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영실 기지. >
레벨 8.
비천한 신격을 벗어난 이.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신격에 도달했다는 뜻이며.
그 신격마저도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뜻.
게다가 이한성이라는 이름.
현역 영웅 혹은 용병이라면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서울 상공의 ‘상흔’의 주인공이었으며, 금안의 외팔 무투가와 드높은 신격 사이에서 싸웠던 이.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국 영웅 아카데미]라는 소속 아래 50인의 팀을 이뤄 웬만한 영웅도 해내지 못할 업적을 쌓아왔다.
놀라운 것은 그때가 후보생이었다는 거다.
그리고 지금은 현역 영웅이 되어 있다.
우웅.
가벼운 마력의 유동음을 내며 다색의 홀로그램이 신분증을 감싼다. 그 누구도 위조할 수 없다고 자부하는 세계 영웅 협회의 영웅 신분증이다.
“······정말 ‘관종의 신’이라는 이명을 지닌 이한성님이 맞으십니까?”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알긴 아는군요?”
한성의 말은 기분 좋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역시 관종은 관종.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어서······ 위명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신분이 확인되었으니 궁금할 만도 할 거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장영실 기지에.”
“아, 혹시 아는 영웅이 있는 겁니까?”
“영웅은 아닌데, 오래전 꼭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있어요. 잘 모르실 겁니다.”
이한성은 대구 구이를 한 점 집어 먹고 소주를 들이켜며 물었다.
“장영실 기지로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이한성님과 같은 영웅님이 와주신다면, 저희야 언제나 환영입니다!”
이래서 이름을 알려야 하는 거다.
한성은 뿌듯한 표정으로 하얀이를 봤다.
이게 아빠의 능력이다!
하지만 하얀이는 크라켄 이후로 아무것도 잡지 못해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는지, 뚱하니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한성은 ‘쳇.’하며 고개를 돌렸다.
“저분은 혹시······.”
“이하얀이에요. 제 딸이자 현역 영웅이기도 하죠. 참고로 쟤도 레벨 8입니다.”
사실 하얀이에게 레벨은 중요한 게 아니다.
용혈 50% 이상인 하얀이야 나이만 먹으면 알아서 신격에 오르게 되니까. 거기에 한성과 함께 다니면서 세운 업적들로 인해 급속도로 성장하며 한성을 따라잡았다.
게다가 레벨 8 정도 되면 격의 차이로 인해 승패가 걸리는 일이 극히 적어진다.
뭐랄까, 레벨 7인 비천한 신격이 이제 막 백두산을 정복해 히말라야에 올라갈 자격을 얻은 거라면, 레벨 8은 히말라야의 중턱 ‘즈음에’ 있는 거다.
같은 레벨 8이라도 숨이 턱턱 막히는 구름 위에 있을 수 있고, 아직 눈도 얼지 않은 평평한 곳에 있을 수 있다는 거다.
“하여튼,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출발하시죠.”
한성은 모닥불을 더 키우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짧은 황색 머리의 미국인 칼스가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여기서 5분만 가면 되긴 하는데······.”
한성은 황당했다. 아무리 찾기 힘들어도 바로 이 근처였다니.
“······그걸 왜 이제······.”
“······알고 계신 줄 알고······.”
그래, 그럴 수 있다.
여기서 한성이라도 기감을 넓게 펼칠 수도 없고 눈보라에 지형이 계속 바뀌기에 지도도 소용이 없는 곳이니까. 마치, 뱃사람이 망망대해에서 길을 찾는 느낌이다.
“크흠. 맛있는 것도 있고 따듯하니 하루만 묵고 가죠.”
괜히 민망해서 그런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북극에서의 캠핑’이라는 컨텐츠를 완료하지 못했으니까. 또, 언제 이런 곳에서 캠핑하고 낚시하며 생선 구이에 소주를 먹어보겠는가.
좋았다.
이런 사치가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급한 길이긴 하지만, 내일까지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 * *
성시연은 ‘마왕화’를 완전히 끝마쳤다.
그녀의 머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은 오래된 산양의 뿔을 연상시켰고 쭉 뻗은 두 개의 날개는 전신을 감싸고도 남았다. 게다가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칼은 비단과 같았으며 보랏빛 눈동자는 무엇이든 빨아들일 마력을 담고 있었다.
‘오라’.
무형의 기운. 혹은 분위기.
그녀의 매력은 70을 넘겼으며 외모의 묘사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아니, 완벽함을 떠나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검은 가시]를 뿜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엔 수십 미터의 검은 가시가 솟아났으며 순수한 마기는 하나의 폭풍이 되어 마수와 마족을 쓸어 담았다.
“뒤쪽은 제가 정리할게요!”
“오케이, 둥지는 내가 파괴한다.”
성시연 못지않게 아름다운 세르비체 또한 마왕화를 완료한 상황이었다.
둘은 귀족 마족의 둥지 하나를 털고 있었다. 이곳에 검은 땅의 아이가 잡혀 있다는 보고를 들었고, 마침 근처에서 임무를 맡고 있던 둘이 온 것이다.
이제 귀족 마족 정도는 쉽다.
둘은 손쉽게 둥지를 무너뜨리고 귀족 마족을 잡았다.
성시연은 틀어쥔 귀족 마족의 목을 조이며 물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지?”
“켁. 크흐흐.”
“어디 감히 기분 나쁜 얼굴로 웃어?”
“우, 웃기지 않나?”
“뭐가. 이 개 같은······.”
성시연은 화가 나 그냥 죽이려 했다. 아이들이야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찾아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으니까.
“내가 왜 그들을 잡아왔을까.”
“왜? 뻔하지 화신체 만들겠다고 하면서······.”
“크큭. 맞아. 맞지. 근데 왜 서부까지 가면서? 수천 킬로나 떨어진 곳에서 말이야.”
“······.”
성시연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콰아앙!
무너진 둥지 아래서 폭발이 일어나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4년 전인가. 그때부터 이상한 인간이 생기기 시작했더······.”
두두두두.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
그리고 흙먼지 사이로 주먹이 날아왔다.
성시연은 봤다.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기이한 힘의 유동이 주먹을 빠르게 만들었으며, 성시연의 사고를 경직시켰으니까.
마치 거대한 격을 앞에 둔 것처럼.
‘분명 격은 없는데?’
그 주먹은 성시연이 쥐고 있던 마족의 머리를 깼다.
‘날 치는 게 아니었······.’
그녀의 생각은 거기에 멈췄다.
마족의 머리를 깬 주먹이 경로를 틀어 성시연까지 공격했기 때문이다.
쿠우우.
마족의 피를 묻힌 주먹은 대기를 뚫고 성시연의 배에 닿았다. 순간 북 터지는 소리가 나며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렸고 주먹은 다시 한 번 뻗어졌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까지였다.
세르비체가 기다란 손톱을 꺼내 주먹의 주인을 제압했고 성시연도 붉은 마력을 뿜어 대상을 포박했기 때문이다.
“뭐야? 꼬맹이잖아?”
흙먼지가 가라앉고 드러난 주먹의 주인은 작은 소녀였다. 10살이나 되었을까.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팔과 다리를 가졌고 얼굴은 비쩍 마른데다가 구정물과 눈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소녀는 곧 죽을 것처럼 빌었다.
성시연은 이상함을 느꼈다. 이 소녀에게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것 정도야 특성이나 재능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마족을 한 번에 죽일 정도로 ‘격’이 있지 않았다.
‘내가 느낀 격은 뭐지?’
“아, 안 돼! 우리 언니 살려주세요!”
“누나! 살려주세요!”
이 작은 소녀가 나온 곳에서 한 명씩 올라온 아이들이다. 이 마족이 잡아뒀던 검은 땅의 아이였다.
“걱정하지 마렴. 우린 너희를 구하러 온 거야.”
성시연과 세르비체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 * *
“빌어먹을 꼬맹이들. 먹고 싶으면 돈을 가져와! 돈을! 나가서 마력석이라도 가져오던지! 어디, 장사 안되게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어!”
허름한 이동식 노점상 주인이 시뻘건 김치가 묻은 식칼을 휘두르며 꼬질꼬질한 아이들을 쫓아냈다.
두 아이 중 한 명은 도망가려고 했지만, 한 명은 주인을 독하게 바라봤다.
돈은 없고 부모님도 없다. 그렇지만 살고 싶은 아이들끼리 뭉쳤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런 노점상이나 일반적인 가게에서 일하는 거다.
하지만 그것도 써 주질 않는다.
북극 지하에 지어진 장영실 기지는 극한의 빈곤 상태에 있었다.
3년 전, 갑작스레 신격이 태동하고 프로스트 리치는 더욱 강해졌다. 그러다 보니 밖과 이곳을 연결하는 길은 더욱 험난해졌고 소수의 영웅이 아니면 밖을 나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의 식량은 부족해졌고 화폐의 가치는 말도 안 될 정도로 하락했다. 종일 일 해도 한 끼를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거다.
어른들은 그나마 ‘화이트 울프의 가죽’을 빌려서 밖에서 무언가 구해온다. 그것도 마력을 단련한 영웅이나 용병이나 가능한 일.
이제 갓 10살이 된 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한 달에 한 번 오는 보급을 기다리고 며칠에 발품을 팔아 몇 시간씩 찔끔찔끔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것도 힘들어 노점상의 음식을 훔칠 생각까지 한 거다.
하지만 훔치지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
“참아. 돌아가자.”
노점상 주인을 독하게 바라보는 이지상을 이지연이 말렸다.
이곳에서 싸우면 안 된다.
“이길 수 있어.”
“그래, 이길 수 있겠지. 그럼 치안대는? 영웅은? 다 이길 수 있어?”
“어쩌면 그게 가능할 지도······.”
“그래, 만약 이겼다고 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
“네가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돼. 힘을 사용하는 것에는 책임이 따르는 거야.”
“······우리 삼 일째 아무것도 안 먹었어.”
“우리만 그래? 우리 아지트의 모두가 그래.”
“그러니까! 누군가는 음식을 구해야 할 거 아니야! 아니면 내가 그냥 나갈게. 있는 거 다 끌어모아서 가죽 빌리면······ 밖에서 무언가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안 돼.”
이지연은 단호했다.
그건 안 된다.
지금 10살처럼 보이지만 태어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된 아이가 바로 이지상이다. 3년 전부터 급격한 성장, 이상한 힘. 그 때문에······ 아니, 그것과 상관없이 부모님은 이지연과 이지상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가 죽었다.
그런데 이제 동생까지 밖으로 내보내라고?
그럴 순 없다.
“참아. 오늘 안 왔으니까. 내일이면 보급이 올 거야.”
“안 오면? 계획보다 3일이나 늦었어. 그런데 내일은 올 거라고?”
이지상의 눈엔 눈물이 맺혔다. 이지연도 마찬가지다. 코와 눈이 벌게졌다.
서로는 안다.
서로의 마음이 어떤지.
유일한 혈육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러면서도 자신을 의지하는 다른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그러면서도 힘이 없음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무력감.
하지만 버텨야 한다.
살기를 원하면 살 수 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꼬마야, 배고프지?”
뒤에서 누군가 둘에게 입을 열었다.
이지상은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보급이 온 것인가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둘은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얼쩡거리던 사람이다.
이 어두운 지하에서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다. 어디였더라······ [마틴]이라는 기업에 소속된 PMC 스카우터라고 했었나.
“아니요. 괜찮아요.”
“벌써 3일이나 굶었잖아.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나와 함께 가면 남은 아이들은 편하게 먹고 살 거야.”
“······그걸 어떻게 믿죠?”
이지상이 물었다.
하지만 이지연은 이지상의 팔을 붙잡으며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건 아니라고, 들을 필요도 없다고. 어떻게 먹을 것 하나 때문에 스스로를 파냐고.
“선불로 다 줄 거야. 당연한 거지? 그리고 너희에게 해가 될 건 없어. 그저 우리 소속으로 영웅이 되어 주길 원하는 거야.”
“그쪽에선 뭘 얻는 거죠?”
“너희. 아니, 너와 독점 계약 10년.”
10년이라는 세월은 길다.
이지상은 자기가 가진 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지만, 지원만 있다면 강해질 수 있다.
이런 북극 따위는 아무렇지도 오갈 수 있는 영웅이 될 수 있는 거다.
“우리 지상이는 안 갈 겁니다.”
“누나.”
“안 돼. 너를 키워준다고? 그 말은 어떻게 믿어? 10년 독점? 그래, 뭔가 기간이 기니까 균형이 맞는 계약 같아 보일 거야. 하지만 목적이 키워서 영웅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하하하하핫. 어린 아가씨가 상상력이 풍부하군요.”
그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을 젖혀 웃었다.
“맞아, 누나. 그게 아니면 어떤 목적이 있겠어?”
“지상아······.”
이지상은 이미 결심한 표정이었다. 이지연의 감각은 절대 가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감이 안 좋으니 가지 말라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이 진짜 이지상을 지원해준다면······. 정말 영웅이 될 수 있게 도와준다면 이지상이 가는 게 그를 위해 맞는 결정일 수도 있었다.
“좋아, 좋아. 내가 나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 지금 당장 식량과 화폐를 전달······.”
“자, 저길 보십시오. 지금 식량을 미끼로 어린아이를 꼬시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어른들이 말했죠. 저렇게 맛있는 거 준다고 낯선 아저씨 따라가면 뭣 된다고.”
갑자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셋은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어떤 남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그는 스카우터의 얼굴을 찍기 위해서인지 줌을 당기고 있었다.
“다, 당신 뭐야?”
“보세요. 당황했쥬? 뭔가 찝찝해 보이쥬? 어? 이제 뒷걸음질까지 치는데?”
“아니, 이 사람이! 당신 누구야!”
마력이 확 올라왔다. 주변의 대기가 뒤로 밀리며 강한 기세가 공간을 장악했다. 일정 ‘격’까지 지닌 모양인지 멀리 이곳을 바라보던 사람들까지 뒤로 물러나야 했다.
그 와중에 이지상이라는 소년은 자신의 누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이 ‘격’의 향연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제가 누구냐고요?”
“······미친놈인가.”
스카우터는 남성이 취하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궁금하다면 밝혀드리는 게 인지상정.”
남자의 말과 동시에 뒤에서 작은 소녀가 뛰어나와 이상한 포즈를 취했다. 사선으로 선 다음 중지를 미간에 대는 모습.
“나는 게이트 오브 바빌론의 주인, 이하얀.”
“나는 튜브 구독과 좋아요를 부탁해요! 이한성.”
셋은 앞에서 이상한 쇼를 벌이는 두 명을 넋 놓고 바라봤다.
그때, 둘은 미간에 대고 있던 중지를 꿈틀거렸다. 그러다 나머지 손가락은 손바닥에 붙이고 중지만 길게 뻗은 채 스카우터에게 내밀었다.
그것도 둘이 완벽히 같은 타이밍에.
“······?”
스카우터의 얼굴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곤 싸늘하게 굳어 기세를 방출했다.
저것들을 찢어 죽이겠다는 살기였다.
< 장영실 기지. > 끝
ⓒ [동주]
=======================================