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투신의 탑. >
극한의 한기(寒氣)가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신격이 형성한 성역이었으며 그의 모든 영향력이 집약된 곳이다. 당연히 기지 안의 영웅으로는 프로스트 리치를 막을 수 없다.
하지만 프로스트 리치가 이 기지에 직접 신경 쓰지 않는다면 수백의 몬스터와 언데드만 막으면 되기에 기지는 보존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다.
프로스트 리치는 정확히 기지를 향해 다가왔다.
이번에 기지에 도착한 칼스는 뒤편에 있는 이한성과 이햐얀을 바라봤다.
처음엔 기대했다.
둘의 레벨이 모두 8이었으니까.
그 정도면 프로스트 리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부 회의에서 도출한 결론은 ‘아니요.’였다.
이곳은 프로스트 리치의 성역이다.
개도 자기 집에선 한 수 먹고 들어가는데, 리치는 휘하에 수만의 언데드와 몬스터를 데리고 있으며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성역’이라는 곳에 있는 거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전투였다.
하지만 그때.
뒤에 있던 이한성이 한 손엔 검을 꺼냈고 한 손엔 성배라는 걸 꺼냈다. 저걸 무기로 쓴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상당히 괴기하긴 하다.
옆에 있던 이하얀이라는 영웅은 뿔과 날개를 꺼냈다.
그 모습도 상당히 놀라웠다. 용혈(龍血)을 지닌 드래고니안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실제로 보니 위엄이 장난이 아니다.
화악.
따로 기세를 끌어올린 게 아닌 듯했다.
하지만 미증유의 기운은 전장을 빠르게 잠식해 나갔다.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레벨 8의 영웅인가?’
‘비천한’ 신격을 벗어난 인간. 드높은 신격에 도전하는 인간이며 이미 인간을 벗어난 초월자. 이한성과 이하얀은 그런 존재였다.
둘의 기세에 희망이 생기는 듯했다.
전장은 조용했다.
그런데 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 누가 별을 얻을지 내기할까?”
“흥, 오늘은 내겁니다!”
“진 사람이 한 달 동안 당번하기!”
“······으으. 한 달은 너무 긴데.”
“왜? 자신 없나? 쫄? 쫄?”
“으악! 아니야! 이긴다!”
그런 대화가 들렸다.
칼스는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어디 인터넷에서나 볼 법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 다른 이들도 비슷한 기분이었는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도중 이한성과 이하얀은 하늘로 올라갔다.
“어어?”
갑자기 전장을 이탈하는 건가?
칼스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팟.
둘은 프로스트 리치가 다가오는 곳으로 날아갔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우리는 어쩌죠?”
칼스가 물었다.
쫓아가서 지원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방어선을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만약 쫓아간다면 도움은 될까? 꽤 강한 영웅이 있긴 하다. 그래도 신격에 도달했다고 레벨 7에 도달한 영웅. 신격은 아니지만 높은 격을 얻은 레벨 6의 영웅들까지.
누군가 입을 열었다.
“음······. 굳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주 멀리 보이는 거대한 리치의 형상이 뒤로 넘어갔다.
이후, 굉음과 마력의 파장이 이곳을 훑고 지나갔다.
신들의 전장이 있다면 이럴까.
그들이 보는 광경은 상상 이상의 장면이었다.
그곳엔 신들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 * *
투신의 탑.
중국 베이징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구름을 뚫고 솟아 있는 마천루 하나가 있다. 본래 100년 전 마력이라는 힘이 등장하던 초기에 생성된 탑이다.
100년 전 탑이라기엔 세련된 겉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탑 내부에서 얻은 ‘포인트’를 이용해 각 층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정 업그레이드에 도달하면 외부까지 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은 SF의 느낌이 날 정도로 변한 상태였다.
- 다음 선수는 영웅이 된 지 겨우 며칠이 지난 ‘진훈’입니다!
- 한국 서울에서 활동하던 한국 영웅 아카데미 50인의 영웅 중 한 명입니다.
- 레벨 6을 바라보고 있는 최상급 ‘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진훈은 경기장으로 올라갔다.
이제 탑 1층이기에 수준은 높지 않다. 하지만 일반인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1층이기에 관객은 어마어마했다.
와아아아아!
중앙에 경기장 9개가 놓여 있었고 사방으로 수만에 달하는 관객이 각 경기장을 확대한 홀로그램 화면을 보며 환호를 지른다.
- 진훈 영웅의 상대는 ‘괴력의 사슬’이라고 불리는 항저우 일대의 레벨 5의 영웅 ‘라이’입니다!
- 5연승 중이며 한 번만 승리한다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와아아아!
또 한 번의 환호가 울렸다.
진훈은 첫 경기였다.
생각보다 귀여운 이름의 ‘라이’가 입을 열었다.
“내 제물이 될 애송이가 왔구나.”
진훈은 대꾸하지 않았다.
중앙에 홀로그램으로 숫자가 떠올랐다.
- 3, 2, 1!
- 시작!
괴력을 사슬이 몸을 감고 있는 두꺼운 사슬을 들었다.
하지만 진훈은 하나하나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훅.
찰나의 시간.
진훈은 발을 디뎌 앞으로 뻗어 나갔다. 금안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진훈의 주먹은 괴력의 사슬이라는 이의 복부에 닿을 뿐이었다.
커억.
쾅!
입이 벌어짐과 동시에 그의 몸이 뒤쪽 결계에 부딪혔다.
마치 종이 인형처럼.
스르륵.
툭.
- 자, 장외입니다!
- 첫 경기 진훈 영웅 승리!
진훈은 별 감흥이 없었다.
빠르게 저층을 뚫고 강자를 만나고 싶을 뿐.
[첫 경기에 승리하였습니다.]
[승리 포인트 150을 지급합니다.]
승리 포인트는 이 탑 안에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 현금으로 바꿀 수도 있고, 묵을 숙소를 빌리는 것에도 사용할 수 있다.
음식, 술, 옷, 생필품 등등. 모든 걸 이 포인트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총 1,000포인트를 얻으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10층, 20층, 30층에 있는 탑 고유의 상점에 가면 밖에서는 구할 수 없는 영약이나 아티팩트를 구할 수도 있다.
물론, 진훈에게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다.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다.
“다음.”
진훈은 조용히 말했다.
바로 다음 상대가 필요했다.
승리.
승리.
승리.
진훈은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주가 지났을 때, 50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 긴급 속보입니다!
- 북극에서 거대한 격의 유동이 파악되었으며, 그 흔적은 일주일 전에 있었던 흔적이라고 합니다. 한국 정부는 장영실 기지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영웅을 파견했습니다.
- 북극은 프로스트 리치의 블리자드로 인해 모든 전파와 마력의 이동이 막혀 있는 상황······.
“장영실 기지라면······ 이한성이 있는 곳 같은데.”
진훈은 배정받은 숙소에서 쉬고 있었다.
50층에 도달하니 따로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아도 호화스러운 숙소가 제공되었다. 80평이 넘어가고 넓은 거실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미술품과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매시간 유명한 셰프가 요리하는 코스 요리를 먹을 수 있으며, 와인, 위스키 등은 무제한 제공. 맞춤 정장, 맞춤 도복 등을 필요할 때마다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진훈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 진훈님, 한 시간 후에 50층 첫 경기가 있습니다.
“바로 준비할게.”
- 알겠습니다. 경기장은 B-12입니다.
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화스러운 코스 요리는 필요 없다.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니, 테이블에 올려진 위스키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진훈은 바로 경기장으로 이동했다.
여기서부턴 관객이 많지 않다. 관람료가 비쌌기에 일반인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다. 그렇기에 이곳에 모인 관객은 모두 거부들.
진훈이 들어오자 몇몇이 눈을 빛냈다.
이 주 만에 50층을 뚫었던 이들은 모두 최상층에 도달할 정도로 재능이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평균적으로 하루에 3.5층을 간 거나 다름없다.
‘인간’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수치인 거다.
- 신입이신 진훈 영웅님이 입장합니다.
- 그리고······.
- 1년째 50층에 체류하고 있는 알렉스님이 입장합니다.
알렉스라는 사람이 사회자를 째려봤지만, 사회자는 신경 하나 쓰지 않았다.
이제부턴 레벨이나 소속 등을 말하지 않는다.
진훈도 여기 와서 알았다.
이런 싸움에서 레벨은 소용이 없구나.
격? 여기서 레벨 5나 6이 아닌 사람은 없다. 그런데 레벨 5가 레벨 6을 이기기도 하고, 어제 이겼던 레벨 6이 오늘 똑같은 상대에게 지기도 하는 게 바로 이곳이다.
전 세계에서 싸움에 미친놈들이 모이는 곳.
그 동네에서, 그 지역에서, 그 나라에서 천재라고 불리던 이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 양측 준비 완료되었습니까?
미사여구는 없었다.
대신, 진훈의 머리 위. 알렉스의 머리 위에 현금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억을 넘어 수십억이 되었다. 이 경기를 보는 저 거부들이 양측에 건 액수인 거다.
진훈에게 걸린 금액은 12억.
알렉스에게 걸린 금액은 64억.
만약 진훈이 이기면 12억을 건 이들에게 64억을 나눠준다. 그리고 진훈에게도 그 나눈 액수만큼 똑같이 분배받는다. 이것은 50층 이상에서 승리 포인트 외에 본인이 직접 수령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보상 중 하나다.
게다가 지금까지 모은 포인트가 총 2만 포인트인데, 이번 한 판에 걸린 게 5,000포인트가 넘는다. 딱히 원한 건 아니었지만, 이 탑을 나가면 꽤 부자가 되어 있을 것 같았다.
진훈이 고개를 끄덕였고.
알렉스도 앞으로 한발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3, 2, 1!
- 시작!
알렉스의 기세가 폭발했다.
진훈은 투신의 탑에 들어오고 처음 웃었다.
이제 싸울 만한 상대가 등장했으니까.
진훈은 [초월]을 사용하며 눈에서 금빛을 쏟아냈다. 금색의 마력이 진훈의 육체를 강화하고 또 강화했다.
후웅.
콰아아아앙!
진훈의 주먹이 상대의 이능에 막혔다.
무슨 이능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굉장한 물리력을 지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뭔가 익숙하다 했더니 채찍에 폭발 이능 쓰는 후보생 동기랑 이름이 똑같네.’
하긴, 알렉스라는 이름이 흔하디 흔하니까.
휘리릭.
알렉스는 몸을 뒤로 물렀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진훈에게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냄새도 없고, 형체도 없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기에 기감에도 걸리지 않는다.
미세한 살기.
그것만으로 모든 걸 대처해야 했다.
만약 예전에 아버지와 끊임없이 싸웠던 [시련]이 아니었다면 막을 수 없을 만한 공격이었다.
사사삭.
뒤로 물러 피했다. 진훈이 서 있던 자리엔 수십 개의 자상이 새겨졌다. 웬만한 오러 블레이드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절삭력이었다.
씨익.
진훈은 더욱 크게 웃었다.
그래, 이 기분이다. 강자 앞에 서 있다는 기분.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 전신을 잠식하는 위기 본능이 마구 날뛰는 기분.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진훈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살기를 뚫고 상대에게 달려갔다.
* * *
길성현은 두꺼운 가죽을 둘둘 싸매고 있었다. 몸 곳곳은 상처 투성이었으며,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눈 밑은 깊게 파여 있었고 살은 쪽 빠져 마치 해골을 보는 듯했다.
‘젠장할.’
한성을 따라서 극지로 오긴 했다.
남극이었으니 북극만큼은 무서운 고행이 기다릴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긴 상상 이상의 지옥이었다.
빙하 밑에선 아이스 웜이 지나다니다 인간의 도시를 부수고 유령형 몬스터가 밤이면 오로라를 타고 내려온다. 남극에도 오로라라는 게 있는 줄 몰랐는데, 하늘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것은 단순한 오로라가 아니었다.
마력의 폭풍.
전자기가 날뛰고 마력이 날뛴다.
마력 컨트롤이 약한 영웅은 버틸 수 없으며, 마법은커녕 육체를 강화하는 마력 컨트롤도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아티팩트마저 말을 듣지 않을 정도로 마력의 폭풍이 심했다.
길성현은 그런 곳에서 2주를 버텼다.
작은 도시에 몸을 맡겼으며 근처에서 사냥을 시작했다. 다른 영웅과 팀을 이뤄 레이드도 했다. 순간 순간이 지옥이었지만, 그는 버텼다.
이한성이나 이하얀이라는 50인의 영웅 중 최강자도 북극에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을 거라는 행복한 상상 덕분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곳에서 고생한다면 그를 따라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런데.
- 이곳은 북극입니다! 이번 프로스트 리치를 막은 이한성 영웅과 이하얀 영웅님! 한 말씀 해 주시죠!
- 운이 좋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실력이었죠. 레벨 8의 프로스트 리치를 그가 만든 성역에서 싸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냐면······.
뻔뻔하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얼마나 어려운 일을 자신이 직접 해냈는지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의 실시간 댓글을 보자면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저런 관종인데 이렇게 인기가 있을 수 있을까.
저놈이 방송 중에 ‘배설’을 해도 좋아할 것 같았다.
- 저는 이제 북극을 떠날 겁니다.
그 말이 가장 싫었다.
길성현 본인은 이제 막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저놈은 이미 클리어하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아아악!”
악(惡)의 길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던 길성현은 다른 의미로 악(惡)의 길에 빠지고 있었다.
< 투신의 탑.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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