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스트 리치. >
한성이 졸업과 동시에 북극에 온 이유는 이 아이 때문이었다. [대격변] 이후에 생겨날 ‘신인류’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는 아이.
이지상.
북극 장영실 기지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누나와 고아들을 책임지는 소년. 원래는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있어야 시작되는 에피소드였다.
그래서 이번엔 위험했다.
앞으로 5년이라면 이지상은 더 성장한 후였을 거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지만 질리엄 정도는 손쉽게 이겼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시기가 너무 빨라졌고, 위험할 뻔했다.
운이 좋아 한성이 제때 나타나서 다행이었다.
근데 또 프로스트 리치가 하필 이때 남하한다. 정말로 운이 좋은 건지, 운이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식량을 사긴 해야 하는데······.”
한성은 아이들을 질리엄에게서 구하고 하얀이에게 맡겨 두었다.
질리엄은 아동 납치 시도, 불법 인체 실험 자백, 폭력 행사, 살인 미수 등등의 한성의 주관적인 죄목으로 장영실 기지 치안대에 구속해 두었다.
현역 영웅의 고유 권한이다.
말하자면 [임시 사법권]이랄까.
사건에 대한 진상이 완전히 파악될 때까지 영웅의 권한으로 구속하는 것. 물론, 이런 곳에서는 영웅의 판단 외에 참고할 만한 자료는 없기에, 한국 정부에서 질리엄을 데려갈 때까지 구속이 풀려나지도 않을 거다.
“은행이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장영실 기지라는 이름의 ‘기지’일 뿐이지만, 있을 건 다 있다. 규모도 꽤 커서 작은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성은 은행을 찾았다.
세계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영웅 은행]이라는 곳이다. 일반인은 사용할 수 없지만, 이런 오지에서도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웅 전용 은행이다.
딸랑.
“어서 오십시오.”
은행원으로 보이는 나이 많은 중년의 남자가 인사했다. 자기도 인사 하면서 놀란 표정이다.
하긴, 여기서 영웅 은행을 이용하는 영웅이 얼마나 될까.
“돈 좀 찾으려고요.”
마땅히 알맞은 단어를 찾기 힘들었다.
이런 오지에 [영웅 은행]이 있는 것은 ‘프로스트 리치’가 있는 이 기지처럼 전파나 마력이 닿지 않아 계좌의 잔고 확인을 할 수 없는 경우, 영웅에게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다.
“반갑습니다. 손님이 상당히 오랜만이라 놀랐네요. 장영실 기지 지점장인 이동우라고 합니다. 뭐, 직원도 저 혼자지만요.”
그가 차를 내왔다.
한성이 알기로 영웅 은행은 전파나 마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극소량의 정보를 전달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사용할 자금이 필요해요.”
한성은 마력석과 식량을 조금 챙겨오긴 했다.
하지만 당장 몇 개월 동안 아이들을 책임질 만큼 넉넉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 상주하면서 식량을 조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선택한 게, 근처에 작은 건물을 하나 구매해 세를 받는 거다. 아이들이 할 줄 아는 게 있다면 무언가 시작해도 되고 말이다.
“신분증 주시면 바로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한성은 깊은 향을 내는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전 회차에선 애용했던 은행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신기하지 않았다. 게임의 ‘시스템’의 일부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보니, 생각 이상으로 신기했다.
“여기선 나도 전파를 전송할 수 없는데······ 마력을 뿌려봐도 마찬가지고.”
이곳은 완벽하게 프로스트 리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성과 같은 레벨 8의 온전한 신격이 마음먹고 형성한 성역(聖域)이니까.
“확인 완료하였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점장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잔고가 상당히 많으시네요.”
“아, 그래요? 확인해 본 지 오래돼나서.”
헤일렌이 항상 관리했었다.
그래도 대부분 투자한 상태라 현금은 얼마 없을 텐데······.
“총······ 3조 4,500억 원 정도 있네요.”
“······그렇군요.”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돼야 맞다.
세계의 [대격변]으로 인한 정보를 미리 쥐고 있었으니까. 그때도 조 단위로 있었는데, 3년이 지난 지금 20%의 현금이 이 정도는 돼야 맞겠지.
“······일단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고. 근처에 건물 하나에서 두 개 살 정도만······.”
“하하. 이 정도면······ 장영실 기지 전체를 사실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기지 자체의 소유는 정부에 있겠지만, 내부 몇 개의 시설을 제외······ 아니, 지금 저희 영웅 은행을 통해 협상을 한다면 모든 기반 시설을 구매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당연히 그냥 하는 말이다.
한성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는데······.”
라고 생각하다 입을 닫았다.
지금 장영실 기지 안의 모든 건물과 기반 시설의 가격은 다박을 치고 있다. 3년 동안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젠 이 기지가 망할 것 같은 전투가 코앞이다.
“하하하, 아무래도 아니겠죠? 안 그래도 프로스트 리치가 코앞까지 내려왔으니 기지를 그냥 지나칠 일도 극히 드물고. 또한, 아시아를 덮쳐 북극이 고립되면 가치는 더욱 떨어지······.”
“······얼마면 되죠?”
“하하. 그냥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잔고가 많으시니까······.”
반쯤은 아부성 발언이었다는 거다.
하지만 한성은 진심이다.
“그래서 살 수 있습니까. 못 사는 겁니까.”
“······3년 전 시세는 대략 23조였습니다. 아무리 북극이라도 하나의 작은 도시니까요. 마력 기반 시설도 꽤 최신이었으니까요. 특히, 마력 핵 발전소까지 있으니······.”
“지금은요?”
“4조면······ 아니, 하루만 더 있으면 2조 원에 후려칠 수 있겠······ 아니,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전 회차에서도 한성은 이 기지를 소유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북극에서만 구할 수 있는 몬스터 부산물도 비싼 자원이지만, 프로스트 리치가 죽고 난 후에 빙산 속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빙광석(氷光石)]은 굉장히 비싸고 희귀한 광물이다.
게다가 [마력 핵 발전소].
이건 플레이어가 나라를 갖지 못하면 절대로 못 사는 도시 기반 시설이다.
수많은 튜버가 이 기지를 사려고 했지만, 이 [프로스트 리치 에피소드] 이후에 장영실 기지 안의 건물 시세는 하늘을 찌른다.
당연히 조 단위로 현금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렇게 멸망 직전까지 몰리는 타이밍을 잡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문득 생각나는 건데······ 확실히 운이 좋긴 한 것 같다.
“사죠.”
“······얼마나······.”
“전부 다요. 최대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번에 제현 그룹을 통째로 가져온 길이현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한국 정부 측과 협상이 잘 안 된다면 [마력 핵 발전소]는 가질 수 없지만, 다른 건물로라도 굉장한 시세 차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전투가 끝나면 제현 그룹을 끌고 들어와서 재개발을 시작해야겠다.
한성은 차의 향을 만끽하면서 ‘부수입’의 기쁨을 느꼈다.
* * *
하루가 더 지났다.
영웅 은행에서는 정부와 협상이 잘 끝났다고 말했다.
이한성 영웅이 직접 사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피했다고 했다. 레벨 8의 영웅이 기지를 직접 지키고 나선다면 기지가 회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볼 테니까.
역시 센스가 있는 지점장이다.
결국, 2조 5천억 원으로 기지 기반 대부분을 영웅 은행이 구매하기로 했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한성의 명의가 될 거다.
“지상아.”
한성은 장영실 기지 외곽의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 있었다. 그곳엔 이지상과 이지연. 그리고 그들이 돌보는 아이들 10명 정도가 있었다.
“네, 형.”
이지상은 한성과 이하얀을 잘 따랐다. 둘이 보여준 무력 때문일 수도 있고 아무런 조건 없이 식량을 나눠준 덕분일 수도 있다.
“[한국 영웅 아카데미] 알지?”
“네, 당연하죠!”
이지상은 항상 꿈을 꿨다.
부모님이 들려줬던 한국 서울의 모습. 부유 자동차가 다니고 워프 게이트가 곳곳에 세워져 있으며 구름을 뚫는 마천루가 빽빽하게 들어선 곳.
사람들은 부유하게 치안은 걱정할 것도 없다.
마치 천국 같았다.
그곳을 그렇게 평화롭게 유지할 수 있는 건 모두 [영웅] 덕분이라 했다. 강하고, 올곧으며, 정의감 넘치는 평화의 상징 그 자체.
[한국 영웅 아카데미]는 그런 영웅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그것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이번 대격변을 기점으로 단연 1순위가 되었다는 소문도 들었다.
“이번에 배출한 50인의 영웅은 대단하다고 했어요! 모두가 역사 이상의 격을 얻었다고요! 소문으로는 신격을 얻은 영웅도 있다는데······.”
이지상은 신이 났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이지연은 서글픈 눈을 했다.
상황 때문이다.
영웅이 아무리 대단하고 좋다고 해도 그곳으로 가야 후보생이 되던가 할 텐데 이들은 서울로 갈 수가 없다. 아카데미는커녕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미지수였으니까.
그리고······.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지연이 물었다.
기지 안 곳곳에 떠 있는 홀로그램에서 [프로스트 리치, 남하 중]이라는 글귀와 [대규모 전투 준비]라는 글귀가 보인다.
남하하는 프로스트 리치는 빠르면 오늘.
늦으면 내일이면 도착할 거라는 정보들이었다.
어린아이와 노약자는 기지에 숨어 있고 용병이나 영웅들이 전투에 나선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전투는 있었다. 하지만 수십의 언데드였으며, 수백의 화이트 울프 정도였다.
그것도 전투가 끝나면 수십 명이 죽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프로스트 리치 그 자체다.
기지 안은 난리였다. 몇몇은 이곳을 떠나 먼저 남하하겠다고 짐을 싸서 눈보라 속으로 들어갔고, 몇몇은 두려움에 집 안에 틀어막혀 나오지 않았다.
무서운 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이길 거야.”
한성이 대답했다.
“확실한 거예요······?”
“그래, 믿어도 돼.”
이지상은 신난 얼굴이었다가 이지연의 말에 얼굴이 굳었다. 이번엔 전처럼 쉽게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한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지상과 이지연이 한성을 바라봤다.
“나랑 같이 아카데미로 가자.”
“어디요······?”
“한국 영웅 아카데미.”
“······저요? 저?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래, 내가 꼭 데려다줄게.”
“······.”
이지상은 말이 없다.
옆에 있던 이지연도 그렇다.
질리엄이라는 놈이 이지상을 어떻게 하려고 했던 게 바로 하루 전이다. 그런데 한성이 또 그 이야기를 하니,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둘을 구해주고 아이들에게 식량까지 꺼내준 사람을 대놓고 의심할 수는 없었다.
한성은 품에서 영웅 신분증을 꺼냈다.
레벨 8의 영웅, 이한성.
“······어? 형······?”
이지상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생각해 보니 이름만 밝혔다. 그래도 꽤 유명한 줄 알았는데, 아직 이곳엔 퍼지지 않은 모양이다. 50인 어쩌고 할 때 알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과, 관종의 신!?”
“크흠.”
아무리 한성이라도 그 이명은 적응되질 않는다. 어서 [과거의 잔상]을 마무리하고 업적 몇 개를 더 세운 다음에 바꾸던가 해야겠다.
“진짜예요?”
“진짜지.”
이번 대답은 하얀이가 했다. 하얀이도 품에서 영웅 신분증을 꺼냈다. 이지상은 그걸 받아드는데 손을 덜덜 떨고 있다.
하긴, 영웅 신분증은 쉽게 볼 수 없다.
게다가 영롱한 홀로그램과 마력의 유동은 극히 아름답기도 하기에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럽겠지.
“와, 대박!”
이지상의 눈이 빛났다.
추운 곳에서 굶으며 꼬질꼬질해진 아이라고 볼 수 없는 열정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형, 형! 이거 별. 그거죠? 같은 레벨의 적을 잡았을 때 새겨주는 거!”
한성의 영웅 신분증에 왼쪽 구석에는 작은 별 다섯 개가 그려져 있다.
이 검은색으로 꽉 찬 ‘별’.
그것은 같은 레벨의 적을 최대 지분으로 잡았을 때 검은 별 하나를 그려준다. 바로 아래 레벨을 잡으면 테두리만 있는 별을 주고 다섯 마리를 잡아야 하나가 꽉 찬다.
한성이 상당히 좋아하는 시스템 중 하나였다.
만약 별 5개인 한성이 레벨이 9로 오른다면 기존에 있던 별은 속이 빈 별로 변하기 때문이다. 결국, 레벨 9짜리를 잡아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거다.
훈장 같달까.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닌, 현재의 훈장.
“그렇지.”
“와, 그럼 같은 레벨 8의 보스 몬스터를 5마리나 잡은 거예요?”
“4마리고. 한 개는 레벨 7짜리 7마리 정도 잡았지.”
“나도 있어! 여기! 난 4개 반이긴 하지만.”
하얀이가 약간 시무룩해 하면서 신분증을 자랑했다. 그러고보니, 이지상과 하얀이가 나이가 비슷하다.
한성은 신분증 구경하느라 신이 난 이지상에게 물었다.
“이거 가지고 싶지?”
“네! 정말요. 영웅이 되고 싶어요.”
“나랑 같이 가자.”
한성은 이지상의 손을 잡았다.
이지상.
플레이어는 특전으로 1,000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다음으로 높은 게 진훈이다. 981이라는 수치. 이것만으로도 이 세계관 최강이 되는 게 진훈이다.
그런데 이지상은 990이다.
물론, 여러 특성의 차이로 진훈을 따라잡을 순 없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렇게 빠른 시기에 영웅 아카데미에서 성장해 준다면 진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웅이 될 수 있을 거다.
“지상아, 나는 걱정하지 마.”
이지연이 갑자기 이지상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지연이 2살 누나지만, 이지상이 훨씬 컸다.
“······누나.”
“애들은 내가 잘 돌볼게. 너는 영웅이 되는 게 먼저······.”
“둘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
“당연히 같이 가야지.”
“아니······ 그게 어떻게······.”
이지상과 이지연이 당황한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걱정할 필요 없어.”
“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여기는 상당히 평화로워질 거거든. 또, 제현 그룹이 들어와서 식량이나 전기 걱정 없이 교육도 받게 해 줄 거야.”
한성은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이지상과 이지연은 왠지 모르게 그의 눈에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관종이다.]라는 특성의 영향이었지만, 둘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지상이는, 올해 바로 입학할 수 있도록 해줄게.”
이제 나이 제한이 없다.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거다.
신분 같은 거야, 제대로 등록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이 이 기지에서 둘을 낳고 돌아가신 거니까. 하지만 한성이라면 그 정도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때였다.
-위이이이잉!
경보음이 울렸다.
프로스트 리치와 그의 휘하들이 근접했다는 뜻이었다.
“한숨 자고 있어.”
한성이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고.
“신분증은 더 구경해도 돼!”
허리에 손을 얹고 뿌듯한 표정으로 선 하얀이가 그렇게 말했다.
“화, 파이팅이요!”
지상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주먹을 쥐었다.
한성은 둘이 모습이 귀여워 ‘풋’하고 웃음이 터졌다.
“오늘 별 하나 더 새기겠네.”
“오늘 별은 양보하지 않겠어!”
“할 수 있으면 해보시던지.”
< 프로스트 리치. > 끝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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