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의 준동은. >
한성은 부서진 프로스트 리치의 사체를 밟고 섰다. 옆엔 하얀이가 지친 표정으로 주저앉았고 사방에서 달려들던 프로스트 리치의 권속들은 그 자리에 멈췄다.
“아씨, 또 졌어!”
“후훗. 아직 멀었단다. 벌써 아빠를 이기려 하다니.”
한성은 멀리 멈췄던 권속들이 흩어지는 걸 보면서 프로스트의 완드를 쥐었다.
레벨로 따지면 한성과 같은 8이다.
비천한 신격을 벗어난 강력한 신격.
하지만 리치라는 존재가 원래 인간이었고 인간이었을 때 신격을 이루지 못하고 저주받은 리치가 돼서야 신격을 이뤘다. 그렇기에 본래의 레벨 8보단 약하다.
하지만 스스로 구축한 완벽한 성역 안이었기에 한성과 하얀이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고생한 만큼 보상은 충분했다.
- 프로스르 리치를 살해하였습니다!
- 같은 레벨의 신격을 완벽하게 살해하여 ‘별’ 하나가 추가됩니다.
- 강한 행운이 발동합니다!
- [프로스트의 라이프 베슬(준신화)]이 최상급의 상태로 보존됩니다.
- [프로스트 리치의 완드(전설)]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됩니다.
- 업적을 이뤘습니다!
- [성역의 파괴자(전설)]
- [프로스트 리치 살해자(전설)]
- [신화 무대의 연출자(신화)]
한성은 멀리서 찍고 있던 카메라를 바로 앞까지 끌고 왔다.
그리곤 말했다.
“오늘 북극 짱 먹었다.”
* * *
이런 걸 보고 정말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거다.
한성은 이지상을 구하고 키우기 위해 북극에 왔지만, 마침 프로스트 리치가 준동했고 그 덕에 ‘장영실 기지’에 존재하는 기반 시설과 모든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기지 안에서 무조건적인 권력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일단 연구원들과 기지 대장 등은 정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성도 이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소정의 사용료를 받기도 하고 대대적인 투자도 한다.
“앞으로 제현 그룹의 전진 기지가 될 겁니다.”
한성은 그간의 일은 간단히 설명했다.
길이현은 그 말을 듣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그래서 이 기지를 샀다는 거죠? 명의는 한성님에게 있는 거고요.”
“그렇죠.”
“그······ 마력 핵 발전소도······?”
“운이 좋았죠.”
“게다가 빙산을 탐사하면 빙광석? 냉기와 빛을 머금은 돌이 있다는 거고요.”
“더운 나라에 수출하면 엄청 잘 나가겠죠? 게다가 마력까지 지니고 있어서 작은 소형 발전기를 돌릴 수도 있을 겁니다.”
“엄청나군요. 용량은 얼마나 되는지 혹시 아십니까?”
“냉기와 빛만 사용한다면 주먹만 한 게 족히 50년은 갈 거고. 전기까지 사용하면 5년에서 8년 정도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빙광석 하나를 방안에 놔두면 불을 따로 켤 필요도 없고 이불을 덮지 않으면 자지 못할 수도 있다. 밀폐된 공간에 넣으면 냉동고가 될 정도의 냉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력석으로 전기를 만들고 빙광석으로 냉기와 빛을 얻는 게 좋죠. 그것보다 좋은 건 냉기 속성을 뽑아내 사용하는 건데······, 아마 연구소에서 머리 꽤 써야 할 겁니다.”
이런 사실을 이한성이 어떻게 잘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고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으니까.
‘아마 정보 열람 관련 최상위 특성을 지니고 있겠지.’
길이현은 비슷하게 맞췄다.
그런 특성이 있긴 있으니까.
하지만 한성은 직접 사용해 보고 마법에 응용하려고 연구까지 했던 입장이기에 잘 아는 거다.
“뭐, 그건 그렇게 구해다 쓰시면 되고. 프로스트 리치도 사라져서 휘하 몬스터가 북극 전체에 퍼졌을 겁니다. 걔들이 잡기 까다로워서 그렇지 부산물은 쓸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거야 유명하죠.”
프로스트 리치가 죽었다.
한성과 하얀이에게 사냥당했다고 해야 하겠지.
하지만 북극의 빙산이 줄지는 않을 거다. 이곳은 그의 ‘성역’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그의 ‘신격’에 침식되었던 곳이니까.
“북극은 북극으로 남을 겁니다.”
극지(極地)는 변하지 않는다.
당장은 자리 잡고 있던 신격이 죽었지만, 또 새로운 신격이 이곳에 자리를 잡을 거다. 인간은 그걸 막을 수 없다. 그저 이 기지를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만드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길이현씨를 부른 겁니다.”
“그렇군요.”
“단순히 정부의 연구 기지라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이곳은 추후······.”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한성은 길이현을 바라봤다. 그녀는 깊은 눈동자로 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이든 맡겨만 달라고, 숨기고 있는 진실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모두 말할 순 없다.
“신격은 머리를 더욱 내밀 겁니다. 그리고 지구 곳곳에 있는 극지는 그들의 성역이 되기 아주 좋은 곳이며, 신격의 성역은 인류를 적대하는 신격의 전진 기지가 될 겁니다.”
검은 땅에서 31번 구역.
아마존에서 강철의 도시.
북극에서는 이 장영실 기지.
아직은 대륙에 비해 아주 작은 하나의 기지일 뿐이다. 하지만 한성을 ‘바둑’을 두듯 적의 영역을 압박할 거고, 언젠가 적의 맥을 끊을 핵심이 될 것이다.
아직 때가 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미리 준비해야 한다. 아무리 한성이 강해지더라도 세계 전체에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적’을 홀로 막을 순 없으니까.
슬슬 퀘스트의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할 거다.
한성은 바쁜 길이현을 놔주고, 근처 카페에 들어왔다. 이곳에서의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내서 하루 정도는 쉴 수 있겠다.
한성은 업로드한 동영상을 확인했다.
북극에 도착해서 프로스트 리치를 상대할 때까지의 모든 영상이다. 그것들은 올린 지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인기 동영상’의 순위권을 모조리 바꿔 버렸다.
그중 압권은 당연히 프로스트 리치를 상대하는 영상이었다.
[오늘 북극 짱 먹으러 왔습니다.(현실판 겨울왕국 ‘엘사’와 맞짱.)]
- 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친, 상상을 초월한다.
- 진짜 미친놈이야.
- 근데 리얼 엘사랑 닮았는데? 리치 아님?
- 리치 맞음. 저거 한성이 마법 건 거임. 컨텐츠 만들려고 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단히 미친놈이었다.
- ㅋㅋㅋㅋㅋㅋ 하얀이 또 뺐김.
- 하얀이 ㅂㄷㅂㄷ 타격감 ㅆㅅㅌㅊ
- 겁나 뚜까 패네. 저거 신격 맞음?
- ㅋㅋㅋㅋㅋㅋ북극 짱 먹었데ㅋㅋㅋㅋ
역시 인기가 좋다.
영상의 포인트는 프로스트 리치에게 환상 이미지 마법을 걸고 싸운 것이랄까.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치는 리치. 게다가 마법으로 신격을 단 놈이 아닌가. 이 마법을 걸기 위해서 페이크 마법 수십 개를 연사하며 틈을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맞을 각도의 마법에 위력이 약한 마법처럼 위장한 ‘환상’ 마법이 들어갔고, 한성이 몰아붙였기에 그 마법을 풀 여유도 없었던 거다.
한성은 그 마법을 건 이후로 영상을 촬영했다.
그래서 나온 완벽한 컨텐츠.
“흐흐. 역시 이런 게 재미있지.”
“흥!”
옆에서 졸졸 따라다니던 하얀이는 뿔이 잔뜩 나 있었다. 댓글에 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하얀이는 한성에게 프로스트 리치 사냥에서 처질 수밖에 없었다.
별 반쪽짜리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안 되겠어. 바빌론 오브 게이트를 업그레이드해야지!”
“어떻게 하게?”
“아빠, 나 돈 좀 빌려줘.”
“······응?”
“아니면 보증이라도.”
“······핏줄끼리도 보증은 서는 거 아니다.”
“치사해!”
“보물을 돈으로 사게?”
“응, 그렇게라도 해야지. 훔칠 수는 없잖아.”
“하······.”
도대체 누가 가르쳤길래 이럴까.
옆에 있던 건 헤일렌과 성시연 정도. 그리고 역시 가장 많이 지낸 것은 한성이다.
“······내가 다 잘못 키웠지.”
“흥, 아빠 잘못이지 당연히. 내가 아빠 딸인데.”
“우리 보물이나 구하러 다닐까.”
어차피 다음 목적지는 멀지 않다.
시간도 어느 정도 남은 것 같고. 북극 곳곳에 숨겨진 보물 몇 개를 찾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좋아!”
하얀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참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이번에 얻은 프로스트 리치야 바빌론 뭐시기에 필요는 없을 것 같고. 프로스트 리치 라이프 베슬로 뭔가 만들어줘야겠다. 준신화급 재료 아이템이기에 쓸 곳은 무궁무진하다.
* * *
[정연]의 장로와 직계 제자들은 ‘본가’에 들어온 한별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었다. 몇몇은 대놓고 시비를 걸어왔으며 뒤에서 뒷담을 하는 것은 예사였다.
세계 제일의 마법 가문의 막내로 태어나서 마법을 포기했으며 이젠 다른 힘으로 가문 내에 입지를 다지려 한다.
당연히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대놓고 들어온 것도 대단해.”
“야야, 들리겠다. 조용히 해.”
“들으면 어쩔 건데. 우리가 없는 말 했어?”
“우리라니, 네가 했지.”
“크흠. 하여튼, 화나면 덤벼보라고 하던지. 나도 이번에 레벨 6에 도달했다고. 등급으로 따지면 SS등급이야.”
한별은 연무장 구석에서 떠드는 [특수 마법 대대]의 대원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사실 다 들으라고 하는 말일 거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크게 이야기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한별은 속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신격의 태동이 시작되면서 계약하는 영웅이 많이 생겨났고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정연 본가에서 양성하는 마법 공격 부대 중 하나. 그것도 부대장이 아닌 일개 대원의 수준이 레벨 6이라는 건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겨우 3년 전 한별의 형의 수준이었으며 10년 전 한별의 아버지인 한구본의 수준이었다.
물론, 둘은 그때보다 배는 강해졌지만 말이다.
한별은 레벨로 따지면 6이다. 그 말은 SS등급이면서 역사를 넘어 전설을 쓰고 있는 ‘격’이라는 거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한별이 이곳에 온 이유는 자신의 힘을 증명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마법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고집을 꺾으면서 가문 내에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마법에 미친 사람들이지만, 편협하진 않다.
마법 외에 다른 힘을 낮게 보지만, 무시하지는 않는다.
언제나 공부하고 수양하며 강함을 숭배하는 이들이다.
[정연]엔 ‘특수 마법 대대’가 5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진으로 돌격하며 상대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레드 오우거], 은밀한 잠입과 암살이 위주인 [검은 엘프], 공습이나 대단위 폭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블루 드래곤], 대형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레이드팀 [회색의 늑대들].
그리고 오직 신격에 오른 ‘누군가’를 잡기 위한 [신격 사냥꾼]이라는 팀.
‘훗, 신격 사냥꾼이라는 업적을 가지고나 있을까?’
한별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는다.
가만 보면 웃기는 일이다. 진짜 그 업적을 지닌 이한성은 가만히 있는데, 이들은 그 오만한 이름을 부대 이름으로 지정해 사용하고 있으니까.
한별은 앞에 서 있는 [레드 오우거]의 대장 앞에 섰다.
“저에게 결투를 신청하신 겁니까?”
“네, 이은호 대장님.”
이은호.
[레드 오우거]의 대장이며 한별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삼촌이라 부르며 지내던 사람이다. 물론, 4살이 되고 훈련을 받으면서는 아주 이를 갈았지만.
“제가 똥 기저귀를 갈면서 키웠는데, 벌써 이렇게 크셨군요.”
“기저귀는 아주머니들이 갈지 않았습니까?”
“뭐, 제가 갈아달라고 했으니까 제가 간 거나 다른 없지요.”
“아마 5살 때, 은호 대장님께 팔이 잘렸었지요.”
“다시 붙여드리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아팠는지······, 아마 제 내장을 제 눈으로 본 게 은호 대장님과 훈련할 때였을 겁니다.”
“제가 다 치료해 드렸죠.”
한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은호도 뭐가 웃긴지 피식 웃는다.
“제가 살려드린 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8살 때, 고블린 부락 털면서 한 번 구해드렸고, 10살 때는 중동 암살 임무 갈 때 제가 옆구리 뚫리면서 구해드렸고요. 또······.”
“깁니다. 길어요. 따지고 보면 그거 모두 대장님이 보냈던 거 아닙니까.”
한별은 뒤로 한 발 무르며 이능을 끌어올렸다.
대장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마법을 준비했다.
“제가 그런 곳에 보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강해지지도 못했을 겁니다.”
한별은 웃으며 달려들었다.
화악.
한별의 검은 지배력이 연무장 전체를 삼켰다. 어둑시니와 계약하며 [왕명]으로 진화한 한별의 이능은 모든 물리적 현상을 지배 아래 두게 된다.
그것은 마력과 마법도 마찬가지다.
검고 투명한 기운은 이은호 대장을 묶었다. 그가 끌어올리던 마력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많이 성장하셨군요.”
이은호는 손을 휘저었다.
와장창!
한별의 지배력이 산산 조각났다. 하지만 그 지배력들은 연기로 변해 이은호 대장을 압박했다. 이것은 한별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부러지지 않는다.
이은호 대장은 그 와중에 마력을 움직여 다섯 개의 마법을 구현하며 한별에게 달려들었다. 도저히 마법사라고 볼 수 없는 우락부락한 오우거 근육의 돌진이었다.
“잠시 잊으셨나 봅니다.”
“제가 잊을 리 있겠습니까.”
레드 오우거.
실존하는 정말 희귀한 몬스터다. 누구는 돌연변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몬스터의 껍질을 벗고 ‘탈각’하는 과정에 생기는 개체라고도 한다.
산을 뽑아 바다를 막는다는 미친 신력(神力)을 지닌 오우거.
그 개체와 맨손으로 붙어 승리한 사람이 바로 이 앞의 이은호 대장이다.
콰아아아아-
붉게 달아오른 이은호 대장.
어둑시니의 형상이 덧씌워진 한별.
누가 밀리고 누가 압도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레드 오우거의 대원들. 다른 특수 마법 대대의 대원들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레벨 6이라면서 한별과 싸워도 지지 않을 것 같다던 대원도 마찬가지였다.
“레벨 6이 아닌데?”
저건 못해도 레벨 7에 맞먹는 힘이다. 당연하게도 이은호 대장이 레벨 7의 최상급이기 때문이었다.
둘은 다시 격돌했다.
이번에도 한별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업적들을 쌓아 온 거지.”
이 정도 격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안다.
힘은 격, 격은 업적. 그리고 그 업적은 한두 번 목숨을 건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수백, 수천 번 이상 죽음 속에서 살아남아야 가능한 업적의 힘이었다.
아무리 이은호 대장이 신격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그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다. 한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력자였다.
< 적의 준동은.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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