.
“신인류의 준동.”
한성이 헤일렌에게 사전에 만들어준 보고서였다.
그곳엔 신인류가 무엇이며 어떤 단체가 어떻게 그 신인류를 이용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나열되어 있었다.
대략적인 줄기는 있다.
하지만 어디서 정확히 언제 시작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이크로, 빅벤, 에어줄······.”
헤일렌의 한성이 1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한 기업을 훑기 시작했다. 대주주의 권리를 이용해 기업 내부의 정보를 추적할 수 있다.
다들 신인류 ‘복제’에 필요한 주요 재료를 만들고, 수입하고, 수출하고, 연구하는 기업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하나하나 추적을 하고 신인류의 재능을 지닌 이들을 찾아다녔다. 제현 그룹의 도움을 받았고 정연과 흑연의 도움도 받았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북극과 러시아 경계, 세르게이 긴급 구조 요청.”
그 신호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나디아에게 향했고 헤일렌은 이번에 구비한 인공위성을 이용해 그곳의 영상을 땄다.
“신인류 발견.”
헤일렌은 한성이 만들어준 보고서에서 [신인류 공략 방법]이라는 파일을 나디아에게 전했다. 다행히도 늦지 않게 도착했고 나디아는 뛰어난 마력 컨트롤 재능을 응용해 ‘격’의 사용법을 깨달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진훈은 투신의 탑에서 신인류를 만났고, 한별은 토벌 임무를 나갔다가 신인류의 습격을 받았다. 성시연과 세르비체도 마찬가지였고 얜 샤를과 안혜림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한성과 친한 이들이었다.
헤일렌은 더욱 빠르게 추적을 시작했다.
최고의 결과는 이 마수가 한성에게 뻗기 전에 끝내는 것.
하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한성과 한성의 친구들이 죽지 않게만 막아보는 것.
“모든 흔적은 영국으로 향해있다.”
하나의 기업은 아니었다. 최소 열 개의 기업. 그들이 하나하나 연결되어 있었다. 마치 거미줄처럼.
몇 개가 진짜일까.
몇 개가 미끼일까.
아니······ 전부 진짜일 수 있다.
헤일렌은 그 기업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압박하기 시작했다.
* * *
한도석은 여전히 아카데미에 있었다. 방학이나 돼야지 검은 땅이나 아마존에 가서 신격과 싸우며 업적을 쌓을 수 있다.
마음 같아선 아카데미 강사를 여기서 끝내고 싶었다.
재앙은 점점 빈번해진다.
전쟁의 불씨는 전 세계 곳곳에서 일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성과 그의 친구들. 한국 영웅 아카데미의 50인 졸업생이 졸업한 뒤로는 그만한 천재들이 보이질 않으니 의욕도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직접 나가서 싸우며 강해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랬는데······.”
한도석은 눈앞에 선 다섯 명의 아이를 보며 목울대가 넘어갔다.
한 명은 한성이 북극에서 보냈고 한 명은 성시연이 검은 땅에서 보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최이명, 제임스 딘, 이창석이 두 명을 보냈고 안혜림이 아마존에서 한 명을 보냈다.
몇 명은 그의 가족들까지 같이 왔다. 물론, 그들의 생계는 한성의 돈으로 책임진다고 했다.
“······난 여기에 평생 묶여 살 운명인가 보구나.”
간간이 격에 강한 이들이 발견된다는 것은 보고받았다. 하지만 격을 약간 더 잘 버티는 정도였고 마력이나 이능에 큰 재능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다르다.
하긴, 한성이나 성시연 같은 애들이 아무나 보내지 않았겠지.
격에 강하다.
아니, 이들은 격을 무시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뿐이었다면 사실 한도석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격을 무시한다지만, 그것은 레벨 6 이하의 신격 아래의 격에만 해당하는 일일 테니까.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마치 어렸을 때의 진훈을 보는 것 같았고, 한별을 보는 것 같았다. 이들 몇 명이 합치면 한성 정도의 미친 재능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희를 받아주시는 건가요······?”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아직 5살 정도라고 했는데, 보이는 건 10살 정도였으니까.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장은 빠르고 육체의 변화도 크다.
앞으로 이 빠른 성장이 어떤 부작용을 낳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조차 옆에서 신경 써 줘야 할 것만 같았다.
“아무리 내가 믿는 영웅들에게 추천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무런 시험조차 보지 않고 들어올 순 없지.”
아이들은 순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방 표정을 풀었다.
아무리 한성이 약속했고 성시연이 약속했다고 하지만 맞는 말인 거다.
그냥 쉽게 들어가려는 것은 사치다.
“물론, 아무런 훈련을 받지 않은 아이가 후보생 시험을 보는 것도 쉽지 않겠지.”
당연한 말이다.
아무리 이들이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이들.
한성에게 들었다.
격을 지닌 영웅에게 한 방을 먹였다고. 성시연의 추천으로 온 여자아이도 마찬가지다. 다 죽어가지만 한 번의 공격으로 귀족 마족의 머리를 날렸다고.
분명 말도 안 되는 재능을 타고났다.
그게 특성이든 격을 무시하던 것이든.
하지만 이들은 아무런 훈련도 되어 있지 않다. 그저 한 번 때린 것이 고작인 것이다.
“앞으로 한 달간 나와 훈련을 할 것이다.”
마침 방학이니까.
“어디까지 성장하고 강해질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하고 너희를 추천했던 그 ‘영웅’처럼 될 자격을 얻을 수 있을지. 그것은 너희들이 하기에 달렸다.”
한도석은 아이 하나하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번 졸업생. 그러니까 레벨 8의 이한성과 이하얀을 중심으로 50인의 영웅은 지금까지 한국 영웅 아카데미의 그 어떤 졸업생보다 뛰어났다.”
특히 이한성은 졸업생뿐만이 아니라, 인간인 그 어떤 영웅보다 강할 것이다. 이미 온전한 신격에 도달했으니까.
“너희도 정말 재능이 있고 노력한다면. 그리고. 누군가를 위해 한목숨 바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영웅은 그렇다.
뒤로 빼고 죽기 싫어서 도망친다면.
절대로 강해질 수 없다.
업적과 격은 도망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니까.
“어쩌면 그들처럼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을 따라갈 아이는 절대로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지금의 생각도 그렇다.
이들은 강하고 재능도 있다.
하지만 이한성과 이하얀. 그리고 성시연과 진훈, 한별, 안혜림 등의 영웅을 따라갈 순 없을 거다. 한도석이 본 그들은 말도 안 되는 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한도석이 모르는 게 있었다.
이미 세르게이와 나디아가 이들과 같은 ‘신인류’에게 공격받아 죽을 뻔했다는 것을.
그리고.
세르게이와 나디아가 마주친 복제 인간들은 훈련받았으며 수많은 시술과 약물로 강화 받아 강해진 복제 인간 따위였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 말도 안 되게 강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는 그게 전부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손을 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들은 다르다. 강제로 강해진 게 아니라. 스스로 정상적인 훈련을 받으며 성장한 ‘신인류’는 한도석이 상상한 이상. 약물로 강화된 이들과 복제 인간 따위는 쳐다도 보지 못할 만큼 성장할 것이다.
추후 한성이 도달할 종장에서 큰 역할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 매듭은 하나가 되어.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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